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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을이 지나면 사법의 질서가 바뀐다

기산(箕山) 2015. 9. 19. 14:34

이 가을이 지나면 사법의 질서가 바뀐다

 

                                                                                       경향신문 | 이범준 기자

                                                                                       입력 2015.09.19. 13:52 | 수정 2015.09.19. 14:19

 

사법시험 폐지와 상고법원 신설…

법조인들도 어떤 결과 가져올지 예측 불가

 

어느덧 다가온 가을이 지나면 우리의 삶과 운명을 결정짓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진다.

나를 구속되지 않게 막아주거나 떼먹힌 임금을 찾아줄 변호사는 로스쿨 출신으로만 채워진다.

 

나의 운명과 재산을 처분할 최종 심판자는

영어로 정의(Justice)라고 불리는 대법관이 아니라 심판(Judge)으로 불리는 상고법관이 된다.

 

사법시험이 내년 2월 마지막으로 치러지며,

대법원이 아닌 상고법원을 만드는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를 기다린다.

 

무언가 사회가 엄청나게 달라지는 것 같은데,

어떤 일이 벌어질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것은 법조인도 마찬가지다.

 

두 가지 문제 모두에 명확한 입장을 가진 법조인도 드물다.

두 제도를 없애거나 도입해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간단히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추석이 지나면 세상은 달라진다.

지난 9월 1일 시작한 정기국회에서 세상을 바꾸는 법률안은 통과되거나 사라진다.

 

19대 국회의 임기도 끝이어서 법안이 폐안되기도 하거니와,

법안 추진세력이 커다란 상처를 입어 재추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적인 시한은 올해 말이다.

눈앞으로 다가온 사법시험 최종 폐지와 대법원 재판 대상 축소안에 관한 심층 분석이다.

 

 

2012년 1월 국내 첫 시각장애인 사법시험 합격자인 최영씨가 제41기 사법연수생 수료식에서 특별표창을 받은 뒤

김이수 사법연수원장과 악수하고 있다.

우수한 성적을 거둔 최씨는 법관이 됐고, 그를 정성껏 지도한 김 원장은 이후 헌법재판관이 됐다.

이제 이런 풍경이 다시 나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 권호욱 선임기자

 

 

I 사법시험 완전 폐지냐 로스쿨과 병존이냐

 

"자, 지금 나오는 음서제 논란, 우리가 예상했고 그래서 반대하던 그대로잖아요?”

법조계 최고위 관계자이면서 로스쿨 제도를 만드는 데 관여한 인사의 말이다.

 

2006년 가을 로스쿨 도입 얘기가 나올 때 그는 분명히 예고했다.

취재메모를 찾아보니 서초동의 한 식당에서 그리고 이후 사무실에서도 확실히 말했다.

 

“지금 사법시험이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지만 미국식 로스쿨이 도입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집안이나 배경이 좋은 사람이 변호사가 되는 데 유리할 수 있다.”

 

그는 사법시험 출신이고, 자녀가 로스쿨에 다니지도 않는다.

하지만 사법시험을 완전 폐지하자는 데는 주저하지 않는다.

 

“사시와 로스쿨이 병행돼서는 로스쿨이 정착하지 못한다.”

 

그의 말을 조금 더 들어본다.

 

“사법시험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로스쿨을 도입했다. 그런데 로스쿨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이게 사시를 남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문제만 더 복잡해진다.”

 

사법시험의 문제점에 로스쿨의 문제까지 얽혀 난마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시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고, 로스쿨에는 어떤 문제가 있을까.

 

사시는 한마디로 ‘한꺼번에 거부를 거머쥐기’ 즉 일확천금을 주는 제도라고 비판받았다.

그래서 나이 먹도록 사시만 치다가 취업기회를 놓치는 사시낭인이 생기고,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신림동 수험가에서 독학으로 법률가가 되고, 시험성적만으로 모든 게 결판나는 비합리적인 제도라는 것이다.

 

사법시험 병행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반론한다.

 

“지금이 개인이 시험 준비로 나이 먹는 것을 국가가 막을 시대냐.

낭인 숫자로 보면 교수낭인이 훨씬 많고, 심지어 금메달낭인은 칭찬까지 받는다.

요새는 경기가 어려워져 취업낭인이 수두룩하다.

사시 출신이 법을 배운 곳은 신림동이 아니라 사법연수원이다.

오히려 지금 로스쿨들은 신림동 학원과 계약을 맺고 강의를 틀어준다.

그리고 성적 제일주의도 문제이지만 집안과 배경을 보는 것은 잘하는 일인가.”

 

가능하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한다.

로스쿨을 도입하던 2008년에는 일확천금이 이미 불가능했고,

그래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면 사시 합격자를 대폭 늘렸어야 한다는 것이다.

 

로스쿨 도입으로 늘어난 한 해 변호사 합격 정원은 500명에 불과하다.

사법시험 시절에는 1000명이었다.

 

이들은 로스쿨 제도야 말로 허다한 문제가 있다고 본다.

언론에서는 ‘현대판 음서제’라는 말까지 쓴다.

 

사시와는 정반대로 일확천금이 있어야 법조인으로 성공한다는 것이다.

사시와 비교해서 로스쿨 입학 낭인이 없는 것은 면접으로 뽑아 노력해도 안 되기 때문이며,

신림동 사시학원은 더욱 확대돼 로스쿨 입학학원, 성적관리 학원, 변호사시험 학원으로 늘어났으며,

성적은 발표되지도 않아 재력과 권력이 작용한다고 말한다.

 

로스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현직 법조인의 설명이다.

 

“있는 집 애들이 로스쿨에 많이 들어와 있는 게 사실이다.

가령 미국 유명대학에서 공부한 애들이 있는데, 이런 애들이 과거에는 사법시험 안 쳤다.

머리가 아무리 좋아도 사시는 합격률이 3%다. 자칫 수험기간 3~4년만 날릴 수도 있다.

이런 애들이 리스크를 안고 사법시험에 뛰어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로스쿨에 쉽게 입학하고 변호사시험에 합격한다.

3년 만에 미국 대학 졸업에 더해 한국 변호사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부익부다.”

 

로스쿨에 대한 비판은 입학과정보다 졸업 이후에 집중된다.

알려진 대로 판·검사가 되고 로펌에 입사하는 데 시험성적이 아닌 다른 요소가 강하게 개입된다.

 

이 부분이 로스쿨 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우려를 낳는다.

2009년 로스쿨을 개교한 핵심 이유는 ‘교육을 통한 법조인 양성’이다.

 

이에 대해서도

“사법연수원은 교육이 아니냐. 로스쿨은 변호사시험 준비 안 하냐”는 등의

비판이 있지만 일단 무시하자.

 

아무튼 여기서 말하는 교육의 핵심은 현장이다.

로스쿨은 기초만 가르치고 실무로 법조인을 만든다는 게 로스쿨 제도다.

 

그러려면 로펌에 들어가야 한다.

법원은 신규 판사를 안 뽑고 신임 검사는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로펌 입사, 즉 현장교육 기회를 자력으로 마련하기가 어려워졌다.

로펌 사정에 정통한 법조인의 자조 섞인 설명이다.

 

“이름이 알려진 로스쿨에 들어간 애들은 기본적으로 머리는 좋으니까

로펌에서 가르치면 대부분 따라간다.

뒤집어 말하면 로펌에서 누굴 가르쳐도 결과는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로펌으로서는 애들의 배경을 보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다.

아버지가 법원장이고 대기업 임원이면 로펌에 도움이 된다.

그런 애들을 눈앞에 두고도 채용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배임 행위다.”

 

최근 유명 법조인과 정치인의 자녀가 대형 로펌에 취업을 확정하고도

변호사시험에 불합격해 입사가 무산됐다.

 

부모와 당사자의 이름이 법조계에 다 돌았다.

이를 두고 일부 사시 출신 변호사들은 대형 로펌이 실력도 되지 않는 애들을

부모만 보고 뽑았다고 열을 냈지만 순진한 생각이다.

 

한국의 대형 로펌들이 사법연수원을 갓 수료한 변호사들의 비웃음을 살 만큼 만만한 조직이 아니다.

명문대 로스쿨 졸업생이면 대부분 합격하는 게 변호사시험이므로 로펌 입장에서는 합격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는 것이 어쩌면 제대로 사람을 고르는 방법이다.

 

선발 예정자들 가운데 일부가 변호사 시험에 떨어지는 것은 고려할 필요가 없는 요소이다.

경제학 용어로 하면 합리적 무시(rational ignorance)다.

 

옆에서 보기에는 속이 쓰리고 화가 나겠지만 로펌은 국가인권위원회가 아니다.

이익을 최고의 목표로 하는 기업(Firm)이다.

 

그리고 대형 로펌에 들어가지 못한 로스쿨 출신들은 그야말로 막변

(대형 로펌 소속도 아니고 특화된 분야도 없는 사법시험 출신 변호사들이 자조적으로 자신을 가리키는 은어)

조차 되지 못한다. 자신을 가르쳐 줄 곳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중소 로펌 중견 변호사의 설명이다.

 

“법인에 변호사가 한 20명 된다. 로스쿨 출신을 뽑으면 하나하나 가르쳐야 한다.

게다가 다만 얼마라도 월급까지 줘야 한다. 이런 규모에서는 회사 전력에 타격이 된다.

안 뽑는다.”

이들은 ‘교육을 통한 법조인’이 되지 못한 채 변호사 자격만 들고 세월을 보낸다.

 

법원 부장판사들의 설명이다.

 

“법정에서 보면 전에 보지 못하던 황당한 경우가 적지 않다.

사건을 맡아도 손쓰지 못하게 완전히 망쳐놓는다.

그런 사건은 항소심에서 다른 변호사에게 맡겨도 회복이 안 된다.”

 

로스쿨에 입학해 변호사시험에 합격까지 한 사람들마저도 로스쿨 제도의 피해자가 되는 셈이다.

이렇게 로스쿨이 과거의 사법시험 못잖은 수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점에는 이론이 없다.

 

문제는 어떻게 완화하고 해소할 것인가에 있다.

대표적으로 사법시험을 남겨서 해결하자는 주장과 로스쿨 교육을 정상화시키자는 방법이 부딪친다.

 

변호사시험법 부칙에는 ‘사법시험은 2017년 12월 31일에 폐지한다’고 돼 있다.

마지막 1차 시험은 내년 2월에 치러진다.

20대 국회의원 총선 선거운동이 한창일 시점이다. 따라서 논의 가능한 시간은 100일 남짓이다.

 

사법시험 병행론은 최소 200명을 뽑자고 주장한다.

로스쿨 독점론자들은 예정대로 사시를 폐지하자고 한다.

 

중요한 것은 상당수 법조인들이 사시 폐지 즉, 로스쿨 독점을 확정한다고 해도

이대로는 안 된다고 보고 있다는 점이다.

 

사시 병행이 안 되더라도 이미 예상을 뛰어넘는 부작용을 노출한 로스쿨을 개혁할 방안이 필요하다.

올해 사시 폐지가 확정되면 로스쿨을 압박할 수단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본질은 사시 존치 여부가 아니라, 병든 로스쿨을 어떻게 치유할지의다.

 

공정거래법에 정통한 한 법조인의 설명이다.

 

“사법시험이 ‘희망의 사다리’라거나 로스쿨이 ‘현대판 음서제’라는 얘기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 법률 소비자라는 점이다.”

 

그는 사시의 독점을 해체했듯이 로스쿨의 독점도 완화시켜야 올바르다고 했다.

 

“로스쿨을 도입하면서 공급을 늘려 가격을 낮춘다는 목표가 있었다.

하지만 그게 올바른 이론과 예측이었는지 의문이 든다.

시장의 최저가격이 내려갈지는 몰라도 질도 폭락한다.

이 메커니즘을 간단히 설명하면, 현재 변호사 단체가 전관 변호사의 수임을

여러 가지로 제한하려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다.

판사 출신 변호사들만이 높은 수임료를 받는 것을 막는 효과가 있다.

그런 전관 변호사가 사라진다면, 더 이상 그들보다 한 단계 낮은 수임료를 제시하지 않아도 된다.

마찬가지다.

지금 로스쿨에서 사법시험 출신을 차단하려는 이유는 출신이 다른 경쟁자의 출현을 막으려는 측면이 있다.

역사적으로 독점은 시장 실패의 요인이다.

독점을 풀어 다양한 경쟁을 붙여야 재화의 질은 높아지고 가격은 내려간다.”

 

법조인 배출 통로를 사법시험과 로스쿨로 다원화할 것인지,

서울대와 고려대 로스쿨 정도로 다원화할 것인지는 시민의 판단에 달려 있다.

 

 

II 대법관 재판이냐 상고판사 재판이냐

 

2010년 3월 18일

법원행정처장인 박일환 대법관이 느닷없이 기자회견을 자청해 한나라당을 공격했다.

이용훈 대법원장 시절이다. 대법원을 담당하는 기자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본래 대법원은 무슨 말이란 걸 하는 곳이 아니다.

사람을 답답하게 만드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

 

대법원 3층 회견실은 1년 내내 회견을 하는 일이 없다.

그런 대법원이 ‘넘버 2’인 법원행정처장을 내보내 정치권을 공격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카메라 앞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법부의 자율적 인사운영은

사법부가 독립성을 지키고 헌법상 책무를 다하기 위한 최소한의 전제조건이다.

이를 다듬고 고쳐나가는 일은 마땅히 사법제도의 운영을 책임지는 사법부가 주체가 돼야 한다.”

 

전날 한나라당이 사법제도개선특위를 열어 법원제도 개선안을 발표한 데 대한 반박이었다.

골자는 대법관 대폭 증원, 경력법관제 도입, 법관인사위원회 설치였다.

 

대법원이 발끈한 것은 대법관 증원 때문이다.

한나라당도 별로 심각하게 얘기한 게 아니었는지 별 반응이 없었다.

 

대법원에서도 이후 상황을 오판한 것을 알아챘고, 박 처장도 훗날 “괜히 오버했다”고 후회했다.

하지만 때는 늦었다.

대법원이 얻은 것은 한나라당의 미움이었고, 잃은 것은 대법관 증원은 절대불가라는 속내였다.

 

이 해에 대법원에 접수된 사건이 3만6418건이었다.

일상적으로 사건을 처리하는 대법관은 12명이니 1인당 3034건이다.

 

대법원 재판을 개혁해야 한다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박일환 사건’ 5년 전인 2005년 무렵에는 고등법원 상고부라는 대법원 재판 개혁안이 추진됐다.

 

소송가액이 5억원 미만인 민사사건과 징역 3년 미만의 형이 선고된 형사사건 등은

전국 5개 고등법원에 신설되는 상고부에서 최종 판결하는 내용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같은 해 9월 이용훈 대법원장을 임명하면서 일이 급진전됐다.

대통령은 자기가 뽑은 대법원장의 첫 요구를 반드시 들어준다.

 

12월 20일 이해찬 총리 주재로 국무회의를 열어

고등법원 상고부에 필요한 법원조직법 개정안과 민사소송법 개정안 등을 의결했다.

 

하지만 이 방안은 막판에 무산됐는데, 대법원 내부의 반대가 이유라는 게 정설이다.

 

“당시에 대법관 일부가 반대했다. 이유가 뭐 빤하지 않느냐.

대법원 사건이 줄어들면 임기 마친 뒤 변호사로서 자신들의 수입이 줄어들기 때문 아니겠느냐.

다른 이유가 없다.

그리고 그때 막 취임한 이용훈 대법원장이 대법관들의 동의를 받지 않 고 추진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다.”

대법원에 정통한 법조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현재 양승태 대법원장이 심혈을 기울여 추진하는 상고법원도 목표는 같다.

상고법원에서 사건을 처리해 대법원 사건을 줄이겠다는 것이다.

 

2005년처럼 내부의 반대로 실패하는 일이 없도록 대법관들의 암묵적 동의도 받았다는 설이 유력하다.

문제는 양 대법원장은 과거 권력인 이명박 대통령이 임명했다는 점이다.

 

당연히도 현재 권력인 박근혜 대통령이 도와줄 이유가 적다.

노무현-이용훈 관계와는 다르다.

 

하지만 양 대법원장은 법원행정처의 로비력을 동원해 여야 의원 168명의 도장을 받았고,

판사 출신 홍일표 의원을 앞세워 지난해 12월 국회에 올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구도는 같아 대법관을 증원하라는 반대론에 막혀 있다.

크게 달라진 점은 대법원이 전에 없이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8월에는 방한한 긴즈버그 미국 연방대법관에게 상고법원이 필요하다는 유도신문을 시도하고,

9월에는 고등학생 대상 퀴즈프로그램인 KBS <도전! 골든벨>을 대법원에 유치해 상고법원이 정답인 문제를 냈다.

 

지하철을 비롯해 사람들이 다니는 곳에 상고법원 광고를 부착하고,

일부 판사들이 반발하자 법원별로 상고법원의 장점을 설명하고 있다.

 

법원행정처 출신 법조계 최고위 관계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대법원이 추진력이 강하다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할 줄은 정말 몰랐다.”

 

 

1991년 6월 김기설씨 유서 대필자로 지목받은 강기훈씨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하지만 강신욱 부장검사의 지휘로 기소돼 대법원에서 징역3년을 확정 받았다.

그리고 2014년 2월 13일 열린 재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강 부장검사는 이후 대법관이 됐다.

오판의 방지가 대법원의 핵심적인 기능이라는 지적도 적지 않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대법원이 데드라인인 이번 가을에 상고법원 도입을 이뤄낼지를 두고는 예상이 엇갈린다.

현실적으로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도 반대하는 의원이 적잖아 쉽지 않다는 분위기가 우세하다.

 

하지만 12월 무렵에 전격적으로 통과되리라는 관측도 여전히 나온다.

 

“반드시 된다고 장담을 하더라. 또 법원의 로비력을 생각하면 그 말이 허풍은 아닐 거다.”

법조계 최고위 관계자의 전언이다.

 

법원행정처 간부들은 최근에도 국회의원들을 만나 상고법원 법안을 거듭 설명하고 있다.

만약 상고법원이 통과되지 않을 경우, 양승태 대법원장이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된다.

 

“임기가 2017년 9월까지 2년 가까이 남지만 아무것도 하기 힘들 것이다. 힘이 확 빠지는 것이다.”

 

이용훈 전 대법원장의 경우 구속 자제 등 형사재판 혁신이 주요 사업이었다.

고등법원 상고부 실패로 입은 상처가 크지 않다.

 

하지만 양 대법원장은 임기의 유일한 업적으로 여겨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게다가 양 대법원장은 퇴로를 단단히 막았다.

 

대법관을 크게 늘리는 방법을 거부한 것은 물론

대법원에 법원장급 배석판사를 두는 방안도 불가능하다고 거듭해서 밝혔다.

 

현재 우리나라 대법원의 상황은 일본에서 최고재판소를 개혁하려던 상황과 유사하다.

 

1952년 최고재판소에 접수된 새로운 사건이 1만620건이었는데, 최고재판소 재판관은 15명이었다.

사건 처리가 늦어지자 영업에 지장이 생긴 일본변호사연합회에서 1953년 먼저 개혁안을 냈다.

 

일변련은 당시

“대법정(한국의 전원합의체)은 재판관 9명으로 구성해 주로 헌법재판을 하며,

소법정(한국의 소부)는 대법정 재판관과 일반판사 2명을 합쳐 3명이 민·형사 사건을 하자”고 했다.

 

일명 이원화 방안이며,

현재 한국에서 상고법원의 대신 주장되는 대법원의 법원장급 배석판사 제도와 같다.

 

하지만 최고재판소는 반대했다.

최고재판소에 판사가 너무 많아지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최고재판소는 1954년 자신들의 개혁안을 제시했다.

 

“최고재판소 재판관은 9명이나 11명으로 감원해 헌법재판을 담당하며,

민·형사사건은 하급심으로서의 별도 법원을 설치한다.”

 

현재 대법원이 추진하는 상고법원과 사실상 같은 내용이다.

하지만 일본은 우리와 달리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은 자신들의 사법제도를 일본에 이식했는데,

미국의 경우 주대법원이 있어 민·형사를 모두 해결하고 연방대법원은 헌법사건을 하는 점이

결정적으로 달랐다.

 

주대법원이 없는 일본은 최고재판소에서 수많은 사건을 처리해야 했고,

이것이 미국과 달리 헌법재판이 취약해진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튼 일본의 최고재판소 개혁 논란은 법조계의 대립으로 아무것도 손대지 못한 채 무산됐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헌법재판에 대한 욕망이 있었지만 민·형사부터 제대로 하라는 요구를 수용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헌법재판소가 있는 우리나라 대법원이 대법관 증원을 거부하는 이유가 명쾌하지 않다.

 

대법원 측은 “사건을 줄여 정책법원의 역할을 하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책법원이 무슨 말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개별적인 사건을 처리하기보다 법률을 해석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겠다는 뜻이다.

 

당연히 우리는 헌법재판소가 있는데, 대법원이 그런 역할을 왜 하느냐는 반론이 나온다.

오히려 민·형사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대법관을 늘리라는 요구가 이어진다.

 

이와 관련해 일부 언론은

한국의 대법관을 더 늘리기 힘들다면서

최고재판관이 15명인 일본과 연방대법관이 9명인 미국과 비교하기도 하지만 이는 부당하다.

두 나라는 헌법재판소가 없다.

 

오히려 헌법재판소가 있는 나라의 대법관 숫자와 비교할 필요가 있다.

 

대표적으로 독일은 일반대법관만 128명이며, 전문대법원의 대법관 숫자도 비슷하다.

오스트리아는 인구 822만명에 대법관이 58명이고, 헌법재판관은 14명이다.

헝가리는 인구 991만명에 대법관 75명·헌법재판관 11명이며,

체코는 인구 1062만명에 대법관 64명·헌법재판관 15명이다.

세계적인 기준으로 보면 한국이 대법관을 대폭 증원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대법관 출신의 법조계 관계자는 대법원의 속내를 이렇게 설명한다.

 

“대법원이 지금 사건을 줄여서 심리를 잘 하겠다는 이유로 상고법원을 추진하는 것이 아니다.

사건을 줄일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하급심에서 재판 없이 벌금을 받았던 사건을 대법원 사건에서 제외하면 형사의 28~29%가 줄어든다.

민사도 신청·집행 같은 자잘한 사건의 상고를 못하게 하면 30% 가까이 줄어든다.

소송법을 바꿔야 하지만 국민들이 납득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12명인 대법관 숫자도 16명까지 늘려도 된다.

지금 대법원 건물이 16명을 기준으로 지어진 것이고, 또 1969년부터 1981년까지 대법관이 16명이었다.

대법원은 최고법원으로서 입지를 갖춰 헌법재판소를 통합하겠다는 의도가 숨기고 있다.

과거 대법원이 헌법재판을 맡던 시절에도 제대로 한 적이 없다.

지금은 달라졌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시민 입장에서는 두 기관이 경쟁하는 게 훨씬 좋다.”

 

전직 일본 최고재판관인 이즈미 도쿠지 변호사는 최근 저서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재판에서 사실인정은 오류의 위험에 노출돼 있고, 그 결과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은

오늘날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최고재판소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오판을 막는 최후의 보루가 되는 것이다.”

 

이번 가을 국회에서 상고법원에 대한 가부가 아니라 대법원 개혁안을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

 

 

<이범준 기자 seirot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