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관

대선 주자들 1980년엔...

기산(箕山) 2007. 5. 15. 01:03

                                                                                     2007년 5월 14일 (월) 20:05   매일경제

대선주자들 80년 5ㆍ18때 뭘했나


5ㆍ18 광주민주화운동은 1980년 신군부의 부정한 권력 찬탈에 맞서 수많은 시민이 자발적으로
벌인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다.

올해 대선을 맞아 한나라당과 범여권 대선주자들이 앞다퉈 민주화 성지로 불리는 광주를 찾아
대선 승리를 다짐하려는 것도 이 같은 시대 정신과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오늘날 민주화의 뿌리를 내리게 했던 5ㆍ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지금의 대선주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 옥살이나 수배 피해 도피

이해찬 전 총리는 '김대중(DJ) 내란음모사건'으로 수배중이었던 1980년 5월을 뚜렷이 기억한다.

이 전 총리는 군대에서 복학하자마자 수배령이 떨어져 도피생활을 하다 결국 붙잡혀 10년형을
선고받은 뒤 1년2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5ㆍ18 항쟁을 'DJ 일당'의 내란음모에서 비롯됐다고 조작한 신군부의 만행으로 24명이 중형을
선고받았던 이 사건은 2003년 이 전 총리 등 8명에게 무죄가 선고됨으로써 역사의 재평가를
받게 됐다.





재야 여성 운동가의 길을 걸어온
한명숙 전 총리는 1980년 5월 광주
교도소에 수감된 상태였다.
1979년 크리스찬아카데미 여성
분야 간사로서 당시 군사정권
신랄하게 비꼬는 '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 교육을 벌이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2년6개월 형을
선고받고 투옥된 것이다.

한 측근은 "한 전 총리는 바깥 소식을 듣지 못해 '북한이 또 남침한 것 아니냐'며 죽음을 준비했다고 한다"며
"전쟁 발발시 통상 정치범은 사형에
처해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민주화 운동의 대부로 불리는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은 당시
계엄사령부의 수배령을 피해 서울
근교에서 도피생활을 해야만 했다.

◆ 유학 또는 칩거

젊은 시절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손학규 전 경기지사는 1980년 5ㆍ18
민주화운동 현장에는 있지 못했다.
 
1979년 부마사태와 관련해
계엄사령부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한 뒤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자유의 몸이 되자 빈 머리를 채우기 위해 1980년 1월 영국 유학길에 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손 전 지사는 5ㆍ18 공식
행사가 시작된 1993년 이래 매년 추모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특히 당시 민자당 소속 국회의원으로는 유일하게 행사에 참석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1978년부터 MBC 기자생활을
시작한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의장은 1980년 당시 기자로서
항거한 일화가 있다.

방송언론노조 활동에 열심이던 정 전 의장은 초년 기자로서 학살의 현장을 직접 취재하려 했으나
신군부의 '보도지침'에 좌절된 아픔이 있다.

1980년 당시 영남대 이사장으로 재직했던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부친을 잃은 10ㆍ26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일어난 12ㆍ12 군사쿠데타로 인해 암흑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12ㆍ12 장본인인 신군부가 박 전 대통령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 여러 면에서
심한 압박을 가했기 때문이다.
한 측근은 "신군부가 5ㆍ17 비상계엄조치로 박 전 대표가 이끌고 있던 새마음봉사단을 강제 해산
시키고 아버지 추도식조차 상당 기간 막았다"며 "신군부의 서슬 퍼런 감시 때문에 박 전 대표는
칩거하는 시간이 많았다"고 전했다.

◆ 기업인으로 활약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1차 중동 건설붐'이 거셌던 1980년 5ㆍ18 당시 현대건설 최고 사령탑으로
중동 건설 현장에서 구슬땀을 흘렸다.

당시 중동 순방중에 5ㆍ17 비상계엄이 선포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을 현지 기업인의 일원으로 수행하기도 했다.
캠프 관계자는 "호남지역에서 이 전 시장 지지율이 30%를 넘는 데는 과거 민주화운동 전력에다
한나라당 인사 중 상대적으로 5ㆍ18 부채에서 자유롭다는 점도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1970년대 초 도미한
김혁규 열린우리당 의원은 1980년 당시 뉴욕에서 가방무역회사인
'혁 트레이딩'으로 성공신화를 일궈낸 상태였다.

당시 뉴욕 한인경제인협회장을 맡고 있던 김 의원은 국내 소식을 접하고 군사정권의 감시망을
피해 김영삼 야당 대표 등 민추협 관계자들을 은밀하게 도왔다고 한다.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은 5ㆍ18 당시 그룹 기획조정실장을 맡아 유한킴벌리의 한 단계 성장을
위한 도약기를 진두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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