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관

盧 전 대통령 유서 남긴 듯(종합)

기산(箕山) 2009. 5. 23. 13:33
盧 전 대통령 유서 남긴 듯(종합)

                                                                          연합뉴스 | 입력 2009.05.23 11:03 | 수정 2009.05.23 11:08

                                                                          (서울=연합뉴스) 류지복 기자

 

23일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유서를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노 전 대통령의 한 측근은 이날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노 전 대통령이 유서를 남겼다"며

"정확한 상황이 파악되고 내용이 정리되는 대로 우리측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힐 것"이라고 말했다.

이 측근은 "유서가 발견된 것으로 봐서 노 전 대통령이 등산 도중 실족한 것이 아니라

자살한 것으로 판단된다"며 "산에는 경호원 1명이 노 전 대통령을 수행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이 측근은 또 "노 전 대통령이 검찰 수사를 받으면서 무척 지쳤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덧붙였다.

jbryoo@yna.co.kr
(끝)

 

 

 

 

 

 

노무현 전 대통령 출생에서 사망까지
                                                                                 헤럴드경제 | 입력 2009.05.23 10:33


23일 오전 사망한 노무현(盧武鉉?63) 전 대통령은 1946년 8월6일 경남 김해에서

아버지 노판석씨씨와 어머니 이순례씨 사이에서 3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노 전 대통령의 형제자매로는 큰형 영현씨(英鉉)와 둘째형 건평씨(建平?구속), 누나 명자(明子)씨,

여동생 영옥씨(英玉)가 있다.

그의 두 형은 1967?1968년 각각 5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세무공무원이 됐다.

 

김해 진영읍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산골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그는

진영대창초등학교(1959년)와 진영중학교(1963년), 부산상업고등학교(1966년)를 졸업했다.

 

서민 가정에서 성장한 노 전 대통령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1968년 3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해

당시 강원도 원주에 있는 육군 1군사령부에서 부관부 행정병으로 복무했다.

노 전 대통령은 군 제대 후 고향에서 부인 권양숙씨와 1973년 1월 결혼해

아들 건호씨와 딸 정연씨를 낳았다.

 

고졸 출신에게 사법고시 응시 자격을 주는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에 합격한 그는

두 차례 낙방 끝에 1975년 제17회 사법시험에 유일한 고졸 출신으로 합격했다.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후 노 전 대통령은 1977년 대전지방법원에서 판사로 부임했지만

7개월만에 그만 두고 1978년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1981년 제5공화국 정권이 사회과학 서적을 읽은 혐의로 대학생 20여명을 기소해

민주화 세력에 대한 용공조작 사건으로 알려진 '부림사건(釜林事件)' 변론은 노 전 대통령이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됐다.

이후 학생, 노동자 등이 연루된 각종 인권사건에 뛰어들어 점차 인권변호사로 인식됐다.

특히 1987년 대우조선 노동자가 시위 도중 사망한 사건에 연루됐다가 제3자개입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13대 총선 당시 부산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초선의원 시절인 1989년 국회 5공청문회에서는 '전두환 살인마'를 외치며

전두환 전 대통령을 향해 의원 명패를 집어 던져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이후 부산에서 14대 총선(1992년), 부산광역시장 선거(1995년), 15대 총선(1996년)에

출마했지만 모두 낙선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당선 확률이 희박했지만 지역주의 타파를 내세워 연이어 출마해

주변 사람들로부터 '바보 노무현'으로 불렸다.

 

김대중 정권 출범 이후 노 전 대통령은 2000~2001년 해양수산부 장관을 역임했다.

민주화 세력을 기반으로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당시 투표 하루 전날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의 일방적인 지지철회로 후보 단일화는 깨졌지만

당시 '노사모' 등 팬클럽의 지지를 얻어 화제가 됐다.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도 순탄치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은 2003년 2월 판사출신 강금실 변호사를 법무부 장관에 임명한 뒤 검찰의 불만을 받자

검사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평검사와의 대화를 마련했지만 오히려 불신이 깊어졌다.

 

이어 노 전 대통령은 선거법 중립 의무 위반, 국정?경제 파탄, 측근 비리 등의 이유로

16대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2004년 3월12일부터 헌법재판소가 탄핵안을

기각한 5월14일까지 63일동안 대통령 직무가 정지됐다.

 

재임기간 중에는 안희정씨와 최도술씨 등 386세대로 불려진 측근들이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검찰에 구속수감됐다.

청와대에서 집사로 불렸던 정상문 전 총무비서관 역시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받은

3억원과 노 전 대통령 특수활동비 12억5000만원을 빼돌린 혐의로 구속수감됐다.

 

노 전 대통령의 가족들도 비리연루 의혹에 휘말려 검찰에 소환됐다.

2008년 12월 형 노건평씨가 세종캐피탈 대표 홍기옥씨(59?구속)로부터 농협중앙회가 세종증권을

인수하도록 정대근 당시 농협 회장에게 청탁해 달라는 명목으로 29억6300만원을 받아 구속수감됐다.

 

노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와 아들 건호씨도 참고인 신분으로 검찰 조사를 받아

대통령 가족이 검찰에 소환되는 불명예를 남겼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 중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600만 달러의 '포괄적 뇌물수수'

혐의를 받아 피의자 신분으로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에 이어 역대 대통령으로는

세 번째로 검찰에 출석했다.

 

이후 조만간 검찰의 재소환을 앞두고 23일 오전 6시50분께 경남 김해 봉하마을 자택 뒷산

언덕에서 투신, 뇌출혈상태에서 병원에 이송돼 심폐소생술을 받았지만 끝내 사망했다.

 

김영상 기자 (ysk@heraldm.com)

 

 

 

노 전 대통령 유서작성부터 서거까지  

유서 1차례 수정…'마지막 글'쓰면서 고심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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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은 당초 알려진 것과 달리 유서작성을 마치자마자 사저를 나선 뒤

봉화산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 노 전 대통령은 유서를 1차 작성해 저장했다가 다시 수정하는 등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기는 글 '을 놓고 고심을 했던 흔적도 경찰 수사에서 나왔다.

24일 경남경찰청이 밝힌 수사 브리핑 자료를 토대로 노 전 대통령이 서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재구성했다.

경찰이 발표한 당일 시간대별 상황에 따르면 노 전대통령은

23일 오전 5시21분께 사저내 1층 거실에 있는 컴퓨터에 문서파일 형태로 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5시26분께 유서를 1차 저장했다가 다시 파일을 열어 수정한 뒤 5시44분에 총 14줄 분량의 유서를

마무리해 최종 저장했다.

유서작성을 마친 노 전 대통령은 5시45분께 경호동에 "산책 나갈게요"라며 인터폰으로 연락했다.
5분 뒤 이모 경호관과 함께 사저를 출발해 봉화산 등반에 나섰다.

노 전 대통령이 6시 20분께 경호관과 함께 봉화산 7부 능선에 있는 부엉이 바위에 서 있는 모습을

사저경비 초소의 전경이 발견해 경호동에 무전으로 알렸다.

노 전 대통령은 부엉이 바위에 20분 가량 머물면서 경호관과 일상적인 대화도 조금 나눴다.

노 전대통령은 경호관에게 "담배가 있느냐"고 물었고 경호관이 "없습니다. 가져올까요"라고 답하자 "됐다. 가지러 갈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또 "여기가 부엉이 바위인데 실제 부엉이가 살아서 부엉이 바위인가"라고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마침 등산로쪽으로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누구지"라며 노 전대통령이 물었다.

경호관은 혹 노 전대통령에게 위해를 가할까 우려해 그 사람의 접근을 제지하기 위해

등산로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그 사이 노 전대통령이 부엉이 바위 45m 아래로 뛰어내렸다.

오전 6시45분에 일어난 일이다.

경호관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로 노 전대통령이 뛰어내리는 뒷모습만 봤다고 진술했다고

경찰은 전했다.

경호관은 무전으로 사저와 경호동 측에 긴급히 연락한 뒤 바위 아래로 내려가

머리부분 등에 심한 상처를 입은 노 전 대통령을 업고 황급히 내려왔다.

이 과정에서 피묻은 노 전 대통령의 상의가 벗겨져 바위 부근에 떨어졌다.

추락하는 도중에 노 전 대통령의 목이 짧은 등산화 한짝도 벗겨져

나중에 경찰의 현장감식 과정에서 상의와 함께 발견됐다.

노 전 대통령은 오전 7시께 경호 차량에 태워져 마을과 가까운 김해 세영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이미 의식불명 상태였다.

심폐소생술에도 차도가 없자 오전 8시13분께 인공호흡기에 의지한 채 부산대 양산병원으로

다시 이송돼 1시간 이상 심폐소생술 등의 응급 처치를 받았으나 끝내 회복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병원측은 결국 오전 9시 30분께 심폐소생술을 중단했고

노 전 대통령은 퇴임 후 고향으로 돌아온 지 1년3개월 만에 파란만장한 삶을 끝내고 서거했다.

(창원=연합뉴스)

최종편집 : 2009-05-24 1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