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관

허술한 검증·온정주의·거짓말…‘신뢰 잃은 청와대’

기산(箕山) 2012. 2. 13. 00:38

허술한 검증·온정주의·거짓말…‘신뢰 잃은 청와대’

 

                                                                                  경향신문 | 박영환 기자

                                                                                  입력 2012.02.12 19:07 | 수정 2012.02.12 20:56

 

"고승덕 의원과는 말 한마디 해본 적 없고 눈길 한 번 나눈 적 없습니다."

한나라당 2008년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의 윗선으로 지목돼 사퇴한 김효재 전 청와대 정무수석(60)이

지난달 6일 기자들과 만나 한 말이다.

돈봉투를 돌려준 고 의원과 일면식도 없고 돈봉투도 모른다고 선을 그은 것이다.


그는 "기자생활을 25년 했다.

언론과 막다른 골목에서 만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며 사건 연루설을 쓰는 언론에 법적 대응도 시사했다.

이틀 뒤 고 의원이 검찰에 불려가 자신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거론한 뒤에도

"대면으로나, 전화로나 이야기해본 적 없다"고 부인했다.

 

이후 박희태 전 국회의장(74) 측근들이 줄줄이 검찰에 소환되고 추가 정황이 속속 드러났다.

김 전 수석은 한 달 내내 "돈봉투 사건에 대해 아는 바 없다"며 무시와 부인으로 일관했다.

그 사이 청와대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버티던 김 전 수석을 한 방에 무너뜨린 것은 내부의 증언이었다.

박 전 의장의 수행비서였던 고명진씨가 지난 9일 언론을 통해

"고 의원에게 300만원을 돌려받은 뒤 김 수석에게 직접 보고했다"고 고백하면서 '윗선' 실체가 드러났다.

고씨는 "책임 있는 사람들이 아랫사람의 희생만으로 위기를 모면하려 한다"며

박 전 의장과 김 전 수석을 정면으로 겨냥했다.

김 전 수석은 하루를 더 버티다가 지난 10일 결국 사퇴했다.

15일에는 검찰에 소환될 예정이다.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으로 청와대의 도덕적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

청와대는 검찰 눈치만 보며 거짓말과 부인으로 일관했다.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는 상황에 몰리자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는 모습을 보였다.

 

이번만이 아니다.

청와대는 지난해 부산저축은행 사태로 김두우 전 홍보수석(55)이 구속될 때도 똑같았다.

'거짓말→사실 폭로→사퇴→검찰 수사'가 사후 땜질식 청와대 대응의 전형이 된 것이다.

부산저축은행 사태의 불똥이 청와대로 번지자 김두우 전 수석은

지난해 8월30일 기자들과 만나 "(로비스트 박태규에게) 구체적인 청탁을 받아 액션을 하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그는 "청와대에 있으면서 내 영역이 아닌데 주제넘게 나서 조치한 적도 없다"면서

"(야당 공세는) 또 하나의 청와대 흠집 내기"라고 규정했다.

그 역시 언론보도에 "대응을 검토해보겠다"고 말했다.

김두우 전 수석은 해명한 뒤 한 달도 안된 9월16일 검찰에 소환되기 전날 밤

홍보수석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어떤 로비를 한 적도 금품을 받은 적도 결코 없다"고 주장했지만

9월28일 구속됐고 지난달 26일 1심에서 징역3년, 추징금 1억3140만원을 구형받았다.

청와대가 국민들에게 '거짓말 권부'로 남을 행태를 반복하는 이유는 뭘까.

 

우선 내부에 만연한 온정주의가 원인으로 꼽힌다.

김효재 전 수석과 관련한 의혹이 이어졌지만 청와대는 "일방적 주장이 아니냐.

김 수석의 해명을 신뢰한다"는 입장만 반복했다.

고씨의 폭로가 나온 지난 9일에도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아직은 신뢰한다"며 김 전 수석을 감쌌다.

 

매주 대통령과 대통령실장이 주재하는 수석비서관회의에가 열리지만

이 자리에서 김 전 수석 거취가 논의된 것은 사퇴 당일인 지난 10일이었다.

김 전 수석 파문이 일어난 지 35일이 지난 시점이다.

자정 능력 상실도 신뢰를 추락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9월 측근 비리가 잇따르자 국무회의를 주재하며 "정말 이대로 갈 수 없다.

측근이면 측근일수록 더 엄격히 다뤄야 한다"고 엄단 의지를 밝혔다.

 

임태희 당시 대통령실장(56)은

"측근 비리는 소문만 있어도 먼저 대응하겠다"면서 매주 관계기관 회의를 열겠다고 선언했다.

말과 행동은 달랐다.

 

측근비리 관련 회의가 김 전 수석 건과 관련해 선제적 조치를 취한 내용은 전무했다.

오히려 언론에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발 빼기로 일관했다.

언론 보도에는 '정정보도, 민사소송' 등으로 강력 대응하겠다는 엄포만 우선 내놓았다.

검찰의 수사결과만 바라보는 구태도 한몫하고 있다.

 

모르쇠로 일관하다가 검찰의 소환 등 입장이 정리되면 대응에 나서는 모습을 반복하는 데서 드러난다.

검찰 수사가 유야무야될 것을 기대하며 시간벌기를 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대통령의 잘못된 인사 스타일과 그에 따른 허술한 검증시스템 때문이란 지적도 피해가기 어렵다.

청와대 내부에서 객관적으로 걸러낼 수 있는 검증 기능이 작동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측근 비리가 잇따르는 것은 도덕성보다는 일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사람을 뽑는 데 따른

불가피한 결과인 셈이다.

돈봉투 사건과 관련한 청와대 거짓말 행보는 여권에 후유증을 남길 것으로 보인다.

돈봉투 사건은 국회의장과 청와대 정무수석이 얽힌 여권 스캔들로 번질 수 있는 상황이다.

박 전 의장과 김 전 수석의 거짓말과 말 맞추기가 증명되거나 여권의 추가 연루자가 나올 수도 있다.

4월 총선을 앞둔 새누리당 입장에서는 악재가 분명하다.

청와대는 도덕성에서 치명적 상처를 입었다.

 

향후 또 다른 인사가 의혹 선상에 올랐을 때 청와대가 "잘못 없다. 믿는다"고 하더라도,

국민이 이를 믿어줄지 의문이다.

더욱이 이 대통령은 지난달 2일 신년사에서

"저 자신과 주변을 되돌아보고 잘못된 점은 바로잡고 보다 엄격하게 관리하겠다"고 약속했지만

한 달 만에 허언이 됐다.

핵심 참모의 거짓 해명과 내부의 감싸기가 확인된 만큼

이 대통령의 말에 대한 국민적 신뢰도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잇따른 친인척·측근 비리와 겹치면서 대통령의 국정운영 주도권은 약화되고

레임덕은 속도를 낼 것으로 전망된다.



<박영환 기자 yhpar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