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관

<김前대통령서거> 막내린 3김시대

기산(箕山) 2009. 8. 18. 14:09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연합뉴스 | 입력 2009.08.18 13:49 | 수정 2009.08.18 14:05

                                                                            (서울=연합뉴스) 김재현 기자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金大中.85) 전 대통령이 18일 오후 1시 42분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달 13일 폐렴으로 신촌세브란스에 입원, 중환자실에서 집중치료를 받고
증세가 호전돼 22일 일반병실로 옮겼으나 하루 뒤 폐색전증이 발병하면서
인공호흡기를 부착한 채 치료를 받아왔으나 끝내 회복되지 못했다.

 

 
1925년 전남 신안에서 가난한 농부였던 아버지 김운식(金雲植)과 어머니 장수금(張守錦)의
4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목포 북교초등학교와 5년제인 목포상고를 졸업한 뒤
목포일보 사장을 지냈으며 민주당 대변인이었던 63년 목포에서 6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된 뒤
7,8,13,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 전 대통령은 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나섰으나
당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에게 석패한 뒤
87년, 92년 대선에서 연거푸 낙선했으나 97년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김 전 대통령은 72년 유신체제 등장 후 87년 6월항쟁으로 민주화가 이뤄지기 전까지
군부독재정권에 의해 반체제 인사로 분류돼 잇따라 투옥, 수감되고 해외 망명생활을 하는 등
숱한 고초를 겪었다.

80년에는 5월17일 신군부의 비상계엄 확대 조치 때 학생 소요사태의 배후조종 혐의로 구속된 뒤
광주민주화운동을 사전 지시했다는 내란음모 혐의로 그해 7월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듬해 1월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으나 국제사회의 압력 덕분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그는
82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돼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85년 12대 총선을 앞두고 귀국,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과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으로서 민주화 항쟁을 이끌었다.

87년 직선제로 치러진 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권 후보단일화에 실패,
평화민주당을 창당하고 대선에 출마했으나 민정당 노태우(盧泰愚) 후보와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에 이어 3위에 그쳤다.

92년 14대 대선에서는 민자당 김영삼 후보에 패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했으나
95년 이를 번복하고 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네번째 대권 도전에 나섰다.

그는 이듬해 김종필(金鍾泌) 자민련 총재와의 야권 공조를 앞세워
97년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건국 후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실현했다.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 투쟁과 인권신장, 통일운동에 평생을 헌신해
독재 종식과 민주주의 정착, 한반도 평화 조성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대통령 재임 기간, 6.25 전쟁 후 최대 국난이었던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세계최고의 정보화사회를 구현했으며 북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과 해방 후
첫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남북화해협력 시대를 열었고,
그 공로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친인척 비리와 인사편중 시비,
대북 햇볕정책을 둘러싼 보수층과의 갈등으로 임기 내내 국정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또 퇴임 후에도 대북 비밀송금과 국정원의 불법도청 사건으로 측근들이 기소되고
현실정치 개입으로 정치권과 마찰을 빚는 등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함에 따라 60년대부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세 사람이
현실정치의 중심에서 영향력을 행사해온 이른바 `3김시대'가 막을 내리게 됐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희호(李姬鎬) 여사와 세 아들인 홍일, 홍업, 홍걸씨 등이 있다.

jah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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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前대통령서거> 막내린 3김시대

                                                                           연합뉴스 | 입력 2009.08.18 13:52 | 수정 2009.08.18 13:56                                                                            (서울=연합뉴스) 정윤섭 기자

 
반세기 가까이 한국정치를 움직여온 3김(金) 시대가 막을 내렸다.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김종필(JP) 전 국무총리와 함께 3김 중 한명이자,
정계 은퇴 후에도 유일하게 현실정치에 적극 개입했던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1960년대 이후 3김은 한국 정치사를 좌지우지하며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는
냉혹한 정치현실을 온몸으로 보여줬다.

이들은 때로는 동지로서 손을 맞잡았고, 때로는 언제 그랬냐는 듯 극한 대립의
정치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의 관계는 애증(愛憎)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도 부족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치에서 입신(入神)의 경지에 올랐다는
`정치 9단'의 칭호는 이들 3김에게만 허락된다.
그만큼 3김이 한국 정치사에 남긴 족적과 폐단은 깊고도 넓다는 의미일 것이다.

JP는 1961년 처삼촌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군사쿠데타에 가담하면서
정치사의 전면에 등장했고, DJ와 YS는 1967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에서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첫 대결을 펼친 뒤
야당의 새로운 지도자로서 경쟁과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3김은 새로운 정치적인 도약을 준비했으나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한 5공화국 신군부의 등장으로 암흑기를 맞게 된다.

JP는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몰려 재산을 압류당하고 정치활동이 금지됐다.
DJ는 내란음모죄로 구속돼 사형선고까지 받았고,
YS는 가택연금 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민주화를 향한 국민의 힘은 3김에게 다시 정치활동의 공간을 만들어줬다.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된 것이다.

DJ와 YS는 후보 단일화에 실패해 나란히 1987년 13대 대선에 출마했고,
JP도 충청권을 지역 기반으로 삼고 대선에 나섰다.
하지만 야권의 분열은 여당 후보인 노태우 후보의 승리로 귀결됐다.

하지만 이듬해 1988년 4월 총선에서 DJ(평민당)와 YS(통일민주당),
JP(신민주공화당)는 각각 호남, 영남, 충청의 표를 결집시키면서
지역감정에 기반한 여소야대의 구도를 만들었다.

1990년 YS와 JP는 집권여당과 합당하는 `3당 합당'(민정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합당)에
참여해 거대여당인 민주자유당을 만들었다.

YS는 여당의 대권후보를 꿈꾸고 있었고, JP는 내각제 개헌을 염두에 두고 한배를 탄 것이다.
하지만 DJ는 민자당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합당에 참여하지 않았다.

먼저 웃은 사람은 YS였다. YS는 1992년 대선에서 여당 후보로 나와 당선됐고,
DJ는 대선패배를 인정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YS의 대통령 당선으로 3김 정치는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이는 또 다른 시작일 뿐이었다.
YS와 JP는 집권여당인 민자당 총재와 대표 최고위원으로 협력관계를 맺었지만
JP는 1995년 YS 민주계의 퇴진 압력에 반발, 민자당을 탈당한 뒤
같은해 3월 충청기반의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했다.

DJ도 1995년 지방선거 직후 정계복귀를 선언하면서
역시 호남을 지역기반으로 한 국민회의를 창당했다.

1996년 15대 총선은 3김이 맞붙은 또 한번의 승부였다.
YS가 이끄는 집권여당인 신한국당은 과반에 미치지 못하는 139석을 얻는데 그쳤고,
DJ의 국민회의는 79석, JP의 자민련은 50석을 확보했다.

YS에게 쫓겨난 JP는 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DJ가 내민 손을 잡았다.
이른바 `DJP 연합'을 통해 야권후보 단일화를 이뤄낸 것.
이에 따라 DJ는 대권 4수 끝에 대통령에 당선됐고, JP는 국민의 정부 초대 총리로
정권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됐다.

그러나 DJP 공조도 오래가지 못했다.
2001년 9월 JP는 내각제 개헌 약속이 이뤄지지 않았다며 DJP 공조 파기를 선언했다.

이후 2002년 16대 대선에서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가 당선됐고,
DJ는 전직 대통령의 한 사람으로서 정계를 물러났다.

JP는 자민련 총재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2004년 총선에서 자민련이
노 전 대통령 탄핵 역풍을 맞고 참패하면서 비례대표 의원에도 당선되지 못하게 되자
3김 가운데 마지막으로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3김은 2007년 17대 대선국면에서 현실정치 개입 논란을 불러 일으키며
질긴 정치의 끈을 놓지 못했다.

DJ는 갈라진 범여권의 결집을 촉구하면서 단일후보를 촉구했고,
YS는 "잃어버린 10년을 끝내야 한다"며 정권교체를 강조했다.
JP는 한 발짝 더 나아가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지지를 천명했다.

특히 DJ와 YS는 올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와 북핵 사태 등을 거치면서
여전히 화해할 수 없는 사이임을 입증했다.

3김은 격동의 한국 정치사에서 근대화와 민주화를 이루는데 기여했지만
지역주의와 보스정치, 금권정치라는 폐단을 남기기도 했다.
3김 정치의 공과는 이제 역사의 몫으로 남게 됐지만
아직도 우리의 정치지형은 3김이 만든 지역주의의 견고한 틀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jamin74@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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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前대통령서거> 파란만장했던 영욕의 삶

 

                                                                           연합뉴스 | 입력 2009.08.18 13:50 | 수정 2009.08.18 14:23                                                                            (서울=연합뉴스) 송수경 기자

 
후광(後廣)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통일운동과 민주화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대한민국 현대사의 거목(巨木)이었다.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으로 그가 헤쳐나간 반세기 정치역정에는
한국 현대사의 질곡이 오롯이 투영돼 있다.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향한 의지는 투옥과 연금, 망명의 고통을 딛고
마침내 인동초(人冬草)처럼 피어올라 헌정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와
해방 후 첫 남북정상회담이란 열매를 맺었다.
 

 

 

 

 

 
그러나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그가 놓지 못했던
남북화해라는 화두는 미완의 유업으로 남았다.
 
◇ 섬소년에서 정치인의 길로 =
김 전 대통령은 목포 앞바다에 솟아있는 섬, 하의도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교육열이 남달랐던 어머니가 전답을 팔아 뒷바라지해 준 덕분으로 목포로 유학,
목포상고(현 전남제일고)에 수석 합격했다.

졸업 후 강제징집을 피해 일본인이 운영하던 해운회사에 취직했다.
해방 후 이 회사 관리인으로 사업수완을 발휘, 목포일보까지 경영하는 등
청년실업가로 성장했다.

그는 해방공간에서 몽양 여운형 선생이 좌우익을 망라해 구성한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
좌익계열이 주도권을 잡자 환멸을 느껴 탈퇴했다.
그러나 건준에 몸을 담은 이력은 그를 평생 `색깔론'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한 멍에였다.

그는 한국전쟁 중 우익반동이란 이유로 공산당에 붙잡혀 투옥됐으나
총살 직전에 탈출, 생애 5번의 죽을 고비 중 첫번째 고비를 극적으로 넘겼다.

김 전 대통령의 정계 입문 과정은 3전4기 끝에 성공한 그의 대권도전사와 닮은꼴이다.
54년 실시된 제3대 민의원 선거 때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쓴 잔을 마신 그는
56년 장 면 박사가 이끌던 민주당에 입당, 본격적인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

59년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 60년 5대 민의원 선거에서 거푸 고배를 마셨지만
4.19 혁명으로 이듬해 5월 다시 치러진 인제 보선에서 생애 첫 금배지를 달았다.

하지만 당선된 지 사흘 만에 5.16 군사정변이 나는 바람에 선서 한번 못해보고
의원직을 잃고 말았다.

잇단 낙선으로 재산을 탕진한 그는 59년 첫 부인 차용애씨와 사별하고
홀어머니와 병든 누이동생과 함께 전세방을 전전하는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러다 62년 YWCA 연합회 총무로 활동하던 미국 유학파인 이희호 여사와 재혼,
가정적으로 안정을 되찾았고, 63년 6대 총선 때 목포로 지역구를 옮겨 금배지를 달면서
중앙 정치무대에 발을 디뎠다.

64년 김준연 의원의 구속동의안 처리 때에는 본회의장에서 5시간19분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연설로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해내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40대 기수론에서 6월 항쟁까지 =
71년 첫 대선 도전에서 97년 4수 끝에 최고 통치권자에 오르기까지 36년간의 대권 도전사는
좌절과 재기의 반복이었다.

67년 7대 총선에 당선된 뒤 그해 5월 한평생 정치적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원내총무 경선에서 첫 대결을 펼치지만 고배를 마셨다.

그러나 70년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철승 의원의 막판 지원으로 YS를 누르고
이듬해 대선에 나섰으나 박정희 대통령에게 95만표차로 석패했다.

그의 대권 도전은 야당의 대표 정치인으로 도약한 계기가 됐지만
긴 가시밭길에 들어서게 만든 원인이 됐다.
박정희 정권이 정적으로 지목, 탄압을 본격화한 것이다.

유신이 선포된 72년부터 87년 6.29 선언까지 17년의 시간은 납치와 망명, 투옥, 연금으로 점철된
암울했던 시기였다.
73년 일본 도쿄에서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납치돼 수장당할 뻔했으나
미 정보기관의 도움으로 살아났고, 74년에는 명동성당에서 `3.1 민주 구국선언'을 주도했다가
3년간 복역한 뒤 가택연금을 당했다.

79년 10.26 사태로 복권, 정치일선에 컴백했지만
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다시 민주화의 꽃을 피우려던 그의 꿈은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무산됐고,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이후 군사정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사형에서 무기, 무기에서 20년형으로 감형돼
죽음의 그림자에서 또 한 번 벗어났지만 82년말 미국으로 쓸쓸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그는 미국 체류 중 국내에 있던 YS와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한 데 이어
85년 `2.12' 총선을 앞두고 망명생활을 접고 전격 귀국을 감행했으나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또다시 가택연금으로 `갇힌 몸'이 됐다.

연금 상태에서도 그는 민추협 공동의장으로서 신민당 총선 승리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군사정권의 숱한 탄압에도 오뚝이처럼 일어서는 그의 의지는 87년 6월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는 밑거름이 됐다.

◇양김 분열 후 정권교체까지 =
그는 87년 13대 대선을 앞두고 YS와 후보단일화에 실패하자 평민당을 창당해 출마했다.
당시 YS로 단일화될 경우 민주진영의 정권교체가 보다 유력시되는 상황이었지만
두 사람은 끝내 권력욕 앞에서 갈라졌다.

대선에서 노태우, 김영삼 후보에 이어 3위에 그치면서
민주진영으로부터 지역주의에 기댄 야권 분열의 책임자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김 전 대통령 스스로도 훗날 "당시 내가 후보직을 사퇴하는 게 옳았다"고 회고했다.
지난 88년 총선에서 호남지역을 싹쓸이하면서 원내 제1야당으로 부상, 재기하는가 싶더니
90년 3당 합당으로 입지가 다시 좁아졌다.

그러다 91년 9월 YS가 떠난 민주당의 이기택씨와 야권통합을 성사시켜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났고,
이듬해 총선에서 97석의 의석을 거머쥐면서 대권 재도전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하지만 92년 12월 대선에서 YS에게 패해 대권 3수에 실패하자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홀연히 영국 유학을 떠났다.
곡절 많은 정치인생에 마침표가 찍히는 듯한 순간이었다.

93년 7월 귀국한 김 전 대통령은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하는 등
통일운동에 전념하는 듯한 행보를 보이다 95년 7월18일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호남을 지역적 기반으로 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정치전면에 복귀했다.

우여곡절 끝에 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박정희 정권의 최대 실세였던 김종필(JP) 자민련 총재와 손잡았고,
'DJP 공조'는 외환위기를 맞아 '준비된 대통령' 탄생을 갈망하는 국민 여론을 타고
정권교체의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DJ정부 출범..불운했던 말년 =
국민의 정부 5년은 순탄하지 않았다.
대선 승리의 감격을 누릴 여유도 없이 당선 다음날부터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다.

김대중 정부는 5년 동안 외환위기를 단기간에 극복하고
역사적인 6.15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분단의 벽을 허물어 남북화해와 통일의 기반을 구축하는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집권세력 내부의 갈등과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견제,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측근 비리 사건이 잇따라 터져나오면서 YS처럼 조기 레임덕에 빠지는
고통을 맛봐야 했다.

특히 대통령의 아들들과 `2인자'로 불렸던 권노갑 전 민주당 최고위원이 비리사건에 연루돼
구속되는 등 `옷로비' 이후 각종 비리의혹 사건은 정권의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혔다.

집권 기간내내 특정지역 인사편중 시비가 끊이질 않았고,
북한군의 서해 도발로 햇볕정책은 `퍼주기'로 치부됐다.

퇴임 후에도 시련은 계속됐다.
노무현 정부 시작부터 몰아닥친 대북송금 특검으로 남북정상회담 성과에 흠집이 가고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 측근들이 `영어의 몸'이 되는 장면을
지켜봐야 했다.

2005년에는 불법 도.감청 사건 수사로 임동원, 신 건 전 국정원장이 구속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외부활동과 정치적 발언을 통해 건재를 과시했다.
2006년 10월 북한 핵실험 사태가 터지자 "북미관계가 안 돼서 진전을 하지 못한 것"이라며
햇볕정책 책임론을 반박했고, 2007년 대선 전에는 여당의 대통합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의 `한마디'는 퇴임 후에도 민주당과 전통적 지지층에 무시못할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민주주의와 서민경제, 남북관계가 위기에 빠졌다고 비판하면서
민주개혁세력의 연대를 주문하는 등 왕성한 정치활동 때문에 현실 정치 개입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이명박 정부를 독재로 규정하는 등
대정부 투쟁의 선봉에서 한나라당과 보수 진영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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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YS, 생전에 맞잡은 '화해'의 손

                                                                               YTN동영상 | 입력 2009.08.18 14:57

 
[앵커멘트]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 투쟁의 평생 동지였습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대권을 놓고 경쟁을 했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두 사람은
김대중 전 대통령 생전에 극적으로 화해했습니다.

두 사람의 오랜 애증 관계를 김주환 기자가 정리했습니다.

[리포트]
유신과 5공화국 시절 민주화의 상징이었던 양김.
1971년 대선 후보 선출을 위한 신민당 전당대회 결선투표에서
김대중후보가 김영삼후보를 상대로 역전극을 펼치면서 협력과 경쟁으로 점철되는
양김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유신이 선포되면서 야당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양 김은 박정희 정권에 맞서는 동지관계로 돌아섭니다.

두 사람은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경쟁하지만
그것도 잠시, 5공 군사정권의 등장은 두 사람의 협력을 가져오게 됩니다.

김대중 전대통령의 미국망명과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단식, 그리고 뒤이은 
 사람의 지지자들로 구성된 민주화추진협의회의 결성을 통해 강력한 민주화 동지로 거듭 납니다.

이듬해 12대 총선에서 민추협이 모태가 된 신한민주당은 돌풍을 일으키며
제1야당으로 등장하고, 이어진 직선제 개헌 투쟁 등 민주화 장정에서 결실을 맺게 됩니다.

1987년 대선을 앞두고 다시 경쟁관계로 돌아선 두 사람은 후보 단일화 실패와
이에따른 정권교체 좌절을 거치면서 급속도로 멀어졌습니다.

1990년 민정당과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3당 통합을 계기로
두 사람은 야당내 경쟁자에서 여야의 정적관계로 뒤바뀝니다.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전대통령이 승리했지만
97년 대선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면서 승자가 됩니다.

이후 국민의 정부 시절 김영삼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가장 격렬한 비판자가 됩니다.

1999년, 부산 민주공원 개원식때 김영삼 전 대통령은 김대중 당시 대통령을 면전에 두고
독재정권이라며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의 긴장관계는 계속돼 정치적 이슈가 있을 때마다 날카롭게 대립했습니다.
원로들과 민주화 동지들의 끊임없는 화해 권유가 있었지만 결과는 없었습니다.
40여년동안 정치적 숙적이자 민주화의 가장 큰 동지였던 두 사람.

서로 다른 기질과 자라온 환경, 계층적, 지역적 지지기반이 때로는 시너지효과를 거두기도 하고
때로는 소모적 정쟁을 불러오기도 했습니다.

[녹취: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
"두 분은 민주화 동지인 동시에 보완적 경쟁관계였습니다."

하지만 힘겨운 김대중 전 대통령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찾음으로써
극적인 화해를 했습니다.

[녹취:김영삼, 전 대통령]
"이제 화해한 것으로 봐도 됩니까?"
"이제 그렇게 봐도 좋습니다. 그럴 때가 됐습니다."

한국 정치사의 한 획을 그었던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은 생전에 이렇게
다시 손을 맞잡았습니다.

YTN 김주환[kim21@ytn.co.kr]입니다.

[관련기사]
▶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 인동초의 삶 김대중
▶ 평생의 꿈, 남북 화해와 협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