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관

고려와 거란의 전쟁...

기산(箕山) 2009. 9. 26. 20:07

 

고려와 거란의 전쟁...                                            Constant(jpu***) 님의 답변

 

저는 전쟁 자체보다는 송, 요, 고려 이 3나라의 대립이라는 시각에서 기술하겠습니다.

대부분 백과사전이나 개인적으로 읽은 역사서를 바탕으로 기술하였으나

다소 상세한 기술에 있어서는 현재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표현도 있을 수 있으니

이점 양해 바랍니다.

 

(1) 947년까지의 역사....

고려의 태조께서 (후)백제의 남은 세력을 말끔히 소탕하고 (후)삼국을 통일한 936년,

중국의 화북지방에선 이후 약 200년간 동아시아 지역 역학관계의 핵심키워드가 될

"연운십육주"의 거란으로의 할양이라는 일대사건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중국은 당이 멸망한 이후 오대십국시대(907년-960년)라는 극심한 혼란기를 겪고 있었는데

그 오대(화북지방을 다스리던 5개 왕조)중 하나인 (후)당의 석경당은 자신이 왕이 될 욕심으로

거란의 태종에게 군사원조를 받는대신 그 대가로 연운십육주를 넘겨줍니다.

연운십육주는 오늘날 북경 일대의 지역으로 이후 거란이 중국을 침략하는 거점으로서 

거란의 멸망때까지 중국인을 두고두고 괴롭힙니다.

 

거란은 926년 발해를 멸망시키고 그 토대위에서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 있던 중 중국의 내분으로

어부지리로 연운십육주라는 금싸라기땅을 거저 얻게 되어 일약 동북아시아의 패자가 됩니다.

그 자신감으로 나라 이름을 거란에서 "요"로 바꾸고 황제국이 되지요.

요의 태종은 926년부터 947년까지 제위에 있으면서 발해 점령 직후 갑자기 늘어난 영토와

멸망한 발해의 유민들에 대한 조치 등 온갖 국가적 사무를 슬기롭게 처리하고

거기다 중국의 분열을 이용 연운십육주를 얻고 이를 발판삼아 마침내 (후)진을 멸망시키고

직접 화북지역을 통치하는 등 파죽지세로 나라를 강대하게 만들지만 그의 죽음과 동시에

유목민 특유의 후계자 다툼과 끝없는 정쟁으로 요나라는 극심한 혼란기를 겪습니다.

 

요나라가 파죽지세로 국운이 융성하던 그 시기..

우리는 후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의 통일(936년)과 태조,

혜종(943년-945년), 정종(945년-949년)으로 이어지는 고려 왕조 초기시대로서

아직 국가의 기틀이 완전히 자리잡지 못하고 호족들의 위세에 황제가 무력하게 끌려다니던

때였습니다.

호족들의 군사력은 황제의 군사력을 압도하고 있었고 끊임없는 호족간 다툼과 정쟁,

그리고 반란으로 나라가 매우 혼란스러운 때였습니다.

이때 요나라의 침략을 받았다면 정말 위험했을 것입니다만

다행히도 당시 요나라의 태종의 주 관심사는 연운십육주와 화북지역에 있었기에

주로 중국이 요나라를 상대하면서 우리는 침략을 면할 수 있었지요.. 

 

여담이지만 942년 요나라 태종이 고려와 국교를 맺고자 사신을 보낸 일이 있습니다.

그때 고려 태조께서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는 오직 전쟁 뿐이라며

사신을 유배보내고 선물로 가져온 낙타 50마리를 전부 만부교에 매달아 굶겨죽여 버렸습니다.

당시 동북아시아의 역학관계가 다소 고려에게 유리했기에 망정이지

(942년 (후)진의 석경당이 죽고 조카인 석중귀가 왕이 되면서 거란에 대해 강경하게 나왔거든요..

연운십육주 회복을 부르짖고 군사력을 증강하면서 무력시위까지 했죠..)

자칫했다간 이때 벌써 거란과 한판 붙을뻔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정안국이라는 발해 유민이 세운 제2의 발해가 발해 멸망 후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건국 연대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고려와 거란 사이에 버티고 있었고

아울러 옛 발해 땅에서 발해 유민들의 부흥운동이 활발했던 것도

거란이 배후를 염려하지 않고 맘놓고 고려로 쳐들어오지 못했던 원인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2) 947년-982년의 역사....

이 기간동안 중국에서는 오대십국시대가 막을 내리고

조광윤(태조)이 세운 송나라가 태조(960년-976년)와 태종(976년-997년)의 치세하에

급격히 국력을 키웁니다.

같은 시기 요나라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극심한 정쟁과 내란으로 정신을 못차리고 있었고

고려는 정종(945년-949년), 광종(949년-975년), 경종(975년-981년)의 치세하에서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황제의 권위하에 호족세력을 굴복시키고

가상의 적국 요나라에 대비하여 착실히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었습니다.

 

송의 태조와 태종은 여러 지방의 소국을 차례로 굴복시켜

당 멸망후 분열되었던 중국을 통일하고 여세를 몰아 연운십육주 회복을 위해 

끊임없이 요를 공격하지만 아무리 극심한 내란을 겪고 있는 요나라였다지만

연운십육주를 얻는데는 끝내 실패하고 맙니다.

 

982년 요의 황궁에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어머니(소태후)의 후광을 업고

한 아이가 황제에 등극합니다.

바로 요의 "성종(982-1031)"입니다.

그의 등극은 요의 황위쟁탈전의 끝을 알림과 동시에 요의 남진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그들에겐 이제 연운십육주 너머의 송나라 뿐만아니라

송나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고려 또한 주목해야할 나라가 되어 있었습니다.

고려의 황제는 바로 1년전인 981년에 경종의 뒤를 이어 등극한

"성종(981년-997년)"이었습니다.

 

(3) 982년-1004년의 역사....

소태후의 주 관심사는 바로 송나라였습니다.

불과 몇십년 전만 해도 각자 찢어져서 물고 뜯던 별볼일 없던 것들이

하루아침에 강대한 나라가 되서 이제 요나라 국력의 핵심이 되버린

연운십육주를 걸핏하면 공격하니 그동안 황위쟁탈전으로 잠시 소홀하였으나

이젠 단단히 버르장머리를 고칠 때가 왔다고 생각하였던 거죠..

 

헌데..

송나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고려가 문제였습니다.

고려의 성종이 983년 송나라와 국교를 맺으면서 스스로 황제의 지위를 내려놓고

송의 황제(태종)에게 머리를 숙여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쯤되자 요나라로서는 고려를 견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물론..

성종이 송나라와 국교를 맺지 않았아도 언젠가는 반드시 고려로 쳐들어 올 요나라였지만

그 시기를 다소 앞당길 필요가 생긴 것입니다.

즉..

송을 치기 전에 먼저 고려를 굴복시킨다로 전략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우선 고려와 요나라 사이에 버티고 있던 정안국을 986년 멸망시켜 고려로 가는 길을 확보한 다음 

마침내 993년 요의 성종은 소손녕에게 무려 80만의 군사를 주어 고려를 침공하게 합니다.

 

결과는 다른 분이 설명하셨듯이 안융진에서의 빛나는 승리와 서희 장군의 담판

(모든것은 다 여진인들 때문이다. 걔들만 아니면 우리가 너희와 교류하면서 통교할 수 있는데

걔들이 중간에서 산적질에 해적질을 일삼으니 어디 무서워서 니들한테 가겠냐?

고로 우리가 이참에 여진인들 소탕하고 그 땅에 군사를 주둔시켜 교역로를 확보하려 하니

괜히 시비걸지 말고 그냥 지켜봐라.. 교역로만 확보되면 너희와 교류하마)

으로 오히려 여진인을 몰아내고 그들의 땅이었던 강동6주를 얻게 됩니다.

 

강동6주에 요새를 짓고 고려가 최정예군을 주둔시키는 동안 요나라는 그저 바라보기만 합니다.

그러면서 저것들이 언제 입조하나 오매불망 기다리죠. ^^

물론.. 고려가 요나라에 머리를 숙이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쨌건 요나라는 일단 고려를 무력으로 굴복시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고려에게 자신들의 무력을 맛보게 했다는 것에 만족하며 

적어도 고려가 적극적으로 송을 도와 자신들이 송을 공격하는 동안 배후를

공격하지는 못할 거라 판단하게 됩니다.

80만의 대군이 언제든지 맘만 먹으면 압록강을 넘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고려군의 발목을 잡는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거죠..

 

드디어 1004년 요나라의 소태후는 송나라로 창끝을 겨눕니다.

연운십육주로부터 쏟아져 나온 요나라 군대가 물밀듯이 송나라 수도 개봉

(오늘날 허난성 카이펑)을 향해 쳐들어 갑니다.

 

당시 송나라는 3대 진종(997년-1022년)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전쟁보다는 평화를 갈구하는 외교성향을 지닌 탓에 요나라와의 전면전보다는

협상을 통해 난국을 해결하려 합니다. 

승상 구준의 독려와 송나라군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전연지맹(1004년)이라는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맙니다.

 

전연지맹이라는 송과 요 사이의 강화조약은

이후 1018년 고려의 귀주에서 소배압이 이끄는 10만의 요나라 최정예군대가 

강감찬 장군이 이끄는 20만 고려군에 전멸당할 때까지 동아시아 역학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1004년의 요나라의 남진은 전연지맹으로 끝을 맺지만

송나라에게는 후대 역사학자들이 돈을 주고 평화를 샀다라는 비아냥을 두고두고 듣게 만들었고

요나라는 송나라의 국력이 생각보다 강력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했습니다.

 

아울러 배후의 고려에 대한 확실한 정리만이 송나라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점하는

유일한 길이며 이를 바탕으로 다시 송나라를 압박한다는 새로운 전략을 세우게 만듭니다.

이제 송나라는 없습니다.

오직 고려와 요의 일대일 전면전 뿐입니다.

 

(4) 1004년-1019년의 역사....

요나라와 송나라가 대륙에서 충돌하던 그 때

고려의 황제는 바로 목종(997년 -1009년)이었습니다.

1004년 비록 전연지맹이라는 괄목한 만한 성과를 얻기는 했으나

본래 의도는 군사적으로 완전히 송을 제압하려는 것이었던 만큼

소태후와 요의 성종은 적잖이 충격을 먹습니다.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고 군을 재정비하는 등..

 

전연지맹 이후의 동아시아에서 이전처럼 주도권을 쥐고

요나라의 번영을 지속시키기 위해 절치부심하던 그들에게

강동6주를 얻고 지속적으로 무력증강을 이루는 고려는 이젠 단순히 겁을 주고 끝낼

상대가 아닌 확실히 정리해두지 않으면 안되는 매우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송과 고려가 합심하여 요나라를 공격하면

그건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차 여요전쟁을 통해 송과 고려의 국교를 단절시키는 성과를 이뤄냈고

전연지맹으로 이젠 반대로 고려로의 원정시 배후인 송의 위협이 제거된 이상

요나라의 미래를 위해 적절한 시기에 고려에 대한 침공은 필연이 되버렸습니다.

 

소태후가 죽고 성종의 친정이 시작되자 성종은 고려에 대한 침공 시기만을 엿보게 됩니다.

바로 그 때... 그토록 기다리던 기회가 찾아오죠..

바로 강조의 정변(1009년)입니다.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마침내 요의 성종은 친히 4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넙니다.

 

2차 여요전쟁은 비록 강조를 비롯한 사령부가 괴멸당하고

개경이 함락당하는 피해를 입기는 하지만 요나라의 보급로를 끊어

요나라군의 전쟁지속능력을 상실케하는 전략을 택한 고려의 승리로 끝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고려와 요나라 모두 극심한 피해를 입는데 그야말로 대 혈전이었습니다.

 

이 2차 전쟁으로 성종은 반도라는 고려의 특성으로 인해 보급로가 길어지고

아울러 고려군의 청야전술 및 유격전술이 보급로의 안전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는 것을

몸소 뼈저리게 체험합니다.

그래서 다음 침공때는 보급문제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려 머리를 짜내죠...

 

그 결과 나온게 바로 속전속결...

그리고 개인 보급품은 최소화하여 개인이 직접 지고 이동한다..

말그대로 보급부대를 없앤 고려 침공을 위한 맞춤형 군대를 만들어 냅니다.

이를 위해서는 병사 하나하나가 신속한 전투수행능력

즉, 지휘관의 몸짓 하나에도 어떤 명령이며 어떤 전술을 펼치는지 바로 이해할 줄 알아야 하며 

더불어 적은 식사에도 전투력을 유지하고 자지않고도 피곤해 쓰러지지 않으며

하루에 엄청난 거리를 주파할 수 있는 말 그대로 무쇠같은 체력의 진정한 전투머신들이

되어야 했습니다..

 

3차 여요대전의 10만의 요나라군대는 바로 이런 전투머신들이었습니다.

2차 전쟁에서처럼 고려의 현종이 혹 멀리 도망가버리면 땅끝까지라도 쫓아가서

반드시 생포하겠다는 각오로 무장한 10만의 고려 침공용 맞춤형 최정예 요나라군이

1018년 소배압의 지휘하에 압록강을 넘습니다.

 

그러나 이런 속전속결의 요나라군의 전략을 비웃기라도 하듯..

고려의 현종은 철옹성의 개경 요새에서 한발자국도 물러나지 않고 요나라군을 맞이하죠..

 

힘들게 압록강에서부터 개경까지 쉬지 않고 고려군의 끊없는 기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개경하나만을 향해 미친듯이 달려온 요나라군은 개경의 예상밖의 군세에

그저 말문이 막힐 뿐이었습니다. 하늘이 노래졌겠죠..

 

요나라군은 물론 만반의 준비를 했지만 당초 고려군이 소수의 병력으로

야전에서 기습하고 요나라군을 요새로 유인하여 요새를 이용한 농성전으로

시간을 지연하는 전략을 사용할 거라 생각했기에 야전에서의 기습은 되도록 무시하고

오로지 개경으로 돌진하는 속전속결의 전략을 세웠지만

강감찬장군은 역으로 오히려 농성전이 아닌 야전에서의 대규모 기습전으로

요나라군을 엄청나게 괴롭혔기 때문에 개경에 도착한 요나라군은 이미 체력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상당히 피곤하고 전투수행능력이 현격히 감소한 상태였습니다.

 

아무리 전쟁머신인 요나라 최정예군이라지만 체력의 부담은

이미 당초 그들이 예상했던 임계치를 초과한 상태였죠..

그런 그들에게 개경 요새는 말그대로 난공불락의 요새였을 겁니다.

 

앞에는 철옹성안에 수만의 고려군이 버티고 있고

뒤에는 강감찬이 지휘하는 20만의 고려군이 몰려오고 있고..

 

소배압은 이래서는 싸움이 안되겠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습니다.

말머리를 돌리면서 소배압의 머리 속에는 오직 하나 이 군대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압록강을 무사히 건너는것 이것밖에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요나라군은 말그대로 왔던 그대로 신속하게 이젠 반대로

개경에서 압록강까지 엄청난 속도로 돌진해 나갑니다.

그.. 러.. 나.. 1019년 2월의 어느날..

 

귀주의 어느 구릉지역에서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과 전속력으로 압록강으로 돌진해가던

소배압이 이끄는 요나라군이 정면으로 만납니다.

 

우리 민족 역사에 몇 장면 안되는 성을 이용한 농성전이 아닌 야전에서

양측 도합 20여만명이 대회전을 펼쳐 자웅을 겨루는 대 혈전이 귀주벌에서 펼쳐집니다.

 

특히 이날 대회전의 백미는 김종현 장군이 이끄는 고려군 최강의 부대..

중장갑 기마대.. 바로 철기군 1만이 펼치는 적 진영을 가르며 적 종심을 날려버리는

대 돌격쑈였고 이후의 전황은 말그대로 일방적 학살 그 자체엿습니다.

요나라군은 겨우 수천여명만이 간신히 압록강을 건넜을뿐 나머지는 모두 전멸당했습니다.

 

이 귀주대첩은 전연지맹이후 다소 불안했던 고려의 동아시아에서의 입지를

요, 송과 나란히 어깨를 겨루는 강국으로 만들어 주었고

이 3나라는 그 어떤 나라도 이후 힘의 우위를 점하지 못한채 말그대로 힘의 균형을 이루며

만주에서 아구타가 거병하여 요나라를 날려버릴때까지 100여년의 평화시대를

만끽하게 됩니다.

 

동아시아 3국의 힘의 균형을 일궈낸 귀주대첩.... 정말 자랑스런 우리의 역사입니다.

 

즉위하자마자 요나라의 침략을 당하고 이후 요나라의 끊임없는 위협과 침략을

모두 격퇴시키며 고려를 지킨 현종을 시작으로 고려는 이후 덕종, 정종을 거쳐

전란의 피해를 복구하고 왕조의 번영의 기초를 다진 후 문종에서 숙종까지 

고려 왕조 최고의 극성기를 활짝 펼치며 번영하다

예종때 윤관장군의 여진정벌을 끝으로 찬란한 고려왕조의 영광은 그렇게 사라집니다.

 

이후 무신정변과 몽골의 침입으로 쇠퇴하다 조선왕조가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