낙서탐방

트로트 & 20세기의 서양무용

기산(箕山) 2012. 6. 14. 00:03

 

트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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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트(Trot)는 일제 강점기에 발생한 대한민국 대중가요의 장르이다.

트로트는 일본 엔카 음악이 한국에서 현지화한 음악이다.

‘트로트’라는 이름은 구미 춤곡의 하나인 폭스트롯(foxtrot)에서 유래한 것이며,

일본 토속 음악에 접목 돼 엔카가 되었고, 일제 강점기에 한국에 전해졌다.

 

한국에서 전해오던 세 박자 또는 다섯 박자(3+2)를 기본으로 하는 것을 ‘트로트’라고 부르고,

빠른 두 박자(쿵짝, 쿵짝…)를 기본으로 하는 것을 ‘뽕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만 ‘뽕짝’은 속어로 보아 공식적으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역사

 

일제 강점기, 트로트의 탄생기

1920년 이전 일본에서는 일본 고유의 민속음악에 서구의 폭스트로트을 접목한 엔카[演歌]가 유행하고 있었다.

이 음악이 일본의 식민지 정책으로 인하여 1920년대 한국에 들어와 한국식 트로트풍(風)의 음악이 시작되었다.

 

일본에서는

보통 빠르기의 템포를 가진 엔카를 안단테 트롯트(Andante Trot),

조금 느린 템포의 엔카는 미디엄 트롯트(Medium Trot)라고 표기하는데,

엔카(演歌)의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인 트롯트(Trot) 리듬이 다름 아닌 1914년 ~ 1917년 사이에

미국에서 생겨난 댄스리듬인 폭스 트롯트(Fox Trot) 리듬이라는 사실은,

이 시기의 일본이 미국을 비롯한 서양제국과의 음악적 교류가 얼마나 활발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이 시기에 일본이 미국과의 음악적 관계가 어떠했는지 알아본다.

 

1903년 일본의 천상당(天賞堂)이란 상사에서 미국 콜럼비아 레코드의 평원반 레코드를 최초로 수입하여

판매한 것을 계기로, 1908년에는 미국의 빅타레코드를 수입하고, 1910년에는 일본 축음기회사(日蓄:닛지꾸)를

설립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의 신식가요가 어떤 경로와 기술적인 영향밑에서 자리를 잡았는지 한 눈에 알 수 있게 한다.

따라서 미국에서 유행하는 모든 음악은 콜럼비아나 빅타 레코드사를 통해 바로 바로 수입되었고,

이 형식을 빌려 일본의 가요들이 만들어졌는데, 일본의 레코드 역사가 시작되자마자 위에서 언급한

폭스 트롯트뿐만 아니라, 모든 재즈, 폴카(Polka), 마치(March), 월츠(Waltz), 그리고 라틴(Latin) 리듬까지

등장하고 있는 것이 그 실제적인 예이다.

 

1914년 닛지꾸(日蓄)회사는 일본 최초의 유행가라 할 수 있는 松 聲과 카츄사의 노래(復活唱歌)를

松井須磨子의 노래로 취입하고, 1915년에는 곤도라의 노래( ), 1918년에는 사스라히노 우타( )를,

그리고 1919년에는 우리나라에서 주인공을 이수일과 심순애로 등장시켜 장한몽가로 옮겨놓은

금색월차(金色月叉)를 취입하여 드디어 자국 가수 취입시대로 접어 들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때까지는 엔카의 형식을 가진 노래가 아니라 서양곡에 가사를 따로붙여 노래한 번안곡이거나,

일본의 민속음악인 부시(節) 형식의 노래들이 대부분이었다.

 

본격적인 엔카(演歌) 형식이라고 볼 수 있는 노래는 1921년에 발표된 나까야마 신요우(中山晉平)작곡의

센도코우타(船頭小唄)이다.

이 노래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 1923년까지 카레루 스스키( )라는 제목으로 일본 전역에 유행했다.

그러나 이후 1930년까지는 이렇다할 노래가 발표되지 않았다.

 

1922년∼1930년 사이에 일본 가수의 노래가 거의 발표되지 않은 대신,

닛지꾸(日蓄)회사와 콜럼비아 빅타레코드 등은 한국 가수들을 대거 취입시키는데,

사의 찬미의 윤심덕을 비롯해 낙화유수(김서정 작사/작곡)의 이정숙과 봄노래 부르자(김서정 작사/작곡)의

채규엽 및 세동무의 채동원, 그리고 암로(暗路)의 김연실등이 대표적인 가수였다.

 

이들은 1926년∼1930년에 취입한 가수들이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엔카의 비조(鼻祖)로 삼는 고가마사오의 1931년 작품 사케와 나미타까 타메이키까(酒 淚 溜息 )가

발표되기 한 해 전까지, 이미 한국의 가수들은 한국 작곡가가 작곡한 신식가요(유행가)를 레코드로 발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한국의 트롯트와 일본의 엔카는 같은 시기에 같은 궤적을 따라 일란성 쌍둥이와 같이 흡사한 모양으로

태동하고 또 발전해 온 것이다.

 

트로트의 정립기

193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서는 음반산업과 라디오 방송으로 대표되던 거대 매체가 자리잡게 되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30년대 중후반 트로트의 주류화를 결정한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1935)>이나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1938)>, <감격시대>

이래 황금심의 <알뜰한 당신>이나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 등이 있다.

 

광복 이후 ~ 1950년대

1947년에 데뷔한 현인은 〈신라의 달밤〉을 크게 히트시켰다.

이후 1950년대까지 활발한 활동을 통해 많은 명곡을 발표하였다.

 

1950년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전쟁 기간 동안 〈전우여 잘 자라(현인)〉와 같은 가요가 유행하기도 했지만,

휴전 이후에는 전쟁의 아픔과 실향민의 비애를 그린 〈굳세어라 금순아(현인),

〈이별의 부산정거장(남인수)과 같은 곡이 유행했다.

 

특히 1954년에 이해연이 발표한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한국 전쟁의 아픔을 깊이 담아냈다는 평가를 얻어

크게 히트했다.

 

한국 전쟁 전후에 월북한 작가들의 작품은 발행금지 조치가 취해지기도 했는데,

작곡가·작사가나 가수의 곡 또한 많은 곡이 발행금지 처분되었다.

대표적으로 박재홍의 〈유정 천리〉와 같은 곡을 비롯해 많은 곡이 1988년까지 발행되지는 않았으나,

인기를 끌어 노래는 불리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했다.

 

1957년에는 ‘엘레지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미자가 데뷔했으며,

1959년경부터 LP판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1950년대 후반에는 고학력의 가수가 등장하여 눈길을 끌기도 하였다.

 

1960년대 ~ 1970년대

1961년에는 한명숙이 발표한 〈노란 샤쓰의 사나이〉가 크게 인기를 끌었으며,

프랑스의 샹송 가수 이베트 지로나 일본하마무라 미치코 등이 리메이크하면서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권까지 크게 유행하기도 하였다.

 

1967년에는 남진이 부른 〈가슴아프게〉가 크게 히트했고,

같은 해에는 그의 라이벌이자 후일 국민가수로 불리는 나훈아가 데뷔하기도 했다.

1971년에는 은희의 〈사랑해〉가, 1973년에는 패티김이 부른 〈이별〉이 크게 히트하면서

두 곡의 작곡가인 길옥윤의 명성이 높아지기도 했다.

 

1975년에는 송대관이 직접 작사한 〈해뜰날〉이 많은 사랑을 받아 가수왕에 등극하기도 하였고

1976년에는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크게 히트하면서 트로트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1977년에는 이성애가 일본에서 데뷔하면서 트로트를 소개했다.

이후 조용필이나 김연자, 계은숙 등의 가수가 일본에서 활동하는 계기가 되었고,

많은 트로트 곡이 히트하기도 했다.

 

1980년대

남진과 나훈아의 2인체제가 끝나고 다양한 스타일의 가수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현숙은 80년대 초반에 3회 연속으로 MBC 10대 가수상을 수상하여 트로트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70년대 후반에 대학가요제에서 데뷔한 심수봉은 1984년에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를 히트시켜

수많은 앨범이 판매되었다.

 

작곡가 출신이자 가창력을 풍미하던 김수희가 1985년에 〈남행열차〉를 히트시키면서

국민가요로 등극하기도 했다.

 

문성재는 1982년에 〈부산 갈매기〉를 불렀고

이 노래는 롯데 자이언츠 야구대표팀의 응원가로 쓰이면서 더욱 히트하였다.

그 해 설운도는 KBS 신인탄생으로 데뷔하였고 데뷔곡 〈잃어버린 30년〉이

이산가족찾기운동의 주제가로 쓰여 많은 사랑을 받았다.

 

약국을 운영하다가 대학가요제를 통해 등장한 주현미는 1985년에 정식 음반 〈비내리는 영동교〉를 내면서

트로트의 여왕으로 부상했다.

1988년에는 〈신사동 그 사람〉을 발표해 밝은 분위기의 트로트를 이끌어갔다.

주현미는 그 해 연말 문화방송에서 주최한 MBC 10대 가수 가요제에서 대상 격인 최고 인기가수상을 수상하였다.

 

1987년에는 당시 여고생이던 문희옥이 《사투리 디스코 메들리》로 360만 장을 판매하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면서 데뷔했으며, 1989년에는 당시에 새로운 도시로 떠오르던 남서울 영동을 노래한

〈사랑의 거리〉를 발표했다.

 

현철은 1989년에 〈봉선화 연정〉으로 KBS 가요대상 본상을 수상하면서 트로트의 황제의 위력을

전국에 전파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태진아는 임종수가 작곡한 〈옥경이〉로 가수로서의 두번째 데뷔를 하였고 가요차트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고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1990년대

여성 가수들 중에서 서울 시스터즈로 데뷔했던 방실이가 솔로 가수로 전향하여

음반을 낸 <서울탱고>가 가요계 정상권을 차지하며 트로트의 위상을 떨쳤다.

 

또한, MBC 신인 가요제 출신 박윤경이 <부초>를 부르면서 한국 가요계에 정통 트로트의 바람을

또 한번 일으켰다.

 

그러나 90년대 중반에 들어설 무렵 락, 발라드, 댄스팝, R&B,힙합 등이 한국 가요계를 주도하면서

트로트는 상당히 소외되었고 트로트를 고집하던 가수들은 한동안 침체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 시기에 댄스가수였던 김혜연이 등장하여 트로트에 새로운 요소를 가미시킨 세미 트로트를 접했다.

김혜연은 <서울 대전 대구 부산>을 히트시켜 젊은 층을 확보하며 신세대 트로트 가수로 자리잡아

트로트가 활성화되었다.

 

2000년대 이후

김혜연이 새로운 트로트음악을 시도하게 되면서 대부분의 트로트 가수들은 정통 트로트에서 벗어나

트로트와 여러 장르의 음악을 접목시킨 세미 트로트가 번성하기 시작하면서 트로트의 다변화를 이끌고 있다.

 

21세기 초반에는 송대관, 태진아, 설운도 등 여러 중견 가수들이 트로트 시장을 장악했다.

하지만 트로트 음악은 아직까지 어른들의 노래 (성인가요), 시대에 뒤떨어진 노래 등으로 인식되어

중견층들에게 국한되어 왔다.

 

기타

트로트와 비슷한(같은) 음악에는

대만의 타이위거, 인도네시아의 (Ngebor), 태국의 룩퉁(Luktung), 터키의 (Uskudar) 등이 있다.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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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무용

20세기

 

20세기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활기찬 무용의 시대였다.

새로운 형식을 그토록 열정적으로 모색하고 개성적인 표현과 더욱 역동적인 생활양식을

그처럼 열광적으로 추구한 적이 없었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연구 성과가 급속히 축적되고 사회문제에 대한 인식이 높아감에 따라

모든 예술은 그러한 변화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발레는 러시아의 무용감독 세르게이 디아길레프(1872~1929)의 지도 아래 완전히 새롭게 태어났다.

디아길레프가 이끄는 발레 뤼스가 몰고온 예술적 결과는 엄청났다.

1909년 그가 파리로 이끌고 간 발레 뤼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의 왕립극장에서 뽑은

일류 무용수들을 망라하고 있었다.

당시에 살았던 그 어떤 사람도 그처럼 수준 높은 발레를 본 적이 없었다.

 

그뒤 20년간 발레 뤼스는 러시아에서는 전혀 공연을 가지지 않고 서양에서 제일가는 발레단으로 부상했다.

디아길레프가 직접 발레를 안무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는 발레계에서 관심의 초점이 되었으며 무용, 음악, 시각 디자인, 가사를 통합하여 모든 요소가 균등하게 작용하는

'총체예술'을 이루고자 했다.

 

발레 뤼스는 당대의 으뜸가는 작곡가와 화가들을 고무시켰고 가장 현대적인 예술적 작업을 실험하는 무대가 되었다.

1909~29년 많은 최고 무용가(니진스키·파블로바), 안무가(포킨·발란신), 가장 전위적이고 독창적인 화가와

작곡가(피카소·드랭·스트라빈스키·사티) 덕택에 디아길레프 무용단은 창조적인 예술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이 무용단은 영구적으로 순회공연을 하는 최초의 대무용단으로서 사설기구로 운영되었고

국적을 넘어 모든 서양인에게 갈채를 받았다.

 

19세기말 일부 무용가들은 단조로움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비교적 제한된 표현수단에 의해

불가피하게 전통에 얽매여 있는 발레라는 예술형식 자체의 타당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그들은 표현적인 무대무용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했다.

 

여성이 새로운 형식의 개척자로 전면에 나섰다.

그들은 무용수들의 내면적인 충동에 따라 동작 속에 자기를 표현하는 무용을 옹호했다.

이러한 새로운 무용, 즉 '현대무용'의 선구자는 미국의 이사도라 덩컨(1877~1927)과 루스 세인트 데니스(1877~1968),

독일의 루돌프 라반(1879~1958) 등이다.

 

새로운 세기의 발레와 현대무용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분위기의 변화는

무도장 문화에 주목할 만한 영향을 미쳤다.

유럽의 젊은 세대는 신세계에서 들어온 더욱 활발하고 역동적이며 정열적인 사교무용을 열렬히 받아들였다.

 

19세기의 회전무는 투스텝, 원스텝이나 터키 트롯, 폭스 트롯, 그리고 퀵스텝같이 들쭉날쭉한 새로운 리듬에 맞추어 추는,

걷는 무용에 밀려났다.

 

그 리듬들은 아프리카가 원산지로서 라틴아메리카의 탱고와 룸바 또는 미국 흑인들의 재즈를 통해 전해졌다.

이 영향은 1918년 이전에 유행했던 래그타임과 그뒤를 이은 절분(切分)된 리듬 및 달콤한 스윙, 곡예와도 같은 지터버그,

다음 세대의 로큰롤 등을 형성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색인 : 아프리카 예술).

 

라디오와 전축이 등장하면서 사교무용이 보급되자 순수한 민속무용을 추는 지역은 점차 줄어들었다.

민속무용은 서구적인 도시화·산업화의 본류에서 벗어나 있던 나라에서 새로운 형식으로 최소한의 명맥을 유지했다.

 

스페인에서는 열정적인 플라멩코 춤의 전통이 존속되었으며

헝가리에서는 작곡가들이 풍부한 민요와 민속무용의 유적들을 모아서 보존했다.

 

스페인의 바스크족 같은 소수민족들도 이웃 민족의 영향력에 압도당하지 않고

자신들의 동질성을 유지하기 위해 민속무용을 보존했다.

 

아시아의 여러 공화국에서는 민속무용이 여전히 생생한 현실성을 가지고 남아 있다.

이전보다 더욱 활기차고 더욱 개방적인 모든 종류의 무용은 제2차 세계대전의 산물이었다.

 

전후의 사교무용은 지속적인 활력과 열광을 특징으로 한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인기를 누린 지터버그 같은 춤들은 빠른 발걸음으로 경쾌한 회전과 들어올리기를 하면서 추었다.

 

영화와 텔레비전은 트위스트 같은 로큰롤 춤들을 보급하는 데 기여했다.

재즈에 바탕을 둔 이러한 새 세대 무용의 특색은 춤추는 사람들 사이의 신체적 접촉이 없다는 점이었다.

 

1970년대 중엽에 디스코가 등장하면서 허슬과 범프같이 파트너와 함께 정해진 스텝에 따라 추는 춤이 살아났다.

디스코는 현대 재즈 무용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으며 체육경기식의 춤동작도 끊임없이 발달했다.

 

특히 1980년대에는 브레이크 댄싱이라는 곡예적인 춤양식이 등장했는데

이는 몸을 복잡하게 비트는 것이라든가 마임과 같은 걷는 동작, 목과 어깨에 의지해 빠르게 회전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반면에 덜 복잡한 춤양식도 있었다.

이를테면 슬램 댄싱같이 몸을 상대방에게 밀착시키는 춤이라든가 포고(pogo)처럼 음악의 리듬에 맞추어

그 자리에서 뜀뛰기를 하는 춤이 그것이다.

 

그러나 짝지어 추는 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서부 컨트리 음악에 맞추어 추는 '서부 스윙' 춤에서는 특히 그런 방식이 우세했다.

 

전후의 발레 무대는 금세기초 디아길레프의 경우같이 혁명적인 발전을 이루지는 못했다.

고전 발레 양식은 서방과 소련을 통틀어 절대적으로 군림했다.

발레가 사람들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끌고 영구적인 무용단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발레의 양식과 내용에

폭넓은 변형이 생겨났다.

국제적인 순회공연이 대규모로 재개되었다.

발레와 현대무용은 양식과 인원 면에서 상당한 상호작용을 주고받았다.

현대무용은 혁신적인 무용가이자 안무가인 마사 그레이엄과 트와일러 타프의 노력에 힘입어 계속 발전했다.

이들은 독자적인 무용단을 창설하여 새로운 무용양식을 모색했다.

 

또한 발레와 현대무용의 안무가들은 미국식의 뮤지컬 연극을 위한 무용을 만들기도 했다.

인도·실론·발리·타이 등지의 무용단들은 발레와 현대무용 모두에 영향을 미쳤다.

무수한 앙상블 작품이 생겨났으며 전통적인 민족무용에 바탕을 둔 그들의 레퍼토리는 무대용으로 각색되었다.

 

동유럽의 몇몇 나라와 이스라엘, 아프리카의 몇몇 신생국, 그리고 브라질·멕시코·필리핀 등지에도

그와 비슷한 무용단들이 있었다.

 

20세기초부터 무용활동은 지극히 다면적이고 화려한 면모를 보였다.

다른 어느 세기에도 사회적 활동 가운데 무용이 그처럼 중요한 역할을 한 적은 없었다.

이 점은 무용에 관한 연구와 집필이 엄청나게 증가하고 미국의 많은 대학에서 별도의 무용학부가 개설되고

소련에 무용연구소들이 창설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20세기에 무용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무용이야말로 서양 문화의 생명력과 힘을 샘솟게 하는 마르지 않는 원천임을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