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징용자 유골 첫 확인] 축구장 200개 넓이 공동묘지속 ‘악전고투’
국민일보 | 입력 2009.11.15 18:46
막막했다.
축구장 200개 면적의 거대한 공동묘지 다섯 곳.
수많은 러시아인 무덤 가운데 어쩌다 하나씩 여기저기 불규칙하게 흩어져 있는
한인 강제징용자들의 무덤을 찾는 일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는 행위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다른 도리가 없었다.
러시아 정부와 사할린 주 당국의 비협조로 한인 사망자 명부는 확보할 수 없었고,
남은 것은 공동묘지 일대를 발로 뛰어다니며 무덤을 하나하나 눈으로 찾는 방법뿐이었다.
지난해 7월 15일 남사할린 최대 탄광지 브이코프 지역의 산비탈에 자리잡은 공동묘지.
국무총리 소속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김용봉)의 오일환 유해팀장,
방일권 사할린 지역 담당팀장(현 외국어대 연구교수) 등 조사단 3명은 일제강점기 때
이곳으로 끌려와 노무자로 일하다 한 맺힌 생을 마감한 한인들의 유골 소재를 찾아 헤맸다.
일제는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법을 선포한 이래
모집, 징용 등의 조직적이고 폭력적인 수법으로 해방 전까지 최대 15만여명의 조선인을
사할린으로 내몰았다. 남사할린에는 일제가 혈안이 돼 개발하던 탄광이 56개소나 있었고,
조선인들은 주로 탄광의 석탄 채굴에 투입됐다.
이들 탄광 인근에 조성된 드넓은 공동묘지를 모두 탐색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한 탓에
조사단은 일부 구역만 표본조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지난한 일이었다.
땅이 경사진 데다 밀림을 연상시킬 정도로 온통 수풀로 뒤덮여 있어 낫으로 일일이 쳐내 가며
힘겹게 한 발 한 발 전진해야 했다.
모기까지 한꺼번에 수백 마리씩 새까맣게 몰려들었다.
오 팀장은 "한여름에 모자를 눌러쓰고 잠바까지 껴입은 채 수시로 모기약을 뿌려대며
거의 눈만 내놓고 조사 작업을 벌였다"고 전했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지고 잡초 속에 파묻혀 있기 일쑤인 한인 무덤을 그나마 찾아낼 수 있는 단서는
봉분이었다.
평평한 러시아인 무덤과 달리 한인 무덤은 전통 방식대로 불룩하게 흙을 덮었고
그 앞에 비석을 세웠다.
표기돼 묘주(墓主)가 누구인지 판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난관 속에서도 조사단은 비석에 적힌 이름과 생년월일, 본적 등을 하나하나 꼼꼼히 기록하고
촬영했다.
이런 방식으로 7박8일 일정 동안 브이코프, 유즈노사할린스크, 코르사코프 3개 지역의 공동묘지
다섯 곳을 표본조사했다.
사망자 명부가 있었다면 일이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조사단은 사할린 주정부 출생·사망등록소(ZAGS)를 방문해 한인들의 사망신고서가 보관돼 있음을
확인했다.
신고서에는 창씨명, 출신 민족(조선인), 소속(작업장·노무자 신분 등), 사망 원인(병명 등), 사망일이
기록돼 있었다.
그러나 사할린 주정부 측은 극소수 기록의 열람만 허용했을 뿐 전체 자료에 대한 조회, 메모, 복사는
완강히 거부했다.
개인 정보를 외부인에게 공개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러시아 당국 역시 마찬가지 입장을 취했다.
조사단은 여러 악조건 속에서 254기의 한인 무덤과 신원을 확인하는 성과를 올리고 귀국했다.
이때가 1∼3차 조사 중 가장 핵심이 되는 2차 조사였다.
2007년 7월 1차 조사와 올해 5월 3차 조사의 성과를 합하면 유골 소재를 확인한 사망자는 총 580명.
위원회는 이어 본적지 조회 작업 등을 끈질기게 벌여 580명 중 125명의 유족을 찾아내 유골 소재지
발견 사실을 통보해줬다.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은 멀기만 하다.
1945년 해방 당시 사할린 잔류 한인의 수는 2만5000∼4만3000여명으로 알려져 있다.
끝내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절대 다수의 한인이 정부도, 유족들도 알지 못하는
그 어느 하늘 아래 쓸쓸히 잠들어 있다.
상당한 기간과 예산이 소요되겠지만, 결국 이들의 유골 봉환은 전적으로 국가가 담당할 수밖에 없다.
방일권 교수는 "예전에 흥성했던 탄광들이 폐광되면서 인근 묘지들도 빠른 속도로 훼손되고 있다"며
"한인들이 어디에 얼마나 묻혀 있는지 공식 기록으로는 확인할 길이 없는 만큼 우선 현지 묘지에 대한
전수조사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특별기획팀
김호경 권기석 우성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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