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천하에 휩싸인 중종의 39년
[오마이뉴스 이정근 기자]
▲ 창의문. 반정군이 통과했던 문이다. |
ⓒ2006 이정근 |
1506년 9월 초하루. 밤은 깊어 칠흑 같은 야심한 2경. 어둠을 뚫고 좌우를 살피며 훈련원으로 모여드는 무리가 있었다. 의기투합한 박원종과 성희안 그리고 건장한 무사들이었다. 먼저 도착해있던 김수동, 김감, 유자광 등과 눈빛으로 의기를 다지고 각기 맡은바 구역으로 흩어졌다.
무사들을 이끌고 의금부 밀위청(密威廳)으로 향한 일단의 무리들은 옥문을 부수고, 갇혀있던 죄수들을 풀어주며 병장기를 나누어줬다. 학정에 시달리며 죄 없이 끌려가 옥살이 하던 이들의 분노와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살기등등한 이들이 임사홍, 신수근, 신수영을 퇴살하고 돈화문 앞으로 나아갔다. 개성에서 신수겸을 베고 당도한 무리들과 성희안이 이끄는 무사들이 창덕궁을 에워싸고 있었다. 반정군이 들고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궁궐은 아수라장이었다.
무사들을 이끌고 의금부 밀위청(密威廳)으로 향한 일단의 무리들은 옥문을 부수고, 갇혀있던 죄수들을 풀어주며 병장기를 나누어줬다. 학정에 시달리며 죄 없이 끌려가 옥살이 하던 이들의 분노와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살기등등한 이들이 임사홍, 신수근, 신수영을 퇴살하고 돈화문 앞으로 나아갔다. 개성에서 신수겸을 베고 당도한 무리들과 성희안이 이끄는 무사들이 창덕궁을 에워싸고 있었다. 반정군이 들고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궁궐은 아수라장이었다.
▲ 창덕궁 돈화문 |
ⓒ2006 이정근 |
숙위하던 도총관 민효증 등 군졸들은 목숨 바쳐 임금을 보호하기는커녕 수채 구멍을 통하여 제 한 몸 도망가기에 바빴다. 뿐만 아니라 입직하던 승지 윤장, 조계형, 이우, 주서 이희옹, 한림 김흠조 등도 도망 가버리고 궁궐은 텅 비었다.
저항세력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박원종은 일단의 무리들에게 창덕궁을 포위케 하고 영의정 유순, 우의정 김수동, 찬성 신준, 정미수, 예조판서 송일, 병조판서 이손, 호조판서 이계남, 판중추 박건, 도승지 강혼, 좌승지 한순을 이끌고 경복궁으로 향했다. 궁중의 제일 큰 어른 자순대비가 경복궁에 있기 때문이다. 대비전에 당도한 박원종은 대비 앞에 부복했다.
“임금이 도리를 잃어 정령이 혼란하고 민생은 도탄에서 고생하며 종사는 위태롭기가 철류와 같으므로 신 등은 자나 깨나 근심이 되어 어찌할 줄을 모르겠습니다. 대소 신민이 진성대군에게 쏠린 지 이미 오래이므로 이제 추대하여 종사의 계책을 삼고자 감히 대비의 분부를 여쭙니다.”
저항세력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박원종은 일단의 무리들에게 창덕궁을 포위케 하고 영의정 유순, 우의정 김수동, 찬성 신준, 정미수, 예조판서 송일, 병조판서 이손, 호조판서 이계남, 판중추 박건, 도승지 강혼, 좌승지 한순을 이끌고 경복궁으로 향했다. 궁중의 제일 큰 어른 자순대비가 경복궁에 있기 때문이다. 대비전에 당도한 박원종은 대비 앞에 부복했다.
“임금이 도리를 잃어 정령이 혼란하고 민생은 도탄에서 고생하며 종사는 위태롭기가 철류와 같으므로 신 등은 자나 깨나 근심이 되어 어찌할 줄을 모르겠습니다. 대소 신민이 진성대군에게 쏠린 지 이미 오래이므로 이제 추대하여 종사의 계책을 삼고자 감히 대비의 분부를 여쭙니다.”
▲ 경복궁 광화문 |
ⓒ2006 이정근 |
“변변치 못한 어린 자식이 어찌 능히 중책을 감당하겠소?”
대비는 한사코 거절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계책을 협의하여 대계가 정하여졌으니 변경할 수 없습니다.”
영의정 유순이 거듭 말했다.
조선 역사 최초의 반정인 '중종반정'
“나라의 사세가 이에 이르렀으니 사직을 위한 계책이 부득이하다 하니 경등이 아뢴 대로 따르리라.”
사양을 거듭하던 자순대비가 끝내 허락하였다. 임금의 성덕이 백성을 떠났고 하늘의 노기가 내릴 것이라 예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적으로 연산의 칼춤에 자신과 아들 진성대군이 언제 희생될지 모르는 공포에서 해방되니 환영할 일이었다. 자순대비의 허락을 받은 반정군은 지체 없이 순정을 진성대군의 사제로 보냈다.
“조정의 종묘사직을 위한 대계가 진실로 이러해야 마땅하나? 내가 실로 부덕하니 어떻게 이를 감당하겠는가?”
진성대군 역시 대환영 할 일이지만 체신을 지키기 위하여 재삼 사양한 뒤에야 비로소 받아들였다.
이윽고 승지 한순, 내관 서경생을 창덕궁에 보내어 백성들의 함성을 거스르면 죽음밖에 없다고 임금에게 통첩했다. 승지의 통보를 받은 임금은 턱을 떨며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올 것이 왔구나’ 라고 체념하는 듯했다. 바로 어제 경기도 장단에 나아가 뱃놀이 하던 일이 꿈만 같았다.
대비는 한사코 거절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계책을 협의하여 대계가 정하여졌으니 변경할 수 없습니다.”
영의정 유순이 거듭 말했다.
조선 역사 최초의 반정인 '중종반정'
“나라의 사세가 이에 이르렀으니 사직을 위한 계책이 부득이하다 하니 경등이 아뢴 대로 따르리라.”
사양을 거듭하던 자순대비가 끝내 허락하였다. 임금의 성덕이 백성을 떠났고 하늘의 노기가 내릴 것이라 예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적으로 연산의 칼춤에 자신과 아들 진성대군이 언제 희생될지 모르는 공포에서 해방되니 환영할 일이었다. 자순대비의 허락을 받은 반정군은 지체 없이 순정을 진성대군의 사제로 보냈다.
“조정의 종묘사직을 위한 대계가 진실로 이러해야 마땅하나? 내가 실로 부덕하니 어떻게 이를 감당하겠는가?”
진성대군 역시 대환영 할 일이지만 체신을 지키기 위하여 재삼 사양한 뒤에야 비로소 받아들였다.
이윽고 승지 한순, 내관 서경생을 창덕궁에 보내어 백성들의 함성을 거스르면 죽음밖에 없다고 임금에게 통첩했다. 승지의 통보를 받은 임금은 턱을 떨며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올 것이 왔구나’ 라고 체념하는 듯했다. 바로 어제 경기도 장단에 나아가 뱃놀이 하던 일이 꿈만 같았다.
▲ 상서원 |
ⓒ2006 이정근 |
“내 죄가 중대하여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좋을 대로 하라.”
시녀를 시켜 옥새를 내어다 상서원 관원에게 주게 하였다. 저항할 힘도 항거할 능력도 없는 임금 연산은 순순히 무너졌다. 이것이 조선 역사상 최초의 반정이다. 일컬어 중종반정이라 한다.
역성혁명은 지도자가 정상에 오르지만 반정은 전왕을 폐하고 신왕을 옹립하는 정치행위다. 유교를 이념으로 건국한 조선에서 성리학을 공부한 조선 선비들이 내세우는 자기 변론적인 논리다. 이때의 반(反)은 정통으로 돌아가거나 어긋난 정도(正道)를 회복한다는 뜻이지만 유교에서 말하는 ‘두 임금을 모시는 것은 불충이다’ 는 덕목에는 어긋나는 자기모순을 가지고 있다.
“전하를 동궁으로 뫼시어라.”
옥쇄를 받아든 박원종은 운산군 이성에게 무사 수십 명을 주어 연산을 동궁에 연금하라 이르고 경복궁으로 향했다. 대비의 교지를 반포하고 사저에서 연을 타고 사정전에 나와 있는 진성대군을 왕으로 등극시키기 위한 즉위식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시녀를 시켜 옥새를 내어다 상서원 관원에게 주게 하였다. 저항할 힘도 항거할 능력도 없는 임금 연산은 순순히 무너졌다. 이것이 조선 역사상 최초의 반정이다. 일컬어 중종반정이라 한다.
역성혁명은 지도자가 정상에 오르지만 반정은 전왕을 폐하고 신왕을 옹립하는 정치행위다. 유교를 이념으로 건국한 조선에서 성리학을 공부한 조선 선비들이 내세우는 자기 변론적인 논리다. 이때의 반(反)은 정통으로 돌아가거나 어긋난 정도(正道)를 회복한다는 뜻이지만 유교에서 말하는 ‘두 임금을 모시는 것은 불충이다’ 는 덕목에는 어긋나는 자기모순을 가지고 있다.
“전하를 동궁으로 뫼시어라.”
옥쇄를 받아든 박원종은 운산군 이성에게 무사 수십 명을 주어 연산을 동궁에 연금하라 이르고 경복궁으로 향했다. 대비의 교지를 반포하고 사저에서 연을 타고 사정전에 나와 있는 진성대군을 왕으로 등극시키기 위한 즉위식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 사정전 |
ⓒ2006 이정근 |
'요화' 장녹수의 목이 베어지고
박원종을 필두로 반정군이 서둘러 거사한 이유는 실로 엉뚱한 곳에 있었다. 당대의 무골 이장곤이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거제에서 귀양살이 하던 중 도주하여 함경도에 은거하며 무사를 기르고 있고, 팔도에 격문을 띄워 거병하려 한다는 소문이 도성에 파다하게 퍼져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연산 아래에서 녹을 먹고 있던 이조판서 유순정과 군사부정 신윤무는 청산의 대상이 되어 가루가 될 것이라는 위기감이 팽배해 있었다. 또한 박원종이 반정군의 무혈입성을 노리고, 진성대군의 장인 신수근을 찾아가 반정에 동참하기를 청했으나 신하가 두 임금을 모실 수 없다고 거절당하여 기밀 유지가 위태로웠다.
박원종을 필두로 반정군이 서둘러 거사한 이유는 실로 엉뚱한 곳에 있었다. 당대의 무골 이장곤이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거제에서 귀양살이 하던 중 도주하여 함경도에 은거하며 무사를 기르고 있고, 팔도에 격문을 띄워 거병하려 한다는 소문이 도성에 파다하게 퍼져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연산 아래에서 녹을 먹고 있던 이조판서 유순정과 군사부정 신윤무는 청산의 대상이 되어 가루가 될 것이라는 위기감이 팽배해 있었다. 또한 박원종이 반정군의 무혈입성을 노리고, 진성대군의 장인 신수근을 찾아가 반정에 동참하기를 청했으나 신하가 두 임금을 모실 수 없다고 거절당하여 기밀 유지가 위태로웠다.
▲ 서울 방학동에 있는 연산군 묘 |
ⓒ2006 이정근 |
새벽이 오고 날이 밝자 반정군은 도성의 백성들로부터 대환영을 받았다. 그만큼 연산군의 폭정이 극심했다는 반증이다. 도성은 환호하는 함성과 죽음의 외마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죽음과 환호의 희비쌍곡선이었다.
반정군이 군중 앞에서 환관, 내시의 족친으로 권세를 믿고 횡포를 부리며 방자하게 굴던 김효손, 전동, 손금순, 심금, 손사랑, 강응, 석장동, 김숙화 등의 목을 베자 백성들은 환호했다. 폭정에 숨죽이던 백성들의 함성이 장안을 진동했고 하늘을 찌를 듯했다.
무사들이 군기시 앞에서 '요화' 장녹수의 목을 베었다. 성난 백성들이 기왓장과 돌멩이를 그녀의 국부에 던지면서 ‘일국의 고혈이 여기에서 탕진됐다’ 고 하였는데, 잠깐 사이에 돌무더기를 이루었다. 폭압에 짓눌려온 백성들의 분노가 용광로처럼 들끓었다.
오후 3시. 경복궁 근정전. 조선 11대왕 중종의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얼마나 경황이 없었음인지 즉위식에는 곤룡포에 면류관을 써야 하나 곤룡포에 익선관을 착용했다. 어젯밤까지도 형의 칼날 앞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쥐 죽은 듯이 엎드려 있던 진성대군이 왕으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반정군이 군중 앞에서 환관, 내시의 족친으로 권세를 믿고 횡포를 부리며 방자하게 굴던 김효손, 전동, 손금순, 심금, 손사랑, 강응, 석장동, 김숙화 등의 목을 베자 백성들은 환호했다. 폭정에 숨죽이던 백성들의 함성이 장안을 진동했고 하늘을 찌를 듯했다.
무사들이 군기시 앞에서 '요화' 장녹수의 목을 베었다. 성난 백성들이 기왓장과 돌멩이를 그녀의 국부에 던지면서 ‘일국의 고혈이 여기에서 탕진됐다’ 고 하였는데, 잠깐 사이에 돌무더기를 이루었다. 폭압에 짓눌려온 백성들의 분노가 용광로처럼 들끓었다.
오후 3시. 경복궁 근정전. 조선 11대왕 중종의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얼마나 경황이 없었음인지 즉위식에는 곤룡포에 면류관을 써야 하나 곤룡포에 익선관을 착용했다. 어젯밤까지도 형의 칼날 앞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쥐 죽은 듯이 엎드려 있던 진성대군이 왕으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경복궁 근정전 |
ⓒ2006 이정근 |
반정군에 옹립된 힘없는 중종
이렇게 어느 날 갑자기 용상에 오르게 된 중종은 성종의 둘째 아들이며 연산군의 이복동생이다. 자력으로 용상에 오르지 못하고 반정군에 옹립된 임금이었기에 승하할 때까지 재위 39년 동안 반정공신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 첫 시련이 즉위 7일 만에 찾아왔다. 반정공신들은 마음씨 곱고 착하기만 한 아내 장경왕후를 궁 밖으로 내치라고 몰아부쳤다. 아내 신씨가 연산조에서 벼슬을 한 신수근의 딸이기에 역신의 딸을 중전으로 모실 수 없다는 이유였다. 연산조에서 좌의정을 했던 신수근은 누이가 연산의 아내, 딸이 진성대군의 아내였다. 연산의 아내 신씨와 중종의 정비 신씨는 고모지간이다.
이렇게 어느 날 갑자기 용상에 오르게 된 중종은 성종의 둘째 아들이며 연산군의 이복동생이다. 자력으로 용상에 오르지 못하고 반정군에 옹립된 임금이었기에 승하할 때까지 재위 39년 동안 반정공신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 첫 시련이 즉위 7일 만에 찾아왔다. 반정공신들은 마음씨 곱고 착하기만 한 아내 장경왕후를 궁 밖으로 내치라고 몰아부쳤다. 아내 신씨가 연산조에서 벼슬을 한 신수근의 딸이기에 역신의 딸을 중전으로 모실 수 없다는 이유였다. 연산조에서 좌의정을 했던 신수근은 누이가 연산의 아내, 딸이 진성대군의 아내였다. 연산의 아내 신씨와 중종의 정비 신씨는 고모지간이다.
▲ 인왕산 치마바위. 대궐에서 쫓겨난 신씨가 경복궁을 바라보며 치마를 흔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
ⓒ2006 이정근 |
중종에게는 거절할 힘이 없었다. 궁 밖으로 쫓겨나는 부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기력한 자신을 자조해야 했다. 이것만이 아니다. 공신들이 추천하는 여자를 7명 까지 받아들여야 한다는 옵션에 묶여 있었다. 이렇게 하여 궁에 들어온 여자가 경빈 박씨, 희빈 홍씨, 창빈 안씨다. 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후궁이 있었다.
국사를 논해야 할 궁궐이 여인천하가 된 셈이다. 총애는 곧 권력으로 연결되고 차기 왕통에까지 영향을 미치니 여인들의 시기와 암투는 불을 보듯 뻔했다. 이들이 연루된 궁중의 암투사건이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음모로 시작되는 기묘사화다. 조씨 성을 가진 사람이 왕위를 노린다는 터무니없는 모략으로 개혁정치를 추진하던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류가 참변을 당했다.
또한 후계를 놓고 암투가 벌어졌으니 작서(灼鼠)의 변(變)이다. 장경왕후가 낳은 세자(훗날 인종)를 주술의 힘으로 죽이기 위하여 동궁 북쪽 정원에 사지가 잘린 쥐를 걸어놓은 사건이다. 자신이 낳은 복성군을 세자로 밀어올리기 위한 계략이라는 혐의를 받고 경빈 박씨와 복성군이 사사되고 연루된 많은 선비들이 변을 당했다.
이러한 여인천하 세상에 강자가 나타났으니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다. 중종 임금은 즉위 초 정비 단경왕후를 궁 밖으로 쫒아내고, 왕비를 맞이해 들였으니 그분이 제1계비 장경왕후다. 허나 왕비는 25세 한창 나이에 세자를 낳고 산후증으로 일찍 죽어 다시 왕비를 맞아 들였으니 그분이 제2계비 문정왕후다.
국사를 논해야 할 궁궐이 여인천하가 된 셈이다. 총애는 곧 권력으로 연결되고 차기 왕통에까지 영향을 미치니 여인들의 시기와 암투는 불을 보듯 뻔했다. 이들이 연루된 궁중의 암투사건이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음모로 시작되는 기묘사화다. 조씨 성을 가진 사람이 왕위를 노린다는 터무니없는 모략으로 개혁정치를 추진하던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류가 참변을 당했다.
또한 후계를 놓고 암투가 벌어졌으니 작서(灼鼠)의 변(變)이다. 장경왕후가 낳은 세자(훗날 인종)를 주술의 힘으로 죽이기 위하여 동궁 북쪽 정원에 사지가 잘린 쥐를 걸어놓은 사건이다. 자신이 낳은 복성군을 세자로 밀어올리기 위한 계략이라는 혐의를 받고 경빈 박씨와 복성군이 사사되고 연루된 많은 선비들이 변을 당했다.
이러한 여인천하 세상에 강자가 나타났으니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다. 중종 임금은 즉위 초 정비 단경왕후를 궁 밖으로 쫒아내고, 왕비를 맞이해 들였으니 그분이 제1계비 장경왕후다. 허나 왕비는 25세 한창 나이에 세자를 낳고 산후증으로 일찍 죽어 다시 왕비를 맞아 들였으니 그분이 제2계비 문정왕후다.
▲ 경기도 고양 원당 서삼릉 권역에 있는 희릉. 장경왕후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
ⓒ2006 이정근 |
수렴청정의 대가 문정왕후
열여섯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 온 문정왕후는 처음엔 아무것도 모르고 순박하기만 했다. 나이 많은 후궁들이 설쳐대는 것이 오히려 무섭기만 했다. ‘첩이 왕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은 법도에 어긋난다’라고 후궁들을 질타하는 대사헌 조광조의 말이 무슨 뜻인 줄도 몰랐다.
연륜이 쌓이면서 왕과 왕비, 그리고 후궁과 신하들의 위상을 파악한 문정왕후는 왕의 권력과 왕비의 세력이 뭐다는 것을 터득했다. ‘세(勢)가 곧 힘이다’는 것을 자각하고 윤원로 유원형 형제를 끌어들여 힘을 축적해 나갔다.
‘무모한 질주는 죽음을 부른다’는 것도 터득한 문정왕후는 욕심 같아서는 자신의 아들을 곧바로 왕의 길로 가는 세자로 밀어 올리고 싶었지만 세 불리를 자각하고 인종 즉위를 일단 받아들이고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즉위 8개월 만에 인종은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뒤이어 왕위에 오른 이가 문정왕후가 낳은 명종이다. 때문에 오늘날까지 인종 독살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 독살설의 중심에 수렴청정의 대가 문정왕후가 있다.
어느 날 갑자기 굴러 들어온 왕 자리를 39년간이나 지키고 있던 임금 중종이 57세를 일기로 1544년 11월 14일 창경궁 환경전에서 승하했다. 세자를 낳다 먼저 간 장경왕후 곁에 묻히기를 소망하여 경기도 고양군 원당에 있는 희릉 장경왕후 곁에 묻혔으나 문정왕후는 그 꼴마저도 보아주지 않았다.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하는 조선에서 봉은사 주지 보우를 병조판서에 앉힌 문정왕후는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보우 스님의 말을 빌어 중종을 그의 아버지가 잠들어 있는 경기도 광주(현 서울 삼성동) 선릉으로 천장했다. 한마디로 장경왕후 곁에 누워 있는 꼴도 보아줄 수 없다는 얘기다.
여진족과 왜구를 막기 위하여 설치한 비변사(備邊司)마저 휘날리는 치마폭 때문에 정치기관화 시켜버린 중종. 요람에서 무덤까지 라는 말이 있듯이 자순대비의 치마에서 시작하여 문정왕후의 치마를 벗어나지 못한 임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열여섯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 온 문정왕후는 처음엔 아무것도 모르고 순박하기만 했다. 나이 많은 후궁들이 설쳐대는 것이 오히려 무섭기만 했다. ‘첩이 왕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은 법도에 어긋난다’라고 후궁들을 질타하는 대사헌 조광조의 말이 무슨 뜻인 줄도 몰랐다.
연륜이 쌓이면서 왕과 왕비, 그리고 후궁과 신하들의 위상을 파악한 문정왕후는 왕의 권력과 왕비의 세력이 뭐다는 것을 터득했다. ‘세(勢)가 곧 힘이다’는 것을 자각하고 윤원로 유원형 형제를 끌어들여 힘을 축적해 나갔다.
‘무모한 질주는 죽음을 부른다’는 것도 터득한 문정왕후는 욕심 같아서는 자신의 아들을 곧바로 왕의 길로 가는 세자로 밀어 올리고 싶었지만 세 불리를 자각하고 인종 즉위를 일단 받아들이고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즉위 8개월 만에 인종은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뒤이어 왕위에 오른 이가 문정왕후가 낳은 명종이다. 때문에 오늘날까지 인종 독살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 독살설의 중심에 수렴청정의 대가 문정왕후가 있다.
어느 날 갑자기 굴러 들어온 왕 자리를 39년간이나 지키고 있던 임금 중종이 57세를 일기로 1544년 11월 14일 창경궁 환경전에서 승하했다. 세자를 낳다 먼저 간 장경왕후 곁에 묻히기를 소망하여 경기도 고양군 원당에 있는 희릉 장경왕후 곁에 묻혔으나 문정왕후는 그 꼴마저도 보아주지 않았다.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하는 조선에서 봉은사 주지 보우를 병조판서에 앉힌 문정왕후는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보우 스님의 말을 빌어 중종을 그의 아버지가 잠들어 있는 경기도 광주(현 서울 삼성동) 선릉으로 천장했다. 한마디로 장경왕후 곁에 누워 있는 꼴도 보아줄 수 없다는 얘기다.
여진족과 왜구를 막기 위하여 설치한 비변사(備邊司)마저 휘날리는 치마폭 때문에 정치기관화 시켜버린 중종. 요람에서 무덤까지 라는 말이 있듯이 자순대비의 치마에서 시작하여 문정왕후의 치마를 벗어나지 못한 임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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