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락의 산청에는 예부터 삼매가 전한다.
정당매(政堂梅), 원정매(元正梅), 남명매(南冥梅)가 그것이다.
고려 말 조선 초를 산 통정 강회백(1357∼1402)이 어릴 때 심어
단속사 절터에 뿌리를 내린 정당매는 수령이 640여 년에 달한다.
그가 정당문학 겸 대사헌에 올라 정당매로 불린다.
원정매는 고려 때 문신인 원정공 하즙(1303∼1380)이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데 수령이 670년을 넘겼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몇 해 전 고사해 버리고 말았다.
남명매는 남명 조식(1501~1572)이 말년에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산천재를 세우면서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는 매화나무 한 그루를 뜰에 심은 것이
450여 년의 성상을 뚫고 전해온 것이다.
산천재 뜰에 핀 남명매는 고고하면서도 절제된 품격이
남명의 선비 된 품성을 쏙 빼닮았다.
남명 조식은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뤄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좌퇴계, 우남명’이라 불릴 만큼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였다.
그의 학풍, 즉 남명학은 이치를 따지는 것보다는 실행과 실천을 중시했다.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등 다수의 의병장이 그의 문하였던 것만 봐도
그 실천성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남명은 스스로를 추스르고 성찰하기 위해 늘 허리춤에
‘성성자(惺惺子)’란 방울을 차고 다녔다.
그 방울소리를 들으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삼가며 경계했던 것이다.
아울러 남명은 작은 칼도 허리춤에 차고 다녔다.
문치가 극에 달했던 시대에 당대 최고의 선비가
칼을 허리춤에 찬다는 것 자체가 파격이 아닐 수 없었지만
그것은 ‘경(敬)’과 ‘의(義)’를 목숨처럼 여긴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그 칼에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은 의(內明者敬 外斷者義)”라는
‘패검명(佩劍銘)’을 새겨 넣고 ‘경의검(敬義劍)’이라 불렀다.
그래서일까.
남명은 마음을 살피고 행동을 결단하는 데 말 그대로 ‘칼같은’ 단호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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