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관

여인천하의 중종

기산(箕山) 2006. 11. 13. 08:44

                        여인천하에 휩싸인 중종의 39년

 

                                                                       [오마이뉴스 이정근 기자]
▲ 창의문. 반정군이 통과했던 문이다.
ⓒ2006 이정근
1506년 9월 초하루. 밤은 깊어 칠흑 같은 야심한 2경. 어둠을 뚫고 좌우를 살피며 훈련원으로 모여드는 무리가 있었다. 의기투합한 박원종과 성희안 그리고 건장한 무사들이었다. 먼저 도착해있던 김수동, 김감, 유자광 등과 눈빛으로 의기를 다지고 각기 맡은바 구역으로 흩어졌다.

무사들을 이끌고 의금부 밀위청(密威廳)으로 향한 일단의 무리들은 옥문을 부수고, 갇혀있던 죄수들을 풀어주며 병장기를 나누어줬다. 학정에 시달리며 죄 없이 끌려가 옥살이 하던 이들의 분노와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살기등등한 이들이 임사홍, 신수근, 신수영을 퇴살하고 돈화문 앞으로 나아갔다. 개성에서 신수겸을 베고 당도한 무리들과 성희안이 이끄는 무사들이 창덕궁을 에워싸고 있었다. 반정군이 들고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궁궐은 아수라장이었다.

창덕궁 돈화문
ⓒ2006 이정근
숙위하던 도총관 민효증 등 군졸들은 목숨 바쳐 임금을 보호하기는커녕 수채 구멍을 통하여 제 한 몸 도망가기에 바빴다. 뿐만 아니라 입직하던 승지 윤장, 조계형, 이우, 주서 이희옹, 한림 김흠조 등도 도망 가버리고 궁궐은 텅 비었다.

저항세력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박원종은 일단의 무리들에게 창덕궁을 포위케 하고 영의정 유순, 우의정 김수동, 찬성 신준, 정미수, 예조판서 송일, 병조판서 이손, 호조판서 이계남, 판중추 박건, 도승지 강혼, 좌승지 한순을 이끌고 경복궁으로 향했다. 궁중의 제일 큰 어른 자순대비가 경복궁에 있기 때문이다. 대비전에 당도한 박원종은 대비 앞에 부복했다.

“임금이 도리를 잃어 정령이 혼란하고 민생은 도탄에서 고생하며 종사는 위태롭기가 철류와 같으므로 신 등은 자나 깨나 근심이 되어 어찌할 줄을 모르겠습니다. 대소 신민이 진성대군에게 쏠린 지 이미 오래이므로 이제 추대하여 종사의 계책을 삼고자 감히 대비의 분부를 여쭙니다.”

▲ 경복궁 광화문
ⓒ2006 이정근
“변변치 못한 어린 자식이 어찌 능히 중책을 감당하겠소?”

대비는 한사코 거절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계책을 협의하여 대계가 정하여졌으니 변경할 수 없습니다.”

영의정 유순이 거듭 말했다.

조선 역사 최초의 반정인 '중종반정'

“나라의 사세가 이에 이르렀으니 사직을 위한 계책이 부득이하다 하니 경등이 아뢴 대로 따르리라.”

사양을 거듭하던 자순대비가 끝내 허락하였다. 임금의 성덕이 백성을 떠났고 하늘의 노기가 내릴 것이라 예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적으로 연산의 칼춤에 자신과 아들 진성대군이 언제 희생될지 모르는 공포에서 해방되니 환영할 일이었다. 자순대비의 허락을 받은 반정군은 지체 없이 순정을 진성대군의 사제로 보냈다.

“조정의
종묘사직을 위한 대계가 진실로 이러해야 마땅하나? 내가 실로 부덕하니 어떻게 이를 감당하겠는가?”

진성대군 역시 대환영 할 일이지만 체신을 지키기 위하여 재삼 사양한 뒤에야 비로소 받아들였다.

이윽고 승지 한순, 내관 서경생을 창덕궁에 보내어 백성들의 함성을 거스르면 죽음밖에 없다고 임금에게 통첩했다. 승지의 통보를 받은 임금은 턱을 떨며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올 것이 왔구나’ 라고 체념하는 듯했다. 바로 어제 경기도 장단에 나아가 뱃놀이 하던 일이 꿈만 같았다.

▲ 상서원
ⓒ2006 이정근
“내 죄가 중대하여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좋을 대로 하라.”

시녀를 시켜 옥새를 내어다 상서원 관원에게 주게 하였다. 저항할 힘도 항거할 능력도 없는 임금 연산은 순순히 무너졌다. 이것이 조선 역사상 최초의 반정이다. 일컬어 중종반정이라 한다.

역성혁명은 지도자가 정상에 오르지만 반정은 전왕을 폐하고 신왕을 옹립하는 정치행위다. 유교를 이념으로 건국한 조선에서 성리학을 공부한 조선 선비들이 내세우는 자기 변론적인 논리다. 이때의 반(反)은 정통으로 돌아가거나 어긋난 정도(正道)를 회복한다는 뜻이지만 유교에서 말하는 ‘두 임금을 모시는 것은 불충이다’ 는 덕목에는 어긋나는 자기모순을 가지고 있다.

“전하를 동궁으로 뫼시어라.”

옥쇄를 받아든 박원종은 운산군 이성에게 무사 수십 명을 주어 연산을 동궁에 연금하라 이르고 경복궁으로 향했다. 대비의 교지를 반포하고 사저에서 연을 타고 사정전에 나와 있는 진성대군을 왕으로 등극시키기 위한 즉위식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 사정전
ⓒ2006 이정근
'요화' 장녹수의 목이 베어지고

박원종을 필두로 반정군이 서둘러 거사한 이유는 실로 엉뚱한 곳에 있었다. 당대의 무골 이장곤이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거제에서 귀양살이 하던 중 도주하여 함경도에 은거하며 무사를 기르고 있고, 팔도에 격문을 띄워 거병하려 한다는 소문이 도성에 파다하게 퍼져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연산 아래에서 녹을 먹고 있던 이조판서 유순정과 군사부정 신윤무는 청산의 대상이 되어 가루가 될 것이라는 위기감이 팽배해 있었다. 또한 박원종이 반정군의 무혈입성을 노리고, 진성대군의 장인 신수근을 찾아가 반정에 동참하기를 청했으나 신하가 두 임금을 모실 수 없다고 거절당하여 기밀 유지가 위태로웠다.

▲ 서울 방학동에 있는 연산군 묘
ⓒ2006 이정근
새벽이 오고 날이 밝자 반정군은 도성의 백성들로부터 대환영을 받았다. 그만큼 연산군의 폭정이 극심했다는 반증이다. 도성은 환호하는 함성과 죽음의 외마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죽음과 환호의 희비쌍곡선이었다.

반정군이 군중 앞에서 환관, 내시의 족친으로 권세를 믿고 횡포를 부리며 방자하게 굴던 김효손, 전동, 손금순, 심금, 손사랑, 강응, 석장동, 김숙화 등의 목을 베자 백성들은 환호했다. 폭정에 숨죽이던 백성들의 함성이 장안을 진동했고 하늘을 찌를 듯했다.

무사들이 군기시 앞에서 '요화' 장녹수의 목을 베었다. 성난 백성들이 기왓장과 돌멩이를 그녀의 국부에 던지면서 ‘일국의 고혈이 여기에서 탕진됐다’ 고 하였는데, 잠깐 사이에 돌무더기를 이루었다. 폭압에 짓눌려온 백성들의 분노가 용광로처럼 들끓었다.

오후 3시.
경복궁 근정전. 조선 11대왕 중종의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얼마나 경황이 없었음인지 즉위식에는 곤룡포에 면류관을 써야 하나 곤룡포에 익선관을 착용했다. 어젯밤까지도 형의 칼날 앞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쥐 죽은 듯이 엎드려 있던 진성대군이 왕으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경복궁 근정전
ⓒ2006 이정근
반정군에 옹립된 힘없는 중종

이렇게 어느 날 갑자기 용상에 오르게 된 중종은 성종의 둘째 아들이며 연산군의 이복동생이다. 자력으로 용상에 오르지 못하고 반정군에 옹립된 임금이었기에 승하할 때까지 재위 39년 동안 반정공신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 첫 시련이 즉위 7일 만에 찾아왔다. 반정공신들은 마음씨 곱고 착하기만 한 아내
장경왕후를 궁 밖으로 내치라고 몰아부쳤다. 아내 신씨가 연산조에서 벼슬을 한 신수근의 딸이기에 역신의 딸을 중전으로 모실 수 없다는 이유였다. 연산조에서 좌의정을 했던 신수근은 누이가 연산의 아내, 딸이 진성대군의 아내였다. 연산의 아내 신씨와 중종의 정비 신씨는 고모지간이다.

▲ 인왕산 치마바위. 대궐에서 쫓겨난 신씨가 경복궁을 바라보며 치마를 흔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2006 이정근
중종에게는 거절할 힘이 없었다. 궁 밖으로 쫓겨나는 부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기력한 자신을 자조해야 했다. 이것만이 아니다. 공신들이 추천하는 여자를 7명 까지 받아들여야 한다는 옵션에 묶여 있었다. 이렇게 하여 궁에 들어온 여자가 경빈 박씨, 희빈 홍씨, 창빈 안씨다. 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후궁이 있었다.

국사를 논해야 할 궁궐이 여인천하가 된 셈이다. 총애는 곧 권력으로 연결되고 차기 왕통에까지 영향을 미치니 여인들의 시기와 암투는 불을 보듯 뻔했다. 이들이 연루된 궁중의 암투사건이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음모로 시작되는 기묘사화다. 조씨 성을 가진 사람이 왕위를 노린다는 터무니없는 모략으로 개혁정치를 추진하던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류가 참변을 당했다.

또한 후계를 놓고 암투가 벌어졌으니 작서(灼鼠)의 변(變)이다. 장경왕후가 낳은 세자(훗날 인종)를 주술의 힘으로 죽이기 위하여 동궁 북쪽 정원에 사지가 잘린 쥐를 걸어놓은 사건이다. 자신이 낳은 복성군을 세자로 밀어올리기 위한 계략이라는 혐의를 받고 경빈 박씨와 복성군이 사사되고 연루된 많은 선비들이 변을 당했다.

이러한 여인천하 세상에 강자가 나타났으니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다. 중종 임금은 즉위 초 정비 단경왕후를 궁 밖으로 쫒아내고, 왕비를 맞이해 들였으니 그분이 제1계비 장경왕후다. 허나 왕비는 25세 한창 나이에 세자를 낳고 산후증으로 일찍 죽어 다시 왕비를 맞아 들였으니 그분이 제2계비 문정왕후다.

▲ 경기도 고양 원당 서삼릉 권역에 있는 희릉. 장경왕후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2006 이정근
수렴청정의 대가 문정왕후

열여섯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 온 문정왕후는 처음엔 아무것도 모르고 순박하기만 했다. 나이 많은 후궁들이 설쳐대는 것이 오히려 무섭기만 했다. ‘첩이 왕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은 법도에 어긋난다’라고 후궁들을 질타하는 대사헌 조광조의 말이 무슨 뜻인 줄도 몰랐다.

연륜이 쌓이면서 왕과 왕비, 그리고 후궁과 신하들의 위상을 파악한 문정왕후는 왕의 권력과 왕비의 세력이 뭐다는 것을 터득했다. ‘세(勢)가 곧 힘이다’는 것을 자각하고 윤원로 유원형 형제를 끌어들여 힘을 축적해 나갔다.

‘무모한 질주는 죽음을 부른다’는 것도 터득한 문정왕후는 욕심 같아서는 자신의 아들을 곧바로 왕의 길로 가는 세자로 밀어 올리고 싶었지만 세 불리를 자각하고 인종 즉위를 일단 받아들이고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즉위 8개월 만에 인종은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뒤이어 왕위에 오른 이가 문정왕후가 낳은 명종이다. 때문에 오늘날까지 인종 독살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 독살설의 중심에 수렴청정의 대가 문정왕후가 있다.

어느 날 갑자기 굴러 들어온 왕 자리를 39년간이나 지키고 있던 임금 중종이 57세를 일기로 1544년 11월 14일 창경궁 환경전에서 승하했다. 세자를 낳다 먼저 간 장경왕후 곁에 묻히기를 소망하여 경기도 고양군 원당에 있는 희릉 장경왕후 곁에 묻혔으나 문정왕후는 그 꼴마저도 보아주지 않았다.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하는 조선에서 봉은사 주지 보우를 병조판서에 앉힌 문정왕후는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보우 스님의 말을 빌어 중종을 그의 아버지가 잠들어 있는 경기도 광주(현 서울 삼성동) 선릉으로 천장했다. 한마디로 장경왕후 곁에 누워 있는 꼴도 보아줄 수 없다는 얘기다.

여진족과 왜구를 막기 위하여 설치한 비변사(備邊司)마저 휘날리는 치마폭 때문에 정치기관화 시켜버린 중종. 요람에서 무덤까지 라는 말이 있듯이 자순대비의 치마에서 시작하여 문정왕후의 치마를 벗어나지 못한 임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서울 삼성동에 있는 선정릉. 선릉은 성종이고 정릉은 중종이다.

 

 

 

 

 

 

 

 

 

 단경왕후와 치마바위
▲ 인왕산 치마바위
ⓒ 이정근

열두 살 어린 신부가 시집가는 날이다. 신랑은 한 살 아래 열한 살. 얼굴 한 번 보지 못했지만 훌륭한 신랑감이란다. 그래도 가슴이 설렌다. 어떻게 생겼을까? 잘 생겼을까? 하지만 못생겼어도 가야하는 시집길이다. 부모님이 그것도 아버지가 맺어준 배필인데 거역할 수가 없다.

이조판서 신수근. 신부의 아버지이다. 자신의 누이를 연산군에게 시집보내 왕후의 자리에 밀어 올리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딸을 왕의 이복동생 진성대군에게 시집보내려 한다. 왕실과 겹사돈을 맺어 권세를 누리고 세세손손 부귀영화를 이어가려는 욕심에 끝이 없다.

이 결혼은 어쩌면 자순대비의 바람이었는지 모른다. 작년(1498년)에 벌어진 무오사화에서 극악무도함을 드러내기 시작한 연산군의 포악성이 언제 어떻게 자신의 아들 진성대군에게 떨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허구한 날 피바람을 일으키며 칼춤을 추는 연산군을 대왕대비로 궁 안에서 지켜보며 불안한 나날이다.

이 살벌한 분위기에서 그래도 잘 나가는 이판 대감에게 자신의 아들을 맡겨두면 조금이나마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보면 시집을 잘 가는 것이 아니라 장가를 잘 가는 꼴이다. 아무튼 서로의 기대치와 욕심이 맞아 떨어진 정략결혼이다.

▲ 경복궁 경회루에서 바라본 인왕산 치마바위
ⓒ 이정근

왕실의 왕자 신랑이 친영을 나왔다. 것도 후궁의 몸에서 태어난 군(君)이 아니라 대군(大君)이다. 이조판서 대감댁 앞마당에 초례청이 설치되었다. 사가와 달리 왕실의 혼례는 격식이 엄격하고 절차가 까다롭다. 세자나 세손이라면 덕망 있는 원로가 도제조에 임명되고 이판과 예판이 당연직 제조로 임명되어 국혼으로 치른다.

오늘의 혼례는 왕의 이복동생 결혼식이기에 많이 생략되었다. 잘 나가는 대감댁 혼례라 온 동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기러기 한 마리를 싼 보자기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궁에서 나온 나인이 앞장섰다. 대감댁에서 마중 나온 처남의 안내를 받으며 꼬마신랑이 대문을 들어섰다. 구경나온 사람들이 모두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기에 여념이 없다.

멍석 위에 돗자리를 깔고 마련한 대례청에 마주선 신랑과 신부는 시선을 내리깔고 마주섰다. 전안위(奠雁衛)에 기러기를 올려놓고 꼬마 신랑이 두 번 절을 했다. 전안례다. 대감댁 할멈이 기러기 보자기를 치마로 감싸듯이 받아들고 안방으로 들어가 시루로 엎어 놓는다. 치마로 감싸는 것은 다산을 기원하며 떡 시루는 장수를 바라는 축원이다.

▲ 인왕산 치마바위에서 바라본 경복궁
ⓒ 이정근

이어 신랑신부 교배례가 이루어 졌다. 이어 합근례를 치르고 신랑신부는 신방으로 들어갔다. 꼬마신랑과 한살 위 연상의 신부가 맞이하는 첫날밤이다. 가슴이 설레이는 것은 신부지만 신랑이 오히려 떨고 있다. 꼬마신랑이기 때문이다. 떨리는 가슴을 달래며 신부를 살짝 보았다. 장난기다. 색시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예쁘다. 그리고 밤은 깊어갔다.

이렇게 혼례를 치른 꼬마신랑이 훗날 조선 11대왕 중종으로 등극한 진성대군이다. 신부는 왕후 노릇 7일 만에 궁에서 쫓겨난 단경왕후다. 혼례를 치른 이들은 3일을 이판 대감댁에서 묵은 후 어머니가 있는 경복궁에 들어가 인사를 올리고 신랑의 형 임금님을 배알했다. 사가로 나와 신접살림을 차린 이들은 금슬 좋기로 소문난 잉꼬부부였다.

궁에서 내린 술과 임금이 내려준 풍악으로 잔치를 치른 이조판서 신수근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급기야 7월에는 인사문제를 전횡하다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삼사가 합사하여 이조와는 양존할 수 없다고 맹공을 퍼부었다. 하지만 연산은 신수근의 손을 들어 주었다. 직책이 오르면 더욱 겸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고만장하다 스스로의 무덤을 팠다.

▲ 왕의 자리. 경복궁 근정전
ⓒ 이정근

1506년 9월 1일. 초승달도 없는 칠흑 같은 밤. 건장한 무사들이 진성대군 사저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집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물론 대군 댁 가솔들도 일절 통행금지다. 순간에 진성대군은 연금 아닌 연금 상태에 들어간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휘둘러대는 연산군의 칼춤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죽은 듯이 엎드려 있던 진성대군 사저는 일순 두려움과 적막에 휩싸였다. 아버지 성종을 모셨던 숙의 정씨와 엄씨를 폐비 윤씨 폐출 혐의로 단칼에 베어 버리고 이복동생들을 귀양 보내 사사시켜버린 형 연산군이 자기를 죽이기 위하여 군사를 보낸 것으로 받아들였다.

진성대군은 죽음의 공포에 떨었다.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거병한 군사들이 자신을 옹립하려 하려한다는 뜬소문이 도성에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그 소문을 자신도 들었는데 만약 형 연산의 귀에 들어간다면 자기는 살아남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형이 보낸 군사들이 자기를 잡으러 오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의 군사는 그와 정반대다. 중종반정을 일으킨 박원종이 진성대군을 보호하기 위하여 보낸 군사들이었다. 날이 밝자 반정군은 진성대군을 경복궁으로 모셔갔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곤룡포를 입혀주고 익선관을 씌어주며 용상으로 밀어 올렸다. 그리고 임금님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지만 현실이었다.

▲ 경복궁 교태전.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이하다
ⓒ 이정근

경복궁 교태전. 임금의 부인 왕비가 잠자는 침전이다. 하늘의 천기를 받아 왕자를 생산해야 하기에 용마루가 없는 특이한 구조다. 어느 날 갑자기 왕이 되고 왕비가 된 진성대군과 부인 신씨가 즉위식을 마치고 궁 안에서 첫날밤을 맞이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습니다. 부인.”
“저 역시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것이 슬플 따름입니다.”

그랬다. 부인 신씨는 왕비가 되었다는 기쁨을 느낄 겨를도 없이 아버지가 죽었다는 슬픔에 울어야 했다. 하지만 구중궁궐 교태전에서 왕비가 통곡한다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므로 속으로 슬픔을 삼켜야 했다. 급격한 사태 변화에 자신도 어찌할 바를 모르던 진성대군이 그래도 신랑이라고 부인의 어깨를 감싸며 위로해줬다. 이 때 그의 나이 18세였다.

부인 신씨의 아버지 신수근은 반정군에 의하여 무참히 살해되었다. 연산군 치하에서 벼슬을 했다는 이유였지만 괘씸죄에 걸려 박원종의 살생부에 올랐다. 무혈입성을 노린 반정군의 우두머리 박원종이 신수근을 찾아가 반정에 가담할 것을 요청했지만 신수근은 신하가 두 임금을 모실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기밀유지에 불안을 느낀 반정군은 서둘러 거사하여 반정을 성공시켰던 것이다.

▲ 연산군 묘.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있다
ⓒ 이정근

“왕관도 싫고 구중궁궐도 싫소이다. 사저에 나가 살고 싶소.”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던 진성대군의 이 말은 진심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삶과 죽음이 갈리고 임금이 바뀌는 세상이 무서웠다. 자신이 용상에 앉아있는 왕이지만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개 상황이었다. 이로부터 딱 7일 후.

“지금 신수근의 친딸이 대내에 있습니다. 만약 궁곤(宮壼)으로 삼는다면 인심이 불안해지고 인심이 불안해지면 종사에 관계됨이 있으니 은정을 끊어 밖으로 내치소서.”(중종실록1년9월9일)

요화 장녹수를 참살하고 연산군을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 보내는 등 폐주 뒤처리를 대충 끝낸 반정군은 그들이 옹립한 임금(진성대군)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임금의 목숨도 보장할 수 없다는 듯 살기등등한 기세다.

“아뢰는 바가 심히 마땅하지만 그러나 조강지처인데 어찌하랴?”
힘없는 임금의 대답이다. 신하들의 주청을 물리치려는 자신의 결연한 의지라곤 찾아 볼 수 없다. 자력으로 용상에 오르지 못하고 반정군에 옹립된 군주의 서글픔이다.

“머뭇거리지 마시고 쾌히 결단하소서.”
유순, 김수동, 유자광,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김감, 이손, 권균, 한사문, 송일, 박건, 신준, 정미수 등이 합사하여 소를 올리고 육조 참판 등이 떼지어 들고 일어났다. 이것은 결단을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한 사람을 몰아세우는 협박이다.

▲ 중종의 정릉.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다
ⓒ 이정근

“오늘 저녁에 옮겨 나가게 하리다.”
임금이 신하들에게 백기투항하고 말았다. 조강지처를 내치라는데 딱 부러지게 거절은커녕 저항 한번 제대로 못하고 항복하고 말았다. 이날 저녁 부인 신씨는 경복궁 건춘문을 나와 하성위 정현조의 집으로 향하였다.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이었다. 꽃가마 타고 시집가던 열 두 살 어린 신부는 나이 칠십이 되어 땅에 묻힐 때 까지 신랑을 다시는 만나보지 못했다.

부인 신씨는 중종반정으로 아버지를 잃었지만 왕비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7일 만에 중전자리는 물론 신랑마저 잃고 사가로 쫓겨났다. 7일 천하가 아니라 7일 중전 노릇이다. 급격한 위상변화는 열아홉 어린 나이 부인 신씨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이었다.

제일 어려운 고통은 사랑하는 사람, 신랑 역(懌, 중종의 휘)이 보고 싶은데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미움도 없이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지만 생이별은 현실이었다. 잠 못 이루는 밤이 계속되었다.

▲ 온릉. 단경왕후가 잠들어 있는 곳으로 경기도 양주 일영에 있다
ⓒ 이정근

“서방님!”
신랑을 서방님이라고 불러본 기억이 없다. 임금을 서방님이라 부르는 것은 불경이고 군신간에 불충이다. 법도에 어긋나지만 여자의 한 사람으로 그렇게 불러보고 싶었다. 부인 신씨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열두 살 어린나이에 혼례를 올렸으나 신랑을 신랑이라 부르지 못하고 대군 저하라 불렀다. 며칠 전엔 단 7일간 상감마마라 불렀다. 모두가 지아비로서 신랑을 부른 것이 아니라 허상을 부른 것만 같았다. 이제야 비로소 자신도 대감의 딸이라는 거추장스러운 덧개를 벗어 던지고 신랑을 서방님이라 불러보고 싶었다.

성종 임금의 아들이라는 허울을 벗어버린 그를 사랑하고 싶었다. 연산군의 동생이라는 엉겁을 벗어던진 그를 사랑하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현재 임금이라는 껍데기를 뒤집어 쓴 그를 자연인으로 사랑하고 싶었다. 한 여자에게 하늘이 맺어준 사나이를 배필로서 사랑하고 싶었다. 한 여자가 한 남자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사랑하고 싶었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부인 신씨는 신랑이 보고 싶으면 인왕산에 올라 경복궁을 내려다보며 입고 있던 치마를 벗어 흔들었다. 신랑과 함께 궁에 있을 때 입었던 붉은색 치마다. 신랑도 자신을 보고 있으리라 믿고 싶었다. 치마를 흔들며 내려다보니 경회루를 산책하는 사람이 아스라이 보인다. 신랑인 것만 같다. 이쪽을 보고 손을 흔드는 것만 같다.

▲ 온릉 정자각 가는 길. 중종과 단경왕후의 사랑을 말해주듯이 어도에 깔린 돌이 두 조각으로 갈라져 있다.
ⓒ 이정근

“서바앙님!!”
목이 메인다. 목이 터져라 불러보지만 대답이 없다. 붉은색 치마는 바람에 휘날린다.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인왕산 능선을 타고 흐른다.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을 부르며 슬픔이 강물처럼 밀려온다.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서러움이 눈물이 되어 두 뺨에 흘러내린다. 서러움에 목이 메어 다시 불러본다. “서방님!” 하지만 두 눈에 눈물이 흐를 뿐 대답이 없다. 이대로 그냥 망부석이 되고 싶다. 훗날, 사람들은 부인 신씨가 치마를 흔들었던 곳을 치마바위라 불렀다.

남자의 첫사랑은 바람이고 여자의 첫사랑은 영혼이련가? 이후 중종은 계비 장경왕후에게 새장가 드는 것을 시발로 경빈박씨, 희빈홍씨, 창빈안씨 등 부인 10명을 맞아들이고 수많은 후궁의 치마폭에서 날이 새고 밤이 샜다.

궁에서 쫓겨난 단경왕후는 하성위 정현조 집과 친척들의 집을 전전하다 나이 70에 한 많은 생을 마감하고 양주 일영에 잠들어 있다. 오늘도 찾는 이 없는 온릉에 낙엽이 흩날리고 찬바람이 스산하다. 단경왕후는 지금도 정이 고프고 옆구리가 시리다고 말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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