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 둥 둥 1고(鼓)의 북소리도 한참 지났으니 2고(밤 9∼11시)쯤 되었을까. 백악을 휘감아 내려오는 북풍을 등에 업고 관복자락을 휘날리며 신무문 모퉁이를 돌아 남쪽으로 내려오는 무리가 있었다. "문을 열어라!" 영추문에 멈춘 한 떼의 무리들이 문루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화들짝 놀란 수직 군졸들이 문루에서 내려다보니 어둠에 잘 보이지 않지만 복색으로 보아 범상치 않은 사람들임엔 틀림없었다. 하지만 여기가 어디 저잣거리 김서방네 집인가? 임금이 계신 궁성이 아닌가? 이 야심한 밤에 아무에게나 대궐의 문을 열어주었다가는 목이 열 개라도 부족하지 않는가. 그 무렵, 어둠 속에서 경회루를 지나 영추문 쪽으로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문밖에서는 한 무리의 사내들이 "문을 열어라"하고 고함치며 호령이고, 궐내에선 신분을 알 수 없는 사나이가 양팔을 휘저으며 뛰어오고 있으니 무슨 변고임은 틀림없다. 군졸 3명을 거느리고 영추문을 파수하던 수문장은 아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루 아래에 도착한 사람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임금의 침소 강녕전에 시종하는 환관이었다. 야심한 밤에 문을 열어주라니 괴이한 일이다. 하지만 어명이라지 않은가. 더구나 명을 전하는 환관은 임금의 총애를 받고 있는 희빈 홍씨의 심복이지 않은가. 명을 어겼다간 목이 달아날 수밖에 없다. 기별청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것도 없다. 승정원으로부터 하명을 받은 바도 없다. 그런데 문을 열어 주라니 진퇴양난이다. 하지만 지엄하신 왕명이라니 거역할 수 없잖은가. 수문장은 위난으로부터 목숨 걸고 지켜야 할 대궐의 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토록 지휘계통의 뒤틀림에서 역사는 잉태한다.
광화문과 영추문을 수직하는 군졸들의 소속은 병조였으나 간섭하고 통제하는 곳이 많아 피곤하기 이를 데 없는 곳이었다. 오위 산하 대호군 군졸들 모두가 야간에 궁성 수문직을 마뜩찮게 생각했다. 도성에 일고가 울려 퍼지는 저녁 7시가 되면 도성의 4대 문은 물론 궁성의 4대 문이 닫혔다. 파루가 울리는 새벽 5시까지 무료하기 짝이 없는 수문직이었다. 오늘 밤에도 밤하늘을 바라보며 뜨뜻한 아랫목에 누워있을 마누라 생각에 별을 해이려는 참이었다.
경복궁에는 4개의 대문이 있다. 동에는 건춘문, 서에는 영추문, 남에는 광화문, 북에는 신무문이다. 이 중에서 사림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승정원의 통제를 받지 않은 곳이 신무문이다. 궁성의 북쪽에 있는 문으로서 궐내에 들어가는 생활용품과 임금이 비밀리에 드나드는 문이다. 또 궁중의 여인들이 남의 눈을 피하여 드나들거나 죽어서 나가는 문이었다.
도성의 통행금지를 알리는 1고가 울리는 북소리를 신호로 그들이 신무문을 통과하여 중종임금을 알현했을 때 왕은 좌단으로 화답했다. 좌단이란 임금이 입고 있던 웃옷의 왼쪽을 살짝 드러냄으로 신하의 주청을 받아들인다는 묵시적인 응답이다. 신무문은 반역의 역사와 음습한 권력투쟁과 깊은 관계가 있다. 10·26 후 권력 공백기를 틈타 야심을 품은 군부세력이 뻔질나게 드나들던 문이다. 경복궁에 주둔하고 있던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 부대를 근거지 삼아 정권을 접수했던 신군부세력이 이용했던 문이 신무문이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근정전 쪽으로 향했다. 근정전 아래 좌우로 시립해 있는 푸른 군복의 오위 군졸들을 발견했을 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청색 군복의 대호군은 병조참지 휘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을 밀어 제치고 경연청으로 나아가니 합문 안팎에는 환하게 등불이 켜져 있었다. 그 불빛에 관복을 입은 얼굴들이 보였다. 병조판서 이장곤, 판중추부사 김전, 호조판서 김형산, 화천군 심정, 병조참지 성운이었다. "공들은 어찌하여 이 야심한 밤에 여기에 오셨습니까?" 궐내의 야간 일을 총책임지고 있는 승정원 승지 윤자임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힐난하듯 큰소리로 물었다.
"대내에서 표신으로 부르셨기에 왔소." "당신이 승지가 되었으니 곧 들어가 전교를 받아 오시오."
병조참지의 영향권 아래 있는 푸른 군복의 대호군이 시립한 것으로 보아 대세가 기울었음을 직감한 윤자임이 마지막 저항을 했다. 앉아있던 성운이 벌떡 일어나 들어가려 하자 주서 안정을 시켜 막아서도록 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윤자임과 안정의 제지를 뿌리치고 합문으로 들어간 성운이 잠시 후에 종이쪽지 하나를 가지고 나와 임금의 전교라며 읽어내려 갔다. "이 사람들을 의금부에 하옥하라. 승정원(承政院) 승지 윤자임, 공서린, 주서(注書) 안정, 한림(翰林) 이구, 홍문관(弘文館) 응교 기준, 부수찬(副修撰) 심달원, 우참찬(右參贊) 이자, 형조 판서(刑曹判書) 김정, 대사헌(大司憲) 조광조, 부제학(副提學) 김구, 대사성(大司成) 김식, 도승지(都承旨) 유인숙, 좌부승지(左副承旨) 박세희, 우부승지(右副承旨) 홍언필, 동부승지(同副承旨) 박훈." <중종실록> 1519년 11월 15일. 조광조를 제거하기 위한 친위쿠데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정변의 서곡이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역시 역사는 밤에 이루어졌다. 후세의 사가들은 이를 '기묘사화'라 기록했고, '신무의 난'이라 불렀다. 그뿐만 아니라 백성들은 홍경주, 남곤, 심정을 '신묘삼간'(辛卯三奸)이라 조롱했다.
"임금이 편전(便殿)에서 홍경주, 남곤, 김전, 정광필을 비밀리에 불렀고 이장곤, 안당(安瑭)은 뒤에 있는데, 조광조(趙光祖) 등을 조옥(詔獄, 전옥서 감옥)에 내릴 것을 의논하였다." <승정원일기> 역사를 기록해야 할 사관들마저 쿠데타 세력과 방어 세력으로 갈렸으니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의논하였다'는 것과 '하옥하라'는 전교와는 하늘과 땅 차이다. 병조참지 성운이 가지고 나와 읽었다는 종이쪽지는 임금의 재가를 받지 않은 허위 문서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전교라 읽혀지면 왕명이 되고, 실패하면 역적이 되며, 실현되면 기정사실화한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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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사상가 조광조, 유배 길에 오르다
죄목도 모르고 귀양 떠난 조광조
@IMG1@조광조가 귀양살이 했던 집과 똑같은 초가집(남양주 종합촬영소)
친위쿠데타가 일어난 이틀 후. 1519년. 11월 17일. 조광조는 전라도 능주로 가는 귀양길에 올랐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대사헌을 죄주는 것은 성은에 어긋난다는 충신들의 직언도 무위로 끝났다. 수많은 성균관 유생과 백성들의 함성도 소용이 없었다. 참형에 처해야 마땅하나 경연에 드나들며 시종했던 신하이기에 많이 봐줘서 유배형을 내렸다는 임금의 은총이다.
“너희들은 시종(侍從)하는 신하로서 인물이 어질지 않다고 할 수 없으나 근래 모든 일에 과격하여 평상(平常)하지 못하게 하므로 조정의 일이 많이 그르쳐졌다. 너희들의 죄를 율(律)대로 결단한다면 여기서 그칠 것이 아니나, 감(減)하여 죄주는 것이다, 여느 죄수라면 이런 분부를 하지 않을 것이다.
조광조 등의 죄는 조율(照律)로 보면 과연 사사(賜死)해야 하겠으나 깊이 생각하고 또 대신의 말을 반복해서 생각하니 사사하면 놀랄 듯하다. 조광조 등 4인은 감사(減死)하여 고신(告身)을 진탈(盡奪)하고 장 1백(杖一百)에 처하여 원방(遠方)에 안치(安置)하라. 윤자임(尹自任)등 4인은 고신을 진탈하고 장 1백을 속(贖)하고, 외방(外方)에 부처(付處)하라.”(중종실록)
의금부 감옥을 떠나던 날 의금부 당상이 읽어 내린 임금의 교지다. 어떠한 죄를 지어서 벌을 준다는 죄명도 없다. 그저 과격해서 죄준다는 두루뭉술한 내용이다. 무릎 꿇고 임금의 교지를 듣는 순간 조광조의 얼굴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회한의 눈물도 아니고 참회의 눈물도 아니었다. 임금과 면대할 수 있는 기회상실의 눈물이었다.
임금을 설득할 자신이 있었지만 얼굴도 못보고 귀양 떠나는 조광조
조광조는 토론의 달인이었다. 경서와 성리학과 도학으로 완전무장한 그의 논리에 당할 자가 없었다. 조광조는 임금과 면대하면 임금을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훈구세력은 이러한 그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대면 기회를 철저하게 차단했다. 임금이 친히 문초하는 친국을 그토록 원했지만 이루어 지지 않았다. 이대로 떠난다니 한이 맺힐 것만 같았다. 허나, 이제는 지나간 일. 떠나야 한다.
훈구세력의 계획은 치밀했고 표적은 적중했다. 승승장구하던 신진사류는 한방에 갔다. 정점에 있던 조광조가 하옥되자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와해됐다. 왜 그랬을까? 친위쿠데타를 기획하고 연출한 화천군 심정은 판세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또한 칼자루를 쥐고 있는 임금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하지만 대척점에 있던 조광조는 낙관적인 안목으로 앞만 보고 있었다. 2년 전. 사헌부 대문에 화살이 날아와 꽃인 일이 있었다. 올해 정월에 사정전 정원에 화살이 날아왔고 2월에는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에 꽃혔다. 수구세력의 동태를 예의주시하고 대책을 세워야 했지만 조광조는 무시했다. 군자가 가는 길엔 문이 없고 소인배들의 협잡에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IMG2@숭례문
조광조를 태운 함거가 숭례문을 빠져나오자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하나같이 안타까운 눈빛이다. 그 눈빛에는 신무삼간에 대한 증오의 눈빛도 섞여 있었다. 방책을 두른 함거에 손을 넣어 조광조의 손을 만져 보려고 소동이 빚어졌다. 그래도 의금부 군졸들이 심하게 다루지 않았다. 청파역에서 길라잡이를 앞세운 의금부 군졸들은 걸음을 재촉했다.
그 당시 한양외곽에는 삼남지방으로 가는 청파역과 관북지방으로 가는 송우역이 중앙역 구실을 했다. 역에는 말 타고 달리는 파발과 걸어서 움직이는 보발이 있었다. 지역 지리에 익숙한 이들이 안내자 역할을 했다. 유배행렬은 죄인을 태운 함거와 함께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보발이 나섰다.
한강을 건너는 거룻배에서 북쪽을 바라보니 궁성과 함께 삼각산이 눈에 들어왔다. 청운의 꿈을 안고 한양에 입성할 때 높고 푸르기만 하던 삼각산이 초라하다. 강물을 바라보니 한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산천은 의구하건만 자신만 변한 것 같았다. 알성시에 나아가 임금의 마음을 흔들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죄인이라니 도대체 믿어지지 않았다.
잘 다스려진 인간세계를 추구했던 조광조
나루터를 떠난 거룻배가 강 한복판을 통과하고 있었다. 물이 멈춰 있는 듯 보이지만 강물은 흐르고 있었다. 흐르는 물이 무서웠던지 수레를 끌고 가는 소가 두 눈을 껌벅이며 조광조를 쳐다본다. ‘나는 무서워 죽겠는데 대감은 무섭지 않느냐?’는 눈빛이다. 조광조의 입가에 비치던 웃음이 강바람에 날아간다. 함거에 홀로 앉은 조광조는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이 많은 물들도 출발은 각기 달랐겠지? 금강산에 떨어진 빗방울, 여주, 이천 평야를 적시고 흘러내린 물, 용문산 골짜기에서 졸졸거리던 물. 하지만 뭉쳐서 한곳으로 흘러가고 있지 않은가? 이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맞아, 빗방울이 강을 만나 물답게 잘 다스려졌기 때문이겠지. 지금 흐르고 있는 이 물은 천방지축으로 뛰던 빗방울이 아니고 잘 다스려진 물이야.’
임금도 인간이고 백성도 인간이기에 ‘잘 다스려진 인간세계’를 지향하는 지치주의로 가자고 굳게 다짐했던 임금이 야속했다. ‘지금 이 순간 임금은 잘 다스려진 인간세계의 인간일까? 지금 이 순간 나 조광조는 잘 다스려진 인간세계의 인간일까?’ 곰곰이 생각할수록 회의가 들었다.
@IMG3@조광조가 어릴 때 뛰어놀던 고향마을에 있는 수령 500년의 느티나무(용인)
뱃전에 부딪치는 물결을 바라보며 다짐했다. “꼭 다시 돌아올 테다. 잘있거라 삼각산아! 다시보마 한강수야”하지만 다시 돌아오는 것은 다음 문제고 자신이 왜 죄인이 되어 귀양살이 떠나는지를 알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답답하기만 했다.
남태령 고개를 힘겹게 오르던 유배행렬이 정상에서 잠시 멈췄다. 수레를 끌고 가는 소도 쉬어야 하고 호송하는 군졸들도 휴식시간을 갖기 위해서다. 관악산 줄기가 뻗어 내린 남태령 정상에서 바라보니 삼각산이 아스라이 시야에 잡힌다. ‘이제 여기를 출발하면 한양은 보이지 않겠지’ 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져 왔다.
유배지까지 조광조 호송책임을 맡은 의금부 당상이나 군졸들이 조광조에게 심하게 굴지 않았다. 그들도 조광조가 억울하게 귀양 간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죄인이지만 유배가 풀려 복직되면 하늘같은 대감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쿠데타의 전모를 알려주었지만 끝까지 임금을 믿고 싶었던 조광조
과천을 지날 무렵 유배행렬을 숨 가쁘게 뒤쫓아 오는 젊은이가 있었다. 신상과 유운이 보낸 유생이었다. 조광조를 존경하는 선비의 입장에서 조광조가 아무런 전후 사정도 모르고 귀양가는 것이 너무 가슴 아팠다. 함거에 도착한 유생이 품속에 간직하고 있던 두루마리를 꺼내어 조광조에게 전했다.
‘남곤, 홍경주, 심정(沈貞) 등이 남곤의 집에서 회의하여 먼저 참설(讖說)로 임금의 마음을 요동하고 거사하던 날 저녁에는 신무문(神武門)으로 들어가 임금을 추자정(楸子亭)에 모시어 의논하고 의논이 끝나고서 도로 나와 연추문(延秋門)으로 들어가 합문(閤門) 밖에서 대신들을 불러 그 이름을 열서(列書)하여 마치 조정에서 죄주기를 청해서 죄를 준 양으로 하였다.’
서찰을 읽어본 조광조는 입가에 웃음을 지으며 “임금께서 어찌 그렇게 하려 하셨겠는가? 조금도 의심할 것이 없다.” 조광조는 끝가지 임금을 믿고 싶었다. 그렇지만 친위쿠데타가 일어났던 그날 밤. 짐작은 했지만 이제야 밑그림이 그려지는 것이다. “천하의 소인배들 같으니라구...” 신무삼간을 두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IMG4@조광조 선영 묘역(용인)
과천을 지난 귀양행렬이 죽전 사거리에 도착했다. 이곳은 조광조의 고향이나 다름없었다. 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기에서 10리만 가면 조상이 잠들어 있는 선영이다. 부친이 돌아가셨을 때 분묘에 시묘하며 3년을 보냈던 상현리가 지척이다. 그렇지만 고개를 들고 그쪽을 바라볼 면목이 없었다.
의금부 당상이 선영에 참배하고 가라고 권했지만 조광조는 사양했다. 죄인의 몸으로 조상을 뵈올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지금은 수레에 실려 가는 몸이지만 가마타고 돌아오는 길에는 꼭 찾아뵙겠노라고.
조광조가 죄를 받아 귀양 간다는 한양소식이 전국에 퍼졌을까. 유배행렬이 천안을 통과 할 때에는 영남의 유림들이 몰려와 함거를 가로 막고 대성통곡했다.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함거에 앉아있던 조광조는 오히려 이들을 위로했다. 조광조를 태운 함거가 지나는 길목마다 그 고을 관원들과 유림들이 몰려나와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하늘이 요동하는 천재지변에 백성들의 민심은 흉흉하고
공주를 지나 금강을 건넜다. 난생처음 전라도 땅에 들어간 것이다. 조정의 신하들이 훈조십요를 들먹이며 그렇게도 경원했던 전라도 땅에 들어와 보니 너무나 평화로웠다. 산은 온순해 보였고 들판은 양순해 보였다. 조광조의 마음은 착잡했다. 고개를 들어 임금이 있는 북쪽을 쳐다봤다. 그곳이 오히려 간신이 우글거리는 역신의 땅인 것 만 같았다.
조광조의 귀양행렬은 남행을 계속했다. 여산, 삼례를 지나 순창에 이르렀을 때였다. 전라도에 천재지변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조광조가 잡혀가던 날. 남원과 화순동복 그리고 해남에서 태양이 하얗게 보이는 변이 일어났으며 어제는 장흥에 큰 눈이 내리고 함평에는 매실만한 우박이 내렸다는 것이다. 뿐만이 아니라 구례에선 지진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가뭄이 들면 임금이 사직단에 나아가 기우제를 드리던 그 시절. 천재지변의 여파와 원망은 모두 임금에게 쏠렸다. “임금이 죄 없는 사람을 죄주어서 그런다” “간신들을 벌주려고 하늘이 움직였다” “간신들에게 불벼락이 떨어질 것이다” 백성들의 민심은 흉흉했다. 조정에서도 어전회의를 가졌지만 별무대책이었다. 이때 회의에 참석한 신무삼간에게 “너 떨고 있지?”라고 누가 물었다면 “네”라고 답했을 것이다.
@IMG5@조광조가 사사 당했던 곳에 복원한 애우당 입구(능주)
담양을 지나 화순 너릿재에 도착했다. 이제 이 고개를 넘으면 조광조가 귀양살이해야 할 화순 땅이고 조금만 더 가면 능주다. 고갯마루에서 광주 쪽을 내려다 봤다. 금방이라도 흙먼지를 일으키며 한 필의 말이 달려올 것만 같았다. 유배를 거둔다는 임금의 전지를 가슴에 품고 달려오는 사람이 있을 것만 같았다. 허나, 일행이 휴식을 끝내고 출발 할 때까지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한양에서 유배지 능주까지 750여리. 한양을 출발한 유배행렬이 10일 만에 능주에 도착했다. 지리산과 백아산 그리고 무등산으로 연결된 용암산이 멀리 우뚝 서있다. 능주 평야를 적시는 지석강 물에 비치는 산 그림자가 아름다운 연주산이 병풍처럼 펼쳐진 아담한 고을이다. 소식이 먼저 전해졌는지 능주 관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한양에서 죄인을 호송한 의금부 군졸들은 능주 관원들에게 죄인을 인계하고 돌아가면 그만이다.
그 무리에 섞여 양팽손도 있었다. 오늘날까지 절조와 의리의 사나이로 칭송받고 있는 사나이다. 나이는 비록 조광조가 위지만 나란히 사마시에 응시하여 조광조는 진사시에 양팽손은 생원시에 장원급제했다. 조광조가 앞서가면 뒤따라가던 각별한 사이다. 양팽손이 지난 3월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향리에 있다가 조광조가 자신의 향리로 귀양 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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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성(綾城) 밖 외딴곳에 위치한 초가삼간. 유배생활도 20여일이 지났으니 조금은 익숙해질 때도 되었지만 구차스러운 오두막 살이다. 다 헤진 문풍지에 황소바람이 드나들고 방안에 걸레가 꽁꽁 얼어 버린다. 동지를 넘긴 추위가 여간 매섭지 않다.
한양에서 내려온 금부도사가 사립문을 밀치며 큰소리로 외쳤다. 방안에서 책장을 넘기던 조광조는 용수철처럼 마당으로 튀어나갔다. 유배를 거둔다는 희소식이라도 가져온 걸까? 아니면? 많은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친다. 이것도 잠시, 임금의 명을 받들어 한양에서 내려온 금부도사 유엄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싸늘한 냉기가 흘렀다. "조광조는 사사(賜死)하고 김정, 김식, 김구는 절도(絶島)에 안치하고 윤자임, 기준, 박세희, 박훈은 극변(極邊)에 안치하라." 눈발위에 무릎 꿇고 유엄의 목소리를 잠자코 듣던 조광조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사약이라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억장이 무너지는 듯 했다. 이른 아침 까치가 울어대어 좋은 소식이라도 있으려니 했는데 사약이라니 청천벽력과 같은 날벼락이었다.
조광조를 죽여 없애지 않고서는 편하게 잠들 날이 없을 것 같았다. 모사꾼 심정이 최후의 카드를 꺼냈다. 능주에 귀양가있는 조광조를 현지에서 죽여 없애자는 것이다. 기획안은 이렇다. 의금부 감옥에서 심문 받을 때 불손했던 점을 반복적으로 고변하여 임금을 흔들고 후궁을 동원하여 베갯머리 속살거림으로 임금을 공략하자는 양동작전이었다. "첩이 왕후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려는 것은 법도에 어긋난다." 조광조가 시강관 시절 이 말을 임금에게 했다는 소리가 전해지자 경빈 박씨가 눈에 불을 켜고 날뛰기 시작했다. 임금의 총애를 받기위하여 어리고 고운 희빈 홍씨와 각축전을 벌이던 경빈 박씨의 가슴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 되었다. 더구나 조광조가 살아 돌아온다면 후궁들은 모두 궁에서 쫓겨날 것이라는 심정의 꼬드김에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왕정쿠데타로 조광조가 의금부 감옥에 갇히던 날. 심문관 병조판서 이장곤과 홍숙이 문초할 때 반말을 지껄이며 이들을 조롱했다는 보고를 받은 임금은 진노했다. 기고만장한 이들 신진사류의 행동은 불쾌를 넘어 국법을 문란케 하고 임금 자신을 능멸하는 것으로 받아 들였다. 모사꾼 심정의 선택은 절묘했고 약발은 즉각 나타났다. 조광조의 유배를 거두고 사사하라는 명이 떨어진 것이다.
고개를 떨어뜨린 조광조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평화스러운 고을 능주에 어명으로 포장된 살육의 장이 마련되었다. 조광조가 붕당죄로 의금부 감옥에 하옥 된지 딱 한 달. 능주에 유배 된지 20일 만에 조광조를 사사하라는 어명이 떨어졌고 오늘이 그 명을 집행하는 날이다. "사사의 명만 있고 사사의 글은 없소?" 조광조의 항변에 금부도사 유엄이 쪽지 하나를 보여줬다. "내가 전에 대부(大夫) 줄에 있다가 이제 사사받게 되었는데 어찌 다만 쪽지를 만들어 도사에게 부쳐서 신표로 삼아 죽이게 하겠소?" 조광조의 뜻은, 임금이 모르는 일인데 조광조를 미워하는 자가 중간에서 마음대로 만든 일이 아닌가 의심한 것이다. "죄인은 무엄하게도 어명을 따지려 드는 것이오?" "도사를 불신한 것이 아니오니 너무 노여워 마오. 그래 지금 정승에는 누가 있고 심정은 어느 벼슬에 있소?" "남곤 대감이 영상에 계시고 금부당상은 심정대감이시오" "그렇다면 내 죽음은 틀림없소." 조광조는 체념했다. 그들이 조정을 장악하고 있다면 자신의 죽음은 불을 보듯 뻔했다. 모든 것을 단념한 조광조는 고개를 들어 먼 산을 바라보았다. 연주산에 걸쳐있던 흰 구름이 날개가 되어 흘러간다. "조정에서 우리를 어떻게 말하오?" "왕망(王莽)의 일에 비해서 말하는 것 같습니다." 조광조의 입가에 서리던 웃음이 바람에 날려간다. 자신을 천하의 간웅 왕망에 비한다니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왕망을 입술에 올리는 자들이 오히려 왕망이로다. 조광조의 눈이 빛났다. "왕망은 사사로운 일을 위해서 한 자요. 군자가 대의를 쫒다 죽음을 받았소만 죽으라는 명이 계신데도 한참 동안 지체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 아니겠소? 그러나 오늘 안으로만 죽으면 되지 않겠소? 내가 글을 써서 집에 보내려 하며 분부해서 조처할 일도 있으니 마무리가 끝나고 나서 죽는 것이 어떻겠소?" 머뭇거리던 금부도사 유엄이 허락하였다.
白日臨下土 昭昭照丹衷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 근심하기를 집안 근심하듯 하였노라 밝은 해가 아래 세상 내려다보고 있나니 가이 없는 이내 충정 길이길이 비추리라 쌓인 눈 위에 하얀 종이가 펼쳐지고 먹을 머금은 붓이 빠르게 지나간다. 먹 선이 가는 곳에 조광조의 마음이 그려졌다. 검은 먹 점이 글씨가 된 형체위에 하얀 눈발이 날린다. 붓 끝에 조광조의 염원과 회포가 알알이 맺혔다. 붓을 놓은 조광조는 북쪽 하늘을 쳐다봤다. 심호흡을 하는 조광조의 눈꺼풀이 가볍게 떨렸다.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글. 이것이 진정 죽음을 앞둔 절명시다. "내가 죽거든 관을 얇게 만들고 두껍게 하지 말아라. 먼 길을 가기 어렵다." 조광조는 시중을 들던 사람들에게 일렀다. "내가 네 집에 묵었으므로 마침내 보답하려 했으나 보답은 못하고 도리어 너에게 흉변(凶變)을 보이고 네 집을 더럽히니 죽어도 한이 남는다." 말을 마친 조광조는 임금이 계신 북쪽을 향하여 4배를 드렸다. 마지막 순간까지 군신의 예를 다한 것이다. 그리고 유엄으로부터 사약을 받아 든 조광조는 단숨에 들이켰다. 독기(毒氣)와 주기(酒氣)가 온 몸으로 퍼져 나간다.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무릎이 꺾인다. 엄습해 오는 통증과 환각이 구름 위를 나는 것만 같았다. 이때였다. 혼미한 정신 속에서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임금이었다. |
@IMG1@품계석. 경복궁
개혁 정치가 조광조를 논고 한다
조광조를 내친 중종 임금을 위한 변명
조광조와 중종 임금과의 인연은 조광조의 나이 서른넷. 1515년에 치러진 알성시에서다. 임금이 직접 성균관에 거동하여 출제한 ‘공자의 3년 정국구상을 논하라’ 는 문제에 ‘춘부’라는 답안지로 장원 급제를 따면서 부터다.
알성시가 있기 5년 전, 조광조는 이미 사마시에 장원급제하여 중앙정계에 진출해 있었다. 이조판서 안당의 천거로 조지서의 사지가 되었지만 가슴에 품은 뜻을 펼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행정직이었기 때문이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중앙정부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근무 중 사법시험에 합격한 것과 비슷한 모양새다.
임금의 마음을 흔들어버린 조광조의 답안지
‘하늘과 사람은 그 근본 됨이 하나입니다. 하여, 하늘이 사람에 대하여 도리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고로 임금과 백성은 하나입니다. 상고하건데 이상적인 임금들이 백성들에게 도리에 맞지 않은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춘부春賦)
이어지는 조광조의 답안지는 임금의 마음을 흔들었고 임금은 신선한 현기증을 느꼈다. 공자사상을 하늘과 사람으로 축약한 조광조의 논리는 가슴 뭉클한 충격이었다. 등극한지 10년차. 이제야 인재를 만난 기쁨으로 충만 되었다. 그랬던 임금으로부터 불과 4년 만에 사약을 받고 조광조가 죽어가고 있다. 누가 도리에 어긋났는지 따지는 것은 사치스러운 환경이다.
“학문이 깊고 훌륭한 문장이로다”
조광조의 뇌리에 입력된 그때 그 임금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전적, 예조 좌랑을 시작으로 홍문관 교리, 부제학, 대사헌에 이르는 승자를 뛰어넘는 쾌속 승진을 밀어주고 끌어주던 임금으로부터 사약을 받고 피를 토하며 이승과 저승을 오가며 고통에 몸부림치며 헤매고 있는데 그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IMG2@정암 조선생 적려유허추모비(능주).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송준길이 비문을 쓰고
민유증이 전서를 써 현종 8년(1667년)에 세워졌다.
“야, 조광조! 임마 정신 차려. 대낮에 뭐하는 짓이야? 너 술 마셨어?”
“예? 예. 술? 조금 마셨슴다. 술은 술인데 독을 탄 술을 마셨습니다. 상감마마께서 내리신 독배를 말입니다. 전하께서 죽어라고 내리셨으니 마시고 죽어야지요. 근데, 댁은 뉘시온지?”
금부도사가 한양에서 가지고 내려온 비상은 독약이었다. 비소에 부자와 게의 알을 으깨어 꿀에 뭉치고 제련하지 않은 황금가루와 독극물을 넣어 만든 환을 소주에 풀어 마시는 것이 사약이다.
“나야 나. 임금이라구”
“예? 상감마마라굽쇼?”
“그래, 니가 어버이 같다고 생각하는 왕이야.”
“전하께옵서 어인 일 이시옵니까?”
“야, 야, 상감이고 나발이고 거리적 거리니까 때려치우고 우리 말 놓자. 너 지금 몇 살이냐?”
“서른일곱 입니다.”
“82년생이구나? 내가 87년생이니까 나보다 다섯 살이 많은 형뻘 되지만 객지 벗 10년이면 맞먹기도 한다는데 지금까지 군신관계도 있고 그러니 그냥 말 놓고 지내자. 너 언젠가 계급장 떼고 맞장 뜨자고 그랬잖아?”
“아니, 제가 언제 그런 불충의 말씀을?”
“네가 경연관으로 있을 때, 너를 따르는 시강관 한충을 통해서 이렇게 말했잖아. ‘경연에 나올 때는 교의에 앉지 말고 평좌하자구. 그게 뭐니? 맞장 뜨자는 게 아니고?”(11/11/16)
아련히 기억이 난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지 말고 마루에 방석 깔고 앉아 치열하게 토론하자던 3년 전의 일이.
“내가 용상에 앉아있고 싶어서 앉아 있는 줄 아니? 백성들이 그런다며? 복도 많은 놈이라고? 생각지도 않았던 왕 자리가 굴러들어 오고 여복이 터졌으니 그렇게 비웃을 만해, 인정한다, 인정해. 그렇지만 말이야 어느 날 갑자기 떠밀려 올라가 마지못해 그 자리에 앉아있는데 내려오고 싶어도 내 마음대로 못 내려 온다구. 너 내 심정 알기나 해?”
“글구 날더러 여색을 삼가 하라고? 그래 좋다. 네 눈에는 내가 여색을 좋아하는 놈으로 보이나 본데 너도 알다시피 공신들 옵션에 걸려 후궁들 치마폭에 파묻혀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잖냐?
너는 입버릇처럼 18세에 결혼한 조강지처 하나만을 사랑한다고 자랑하는데, 부럽고 존경한다. 나도 본처하고 평생을 같이 하고 싶었지만 연산군의 뭐 된다구 내 마누라를 궁에서 쫓아 낼 때 뒷모습만 쳐다봐야 하는 무기력한 지아비의 심정을 너는 알기나 하냐구?”(13/1/18)
@IMG3@경복궁 경회루 뒤쪽에 있는 정자. 임금이 은밀한 밀회를 즐기던 곳이다
당시 중종은 여인들에 파묻혀 살았다. 여자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정국공신들이 추천하는 여자를 받아들인다는 옵션에 묶여있었기 때문이다. 반정공신들의 강압에 못 이겨 정비 단경왕후를 즉위 7일 만에 쫓아내고 새장가를 들었지만 계비 장경왕후마저 첫아들(훗날인종) 낳다 죽어 중전이 없는 틈새를 후궁들이 파고들었다. 이중에서 재색을 겸비한 사람이 창빈 안씨이고 육감적인 사람이 경빈박씨였다.
중전을 비워둘 수 없다는 주청에 따라 왕비를 맞아들였는데 이분이 훗날 수렴청정(명종 대)의 대가가 된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다. 하지만 나이 열여섯 어린 왕비는 세상 물정을 몰랐고 중종은 나이어린 왕비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틈새에서 각축을 벌이던 여인이 몸짱 경빈박씨와 얼짱 희빈 홍씨다.
“언젠가 내 얼굴을 보고 싶다고 말했지? 신하들은 용안을 봐야 한다구, 그래 지금 보니까 잘생겼니? 말해봐 임마, 잘생겼어? 못생겼어?”(13/1/18)
“너희들 말로는 임금의 얼굴을 쳐다봐야 성색을 살필 수 있다고 말했는데 내 건강을 챙겨줘 고맙다. 근데 말이야 백성이나 신하를 막론하고 임금을 쳐다보면 모가지가 뎅겅 달아난다는 거 너도 알고 있지? 어진 외에는 그림에도 임금의 얼굴이 없잖아. 그런데 내 얼굴을 항상 보여 주라고야?
너희들 말에도 일리가 있지만 내 얼굴 살피며 니들 얘기하려고 하는 걸 내가 모르는 줄 알어? 선 왕대부터 임금의 표정을 봐가며 말하는 간신을 차단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는 것을 너도 잘 알면서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니? 너 아니었으면 벌써 보낼을거야. 너니까 오늘까지 온거지, 그 때부터 넌 불경이야 알았어? 임마!”
“소격서도 그래. 왕실의 안녕을 위해 일월성신에게 제사 드리던 곳인데 변질되어 무녀들을 대궐에 불러들여 푸닥거리나 하구 퇴폐스럽게 흘러가는 거, 니가 말 안 해도 나도 잘 알고 있었어. 조금 아까 말했듯이 내가 후궁이 하나 둘이냐? 지네 들이 잘났다고 서로 일러바치니 알 수밖에...”
@IMG4@선릉. 서울 삼성동. 중종임금의 어머니 정현왕후(자순대비)가 잠들어 있다
“너 우리 엄마가 누군지 알지?”
“네, 자순대비 이옵니다.”
“그래 맞아, 알고 있어 다행이구나. 너는 어떻게 생각할런지 모르지만 우리 엄마 참 불쌍한 여자다. 어린 나이에 인수대비의 손에 이끌리어 궁에 들어와 아버지(성종)의 후궁으로 나를 낳고 형이 왕이 되었을 때 너도 알지?”
“나도 어렸지만 너도 12살밖에 안됐으니까 잘은 모르겠구나. 형(연산군)이 아버지(성종)의 후궁, 숙의 정씨와 엄씨를 자신의 생모를 죽음으로 몰아간 장본인으로 지목하여 작살내고 동생들을 아작낼 때 우리 어머니의 심정이 어떠했겠냐? 오죽하면 요부 장녹수를 찾아가 무릎 꿇고 나를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돌아와 나를 끌어안고 통곡하던 일을 나는 잊지 못해”
“너 화병이라고 아니? 여자들의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한이 되고 그 한이 병이되는 화병 말이야. 그 살육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우리 엄마는 화병이 나도 열두 번은 났어. 화병은 500년 후 발달한 의학으로도 못 고치는 병인데 그 화병을 풀고자 무녀를 대궐에 불러들인 거 좀 이해해주면 안되니? 울 엄마 돌아가실 때가지 기다려주면 안되냐구?”
“그런데 넌 소격서를 폐지하라고 265회나 상소를 올리고 급기야는 밤늦은 자시(子時)가 될 때가지 퇴청하지 않고 농성할 때 난 정말 싫었어. 정나미가 떨어졌다구”
“그리고 정말 니가 싫어 진 것은 어느 날 니가 입궐 할 때, 니 앞에 호조판서 고형산이 앞서가고 있었다며? 그 꼴을 보지 못한 니가 호판의 가마꾼을 불러다 조졌다며? 건 월권이고 자만이야. 겸손 좀 해라 겸손.”(14/12/16)
@IMG5@조광조 비문
“겸손 얘기가 나왔으니까 한 마디 더 하겠다. 내 마누라(장경왕후)가 애 낳다가 죽어 창경궁에 피어하는 걸 너희들에게 알리지 않았다고 나를 몰아 부칠 때, 대사헌 최숙생이 엄청 따지고 들더라. ‘임금의 행적은 항상 알려야 한다’ 고, 그래 일리 있는 얘기야. 그때 너 뭐라고 얘기했어? 최숙생의 등을 쓰다듬어 주고 싶다구?”(12/8/20)
“아니 제가 그런 말씀을...”
“얘 좀 봐, 너 지금 오리발 까고 그러는 거냐? 기억 안 나면 중종실록 읽어봐, 12년 8월 20일자 말야”
“그 때 넌 검토관이었고 최숙생은 대사헌이었어. 그런데 니가 최숙생의 등을 쓰다듬어 주고 싶다고야? 니가 왕이냐? 니가 임금이냐고? 니가 입버릇처럼 떠벌리는 어버이처럼 떠받드는 임금 앞에서 그런 말을 해도 되는 거냐?”
“너 조금 아까 절명시를 지으면서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하였다’고 했는데 임금을 어린이처럼 사랑한거 아니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너 가방끈 긴거 알어. 인정한다구, 니가 처음 알성시에 나와 ‘춘부(春賦)’라는 답을 내놨을 때 난 너의 학문에 꾸뻑 갔다구. 그뿐이 아냐. 경연에서 근사록과 소학과 성리학을 꿰뚫어 열변을 토할 때 공자님이 살아 돌아 오신줄 알았어, 그렇지만 나두 한 학문 하는 사람이야.
날이면 날마다 사람 잡는 형(연산군) 등살에 살아남으려면 책을 읽는 거 밖에 없었어. 형 눈에 저놈은 권력에는 야심 없고 책만 좋아하는 백년서생으로 비쳐져야 내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그런데 넌 날 학문도 모르고 여자만 좋아하는 무식한 놈으로 취급 했어 그것이 서운했다 이 말이야”
“그리고 또 ‘지당하십니다’ 라는 말은 누가 쓰는 어휘냐?”
“예, 임금님이 옳은 말씀을 하실 때 신하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쓰는 공대의 말입니다”
“그래, 맞아. 맞는데 말이야 너희들은 그 말을 내가 쓰게 만들었어. 특히 너 조광조가 경연에서 논리정연한 어투로 설파할 때, 자리를 같이했던 사관들이 내가 ‘지당하다고 했다’고 실록에 기록해놨어, 이게 말이나 되냐? 임금이 신하의 말에 지당하다는 것이...너희들은 그걸 즐긴거야. 임금을 모욕주면서 너희들은 쾌재를 불렀겠지만 나는 수모를 당하는 심정이었어”
“내가 뭐 용상에 앉아 있으니까 내 마음이 하해같이 넓은 놈인 줄 아는데, 나 속 좁은 놈이야, 벤댕이 속처럼 좁다구. 내가 왜 이렇게 좁아진 줄 아니? 허구헌날 칼춤을 추는 형(연산군) 앞에서 살아남으려니까 간댕이가 콩 알만해졌어. 그렇게 해서 속 좁은 놈이 됐다구...”
@IMG6@경기도 용인에 있는 조광조 묘
찬바람이 스산하다. 정신이 가물가물하다. 싸래기를 뿌리던 눈발이 거세진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에서 희미하게 보이던 임금의 얼굴이 사라졌다. 피를 토하던 조광조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이보시오 금부도사! 사약이 남아 있으면 더 주시오”
금부도사 유엄으로부터 약사발을 받아든 조광조는 목마른 사슴이 물을 들이키듯 벌컥 벌컥 들이마셨다. 하지만 목 줄기를 다 넘기지 못하고 “쨍그렁” 약사발 깨지는 소리와 함께 앞으로 쓰러졌다.
의지의 선비 조광조는 이렇게 갔다. 몽롱한 정신 속에서 흐트러지는 자세를 고쳐 잡으며 그래도 머리는 임금이 계신 북쪽을 향하고 절명했다. 한이 맺혀서 일까?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양팽손이 떨리는 손으로 눈을 쓰다듬어 내리자 그때서야 눈을 감았다.
@IMG7@정암 조선생, 학포 양선생 추모비. 능주 죽수서원에 있다
조광조가 죽었다. 그 후 소격서는 부활했고 현량과는 폐지되었으며 위훈삭제는 취소되었다. 도덕을 바탕으로 세상을 평정하려 했던 젊은 개혁 사상가는 좌절했다. 하늘의 뜻을 백성에게 펼치려 했던 개혁 정치가는 실패했다. 올곧은 마음으로 국가를 경영하려 했던 선비는 한 사람을 경세하지 못하여 무너졌다.
죄인의 시신을 거두는 일은 동률로 처벌받을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학포 양팽손은 조광조의 시신을 수습하여 향리에 가매장 했다가 이듬 해 용인 선영으로 이장하였다. 또한 그의 제자 소쇄 양산보는 홍문관 관직을 벗어던지고 향리에 내려와 흙 담을 쌓고 집을 지으며 스승을 기렸다. 그것이 오늘날의 소쇄원이다.
490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그의 사상이 우리의 가슴에 각인되어있는 것은 이루지 못한 아쉬움과 그의 도(道)가 백성에게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개혁(改革)은 문자 그대로 피부를 가르는 아픔을 동반한다. 혁명은 밭을 갈아엎듯이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개혁은 판을 깨지 않고 가는 길이다. 그래서 혁명보다 개혁이 더 어렵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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