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관

세종의 장인 심온 [펌]

기산(箕山) 2006. 10. 12. 14:31
 
43번 국도. 강원도 고성과 충남 연기군 전의를 연결하는 길이다. 이 길 죽전사거리(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와 동수원에 이르는 길목 양지바른 곳에 한 많은 생을 살다간 두 분이 잠들어 있다. 공교롭게도 자연사가 아니라 사사(賜死)된 분들이다. 불과 2km 남짓 거리다. 세종의 장인으로 영의정에 올랐던 심온과 임금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던 조광조다. 우선 심온을 살펴보기로 한다.

▲ 조선시대 특수 신분에 있었던 사람들이 지녔던 패
ⓒ 이정근
강남산맥의 가파른 고개 판막치를 피하여 극성령에 올라서니 압록강이 눈앞에 펼쳐졌다. 한양을 떠나 여기까지 달려온 길을 뒤돌아 생각해보니 아득하기만 하다. 한양에서 의주까지 직선 참로 요소요소에는 금군(禁軍)들이 쫙 깔려있어 그들을 피하여 오느라 산을 넘고 내를 건너 우회한 곳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선천을 지나 천마산을 넘으면 지름길이지만 삭주로 돌아오느라고 하루가 더 걸렸다. 문곡에서 극성령을 넘을 때에는 산적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지니고 있던 패물을 털어주며 목숨을 건졌으니 다행이지 임무를 수행하지도 못하고 죽을 뻔하였다. 앞만 보고 달려온 1050리 한양길이 아찔하기만 하다.

"금군에게 붙잡히면 너도 죽고 우리 집안도 결딴이 나느니라. 고생이 되드라도 역참이나 마을 길을 지나지 말 것이며, 만에 하나 붙잡히더라도 혀를 깨물고 죽는 한이 있어도 이실직고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너는 중궁전 아이나 대감댁 아이가 아니라 판통예문사 안마님댁 아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되느니라."

▲ 영릉. 세종대왕과 소헌왕후가 잠들어 있다
ⓒ 이정근
장의동(藏義洞) 대감댁을 떠나올 때 부부인 마님의 글썽이는 눈망울이 눈앞을 가린다. 부부인이 누구인가? 왕비의 어머니를 일컫는 말로써 지체가 하늘에 닿는 분이다. 고갯마루에 동지섣달 칼바람이 분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고갯마루에서 내려다보니 의주성이 한눈에 보인다. 의주목사 임귀년을 찾아가 부탁하라는 마님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12월 스무하루. 의주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삼각산의 형체도 보이지 않은 칠흑 같은 밤. 금군들이 철통 같은 경비를 서고 있는 신갈파진을 피하여 압록강 가에 서 있는 여인이 있었다. 강을 건너려는 여인이다. 여인이지만 남자 옷차림으로 변복을 했다. 강을 건너면 내 나라 땅이 아니라 중국 땅이다. 그래도 강을 건너 중국 땅으로 건너야 하는 여인이었다.

1년 중 4∼5개월 동결되어있는 압록강은 신갈파진에서 주렌청(九連城)에 이르는 뱃길은 트여 있고 나머지는 얼어있었다. 하지만 어두운 밤길에 어디가 꽁꽁 얼어있고 덜 얼어있다는 것을 알 길이 없다. 얼음이 깨져 빠지면 구해줄 사람도 없는 죽음의 길이다. 그렇지만 망설일 수 없었다. 죽어도 가야 하는 길이었다.

"이대로 강을 건너시면 의금부 금군에게 체포되옵니다. 어서 피하시라는 부부인 마님의 전갈이옵니다."

▲ 세종대왕 동상
ⓒ 이정근
한 나라의 영상이요 왕의 장인(國舅)으로 명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오던 심온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9월 8일. 왕 세종과 왕비 소헌왕후, 그리고 상왕 태종의 분에 넘치는 환송을 받으며 떠나온 게 불과 두 달 남짓 전인데, 도무지 믿기지 않은 일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날벼락이었지만 현실이었다.

엎드려 읍소하던 여인이 얼굴을 들었다. 가녀린 두 뺨에 한 줄기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낯이 익은 여인이었다. 딸아이가 어렸을 적에 데리고 있던 아이를 왕비가 되어 궁으로 들어갈 때 데리고 들어갔던 아이였다. 강상궁이었다.

"그렇다면 이 아이가 전하는 말은 아내의 간청이며, 딸아이(공비)의 부탁이 아닌가?"

돌아가는 판세가 심각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내와 딸아이가 강상궁을 여기까지 보내 귀국을 돌리라는 얘기는 생명이 위태롭다는 얘기가 아닌가? 심온은 잠시 망설였다. 하늘을 쳐다봤다. 몇 점 흰 구름이 남동쪽으로 흐르고 한 떼의 기러기가 무리를 지어 날고 있었다.

"귀국을 거두고 몸을 피한다는 것은 소인배들이나 할 짓이 아닌가. 일국의 영상으로 그것도 왕비의 애비로서 당치않은 일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니느니라."

마음을 다잡은 심온은 귀국을 서둘렀다. 심온을 비롯한 사은사 일행을 태운 배가 의주를 향하여 출발했다. 그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여인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로 범벅이 된 시야에서 배가 보이지 않자 여인이 강물로 뛰어들었다. 목숨 걸고 소임을 마친 여인이 압록강의 원혼이 된 것이다.

▲ 태종의 수결
ⓒ 이정근
사은사 일행의 배가 의주에 닿았다. 명나라로 떠날 때 극진히 환송하던 의주목사가 안 보인다. 자신이 천거하여 의주목사가 된 임귀년이 안보이고 낯선 사람들이 보인다. 눈빛이 날카로운 장정들이었다. 의주목사가 보이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임귀년은 심온 집 사람들에게 편의를 봐주었다는 이유로 파직되어 일주일 전 의금부 금군에 체포돼 한양으로 압송되어 전옥서에 하옥되어 있었다.

"어명이요. 대역죄인 심온은 오라를 받으시요."

상왕으로 수강궁에 물러앉은 태종의 특명을 받은 의금부 진무 이욱의 목소리였다. 예상했지만 대역죄라니 너무나 뜻밖이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죄목이었다. 이렇게 체포된 심온은 수갑을 채우고 칼을 씌워 압송하라는 상왕의 특명에 따라 함거에 실려오는 신세가 되었다. 갈 때는 영광의 행차길, 올 때는 죄인의 몸으로 압송되는 달구지 수레길이다.

이즈음 한양에선 숨 가쁘게 돌아갔다. 특히 한양에서 의주에 이르는 참로 길은 어명을 전달하는 급주마들의 말굽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1050리 41참 의주길은 금군들의 눈초리가 번득였다. 참로 요지인 의주, 안주, 평양, 황주에는 금군들이 아예 상주하고 있었다. 판전의 감사 이욱을 의금부 진무로 임명하고 "심온을 잡아오라"는 수강궁전 태종의 명이 떨어진 것이 11월 25일. 한 달여 전이다.

"심온이 도주하지 못하도록 평안 관찰사에게 미리 체포할 것을 준비하라"는 명을 받들어 파발마가 떠난 것이 11월 29일이고, 의주 목사 임귀년이 "심온의 종을 맞이하게 하였다 하여 파직한다"는 명을 가지고 떠난 것이 12월 4일. 북으로 향하는 함거를 저지한 연산 수령을 파직한다는 어명을 받들어 급주마가 떠난 것이 12월 5일이었다.

"의주목사 임귀년을 체포하여 한양으로 압송하라"는 명이 떨어진 것이 12월 15일. 심온의 사람 "고수생에게 역마를 제멋대로 내준 죄로 황해도 참로 찰방 김관을 의금부로 압송하라"는 명이 떨어진 것이 12월 17일이었다. 한마디로 한양에서 의주에 이르는 직선 참로는 파발마가 일으키는 흙먼지가 마를 날이 없었다. 혁명을 연상하게 하는 긴박감이 천 여리 참로 길에 흐르고 있었다.

일찍이 고려조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선 심온은 조선조 개국과 함께 간관이 되어 형조판서와 호조, 이조, 공조 판서를 지내고 승승장구 임금의 장인으로 국구가 되어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영상에 올랐다. 이러한 심온이 어떠한 연유로 옥사에 연루되었을까? 병조좌랑 안현오가 밀고하고, 좌의정 박은의 간계에 의하여 희생되었다는 학자도 있지만 시야를 넓혀보자.

▲ 세종대왕이 즉위식을 거행했던 경복궁 근정전.
ⓒ 이정근
살아생전에 왕권을 강화시켜 놓고 죽어야겠다는 신념에 따라 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한 것이 8월 11일. 막상 일을 저질러놨지만 넘어야 할 산은 명나라였다. 명나라에서 윤허하지 않는다면 물릴 수도 없고 진퇴양난이었다. 끝까지 거부한다면 머리를 조아리고 읍소하며 공물을 더 많이 바치겠다고 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이것은 자존심에도 위배하고 백성의 기름을 짜는 일이라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 대목을 태종 이방원이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조선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임금이 영돈녕(領敦寧) 유정현과 영의정 한상경, 그리고 대간 각 한 사람을 불러 전위한 일을 중국에 보고할 것을 의논하였으나, 의논이 아직 정해지지 못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말하기를, "마땅히 <상왕께서〉풍병을 앓으시어 때때로 발작하여, 부득이 세자 이도(李?)를 대리로 하여 국사를 보게 하였으며, 인장(印章)과 면복(冕服)은 감히 마음대로 전해 주지 못하고 오직 칙명이 내리기를 기다린다고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오직 이원만이 홀로 말하기를, "금년 정월에 중국의 사신이 왔을 때 상왕께서 무양하심을 뵈었삽고, 또한 이제 이미 세자 책봉을 청하였으니, 중국 황제가 반드시 사신을 보내올 것인데, 상왕께서 만일 조정에 나와 보시지 않는다면 반드시 의심할 것이요, 만일 나와 보신다면 반드시 상왕의 병환이 사실이 아님을 알 것입니다.

세자를 폐립(廢立)한 지가 아직 오래지 않아서 갑자기 전위(傳位)한다면 사리가 전도되니, 우선 병을 칭탁하여 전위를 주청(奏請)하느니만 같지 못합니다. 황제가 가령 그것을 윤허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시 청하면 반드시 윤허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하연을 시켜 상왕에게 이 사연을 고하니, 상왕이 하연을 박은의 집에 보내어 물었더니 박은의 의견도 이원의 의견과 같으며, 그는 또 말하기를, "개국 이후로 상왕께서 비로소 중국의 고명(誥命)을 받으시고 중국을 지성으로 섬겨 왔는데, 이제 왕위를 주고받는 큰일을 당해서 우리 마음대로 할 수는 없습니다."하므로, 하연이 돌아와 박은의 이 말을 상왕께 아뢰니 상왕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가 등에 큰 종기를 못 견디어 빨리 떠나가려고 한 것이니, 이것이 바로 사리에 있어 얼른 작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좌·우 의정의 말도 옳다. 그러나 황제가 만일 윤허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세종실록> 즉위년 8월 14일)


▲ 청천부원군 심온의 묘역
ⓒ 이정근

약소국의 설움이 눈물겹도록 절절히 배어 있다. 병을 칭탁한다니? 멀쩡한 사람을 병들었다고 거짓으로 꾸며 대여 고한다니 부끄럽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 당시의 현실이었다. 이렇게 근심이 태산 같았던 명나라에 판한성 김여지를 사은사로 파견하여 칙서를 보냈는바 명나라 조정이 혼쾌히 받아들이고 답례 사신을 보내온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 8월 22일이다.

"심온은 국왕의 장인이니 영의정이 마땅하다"고 태종이 말한 것이 9월 2일. 영의정에 임명된 것이 9월 3일이고, 사은사로 임명된 것이 9월 7일이다. 아들 세종이 피로 얼룩진 경복궁을 떠나 새로운 정사를 펼칠 수 있도록 새로운 궁궐을 지어 창덕궁이라 이름하고 이어(移禦)한 것이 9월 16일.

왕비 소헌왕후(심온의 딸)가 세종 이후 보위를 이어갈 맏아들 향(훗날 문종)을 낳고, 위(훗날 세조)를 낳은 후, 셋째 아들 용(안평대군)을 낳은 것이 9월 19일. 한마디로 궁궐은 축하의 연속이었고 왕실은 경하의 연속이었다. 병조참판 강상인의 옥사가 눈엣가시처럼 걸렸지만 태평성대였다.

강상인의 옥사도 그렇다. 명령에 죽고 사는 무인으로서 "호령이 두 군데서 나오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푸념은 있을 수 있는 얘기다. 일사불란한 지휘계통에 익숙한 무인으로서 임금전에 보고해야 하고, 상왕전에 보고해야 하는 일은 처음 경험하는 일로서 난처한 일이 한둘이 아녔다. 상왕 태종도 그렇게 이해했다.

강상인이 누구인가? 바로 태종사람이다. 젊어서부터 상왕을 모시고 태종의 그늘에서 큰 사람이다. 또 병권을 쥐고 있는 태종이 믿고 병조참판에 앉혀놓은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이 크게 해석하면 태종 자신을 능멸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는 실언을 한 것이 괘씸하기도 했지만, 공신녹권 직첩을 거두어들이고 옹진에 부쳐 하는 것으로 일단락 지으러 마음먹은 것이 9월 12일이다.

그런데 태종이 변했다. 불과 며칠 사이에 180도 변한 것이다. 결정적인 요인은 심온이 명나라로 떠나던 날의 상황보고다. 사은사 일행이 떠나던 행차 길에 환송인파가 구름처럼 밀려들고 도성이 텅 빌 정도였다는 보고를 받고 충격을 받은 것이다...

 


 

 

@IMG1@경복궁 흥례문. 사은사 일행은 근정문과 흥례문을 지나 광화문을 통과했다

 

 

영광의 길 떠나는 사은사, 그러나 죽음의 길이 될 줄이야

 

가을 햇살이 따사롭다. 하늘도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하다. 사은사 심온, 부사 이적, 주문사 박신으로 구성된 사신이 명나라라 떠나는 날이다. 대궐은 물론 도성이 들떠 있었다. 그중에서 제일 축제 분위기는 단연 세종의 정비 공비가 있는 중궁전이었다. 나흘 전에 영의정에 오른 친정아버지가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로 떠난다니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사은사 일행이 경복궁 남쪽에 있는 광화문을 빠져나와 육조거리에 모습을 나타내자 환송객들이 길을 메웠다. 장안의 백성들이 다 나왔는지 구경나온 사람들 때문에 행렬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 할 지경이었다. 육조거리에 늘어선 의정부, 사헌부, 한성부와 이조, 예조, 호조, 형조, 병조, 공조 관원들도 일손을 놓고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황토현(조선일보자리)을 마주보며 행차가 서쪽으로 방향을 틀 무렵, 늘어선 군졸들 때문에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고 황토마루에 올라 구경하던 백성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어 행차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잠시 멈추어 섰다. 가까스로 길을 트고 서전문(西箭門)을 지나 경곳다리에 이르니 경기감사가 마중 나와 있었다.

 

 

@IMG2@경기감영이 있었던 자리에 적십자병원 부속건물이 있다.

 

지금 적십자병원 앞에 있었던 경교(京橋)는 도성과 경기도를 가르는 경계선이었고 병원 자리에 경기감영이 있었다. 더 엄격히 말하면 적십자병원 봉사관 자리다. 떠나는 사신은 경기감사가 출영하여 환송하지 않은 것이 통례였으나 오늘의 사은사는 어디 보통 사신인가. 왕비의 아버지에 영의정이니 자청하여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한양을 설계한 정도전이 성곽을 쌓고 4대문을 만들었으니 서쪽에 있는 문이 돈의문이다. 돈의문 근처에는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운 정사공신 이숙번이 살고 있었다. 관리들의 행차와 수레소리에 짜증을 낸 이숙번이 풍수사 최양선을 동원하여 창의문과 숙청문, 그리고 돈의문이 경복궁의 지맥을 손상시킨다고 태종에게 주청하게 하여 5년 전(1413년) 돈의문을 폐쇄 시키고 새로 건립한 문이 서전문이다.

 

 

@IMG3@정동사거리에 세워진 돈의문 표지

 

세종4년. 백성들의 통행이 불편하다는 보고를 받은 세종은 서전문을 헐어버리고 새문을 건립하라 명했다. 그 자리가 경향신문과 강북삼성병원 사이 정동 사거리다. 명칭도 돈의문을 다시 사용하도록 했다. 이때부터 백성들은 돈의문 밖을 새문(新問)밖, 도성 안쪽을 새문안이라 불렀다. 이렇게 세워진 돈의문이 일제시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 서대문은 기구하게 세 번이나 헐린 문이다. 때문에 심온을 대표로 한 사은사 일행이 통과한 문은 서전문이다.


명나라로 떠나는 사신의 출발점이자 중국 사신들의 도착지점인 경기감영(적십자병원자리) 근처에는 훌륭한 시설과 경관이 좋은 명승지가 있었다. 명나라 사신 공식 영접장소인 모화루(훗날 모화관)를 비롯하여 반송정과 서지(西池)다. 특히 반송정은 사대부들이 가족과 친지들로부터 환송받고 싶어 하는 동경의 장소였다.

 

 

@IMG4@모화관이 있었던 자리에는 은행건물이 들어서 있고 모화관 터를 알리는 표지석

 

600여년이 흐른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어디에서 환송받으면 영광으로 생각할까? 개인과 환경에 따라 다르겠지만 영종도에 있는 인천공항이 아닐까 한다. 일제시대에는 부산항이었다. 일본과 미국으로 떠나는 유학생은 물론 유럽으로 가는 유학생들이 요꼬하마에서 배를 갈아타기 위하여 관부연락선을 탔으니까. 하지만 그 당시에는 평양과 의주를 거쳐 중국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반송정이었다.


큰 우산을 펼친 듯 아름드리 소나무가 일품인 반송정은 서지가 받쳐주어 더욱 빼어났다. 개성 숭교사(崇敎寺) 연못에서 옮겨 심었다는 연꽃이 만발하면 도성의 아녀자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서지와 어우러진 반송정은 도성 사람들이 가보고 싶어 하는 선망의 장소였다.  이렇게 경관 좋은 반송정은 조선 518년 동안 사대부들의 환송 명소였다.

 

 

@IMG5@반송정과 서지가 있었던 자리에 금화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반송정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영조 17년 천연정으로 부활했다가 조선 말엽에는 청수관이 되었다.

 

관찰사와 목사, 수령 등 관직을 받아 북으로 떠나는 친구, 한양에 올라와 과거 급제하여 금의환향하는 벗. 청운의 꿈을 안고 명나라로 공부하러 떠나는 가족, 사신으로 떠나는 동료 들 등등 영광을 안고 떠나는 사람들을 배웅하는 환송객들로 항상 북적였다. 한마디로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과 성공한 사람들이 눈도장을 주고받는 장소였다.


세조 때 강희맹은 반송정에서 친구를 보내며 이렇게 노래한 일도 있다.


수레 일산(日傘) 구름처럼 모여 먼 길을 전송하는데,

술잔 소반 흩어지고 황금 술병 곁들였네.

버들 푸른 큰길가에 술은 이제 다한 것이,

가고 남는 그 일을 한탄한들 어이하리.

슬픈 노래 한 곡조에 맑은 음률 울려나니,

애는 노래 소리 간장을 에이누나.

잠시 후 서로 떠나면 천리 길 멀어지는데,

외로운 연기 저문 날이 창장(蒼莊)하기만 하구나.


경기감사의 환송을 받은 심온 일행은 북으로 향했다. 여기에서부터 의주에 이르는 길은 조선팔도 대동맥 간선도로 으뜸이었다. 한양에서 남쪽으로 연결되어 동래에 이르는 길보다 중요한 길목이었다. 이 길을 가마타고 가는 사은사 행차 길은 영광의 길이다. 더욱이 사대부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던 반송정에서 구름같이 몰려든 환송객과 백성들의 환송을 받은 심온은 기쁨으로 충만해 있었다.

 

 

@IMG6@서대문사거리에서 무악재에 이르는 길. 옛날 사신들이 오가는 길에서 약간 비켜나 있다. 영천시장을 관통하는 골목길이 옛날 길이다.

 

사은사 일행이 무악재를 넘어 시야에서 사라지자 환관 황도는 잰걸음으로 경복궁으로 돌아가 태종에게 보고했다. 환관이라고 이상할 것은 없다. 임금 세종은 환관 최용을 보내어 사은사를 환송했고 중전 공비는 환관 한호련을 내보내 아버지를 환송했다. 왕실제도가 정비되지 않은 조선 초기에는 환관들이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


조선 중기 이후에 변질된 내시와 혼동하여 폄하하는데 오해다. 가성을 내며 허리 구부정하게 드라마와 영화에 그려진 내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고려의 제도를 이어받은 환관은 당대의 엘리트들이 진출하던 관직이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청와대 수석비서관쯤이었을 것이다.


황도의 보고를 받은 태종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임금의 장인에다 영의정을 겸했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 라고 이해하면서도 호사스럽기 짝이 없는 요란한 행차는 국구로서 도를 넘었다고 생각되었다. 태종이 그렇게도 싫어하던 그림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창덕궁에 새로 지은 신궁을 수강궁이라 명명하고 궁궐에 들어앉아 깊은 장고에 들어갔다.

 

 

@IMG7@헌릉. 태종이 잠들어 있다.

 

태종은 왕권에 반하는 신하들의 행동을 역적 이상으로 간주했다. 혁명동지이자 개국공신 정도전이 신권을 앞세워 이복동생 방석을 감싸고 돌 때 용서하지 않았다. 건국 26년밖에 되지 않은 신생국 왕권이 무너진다면 목숨 걸고 세운 나라가 무너지는 것이 불을 보듯 보였다.


고려조의 잔존세력이 살아있는 현재, 최영장군과 정몽주를 척살하고 역성혁명에 성공한 듯 보이는 자신과 아버지 이성계도 아차하면 역적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태종이 숨을 거두어 땅속에 묻히는 순간까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것은 혁명가의 떨쳐버릴 수 없는 노파심과 두려움이었다.

 

왕권강화를 위하여 외척 발호는 척결의 대상이었다. 태종은 생리적으로 척리를 싫어했다. 훗날(심온사건후) “척리는 품계는 높아도 정사에는 참여할 수 없도록 하라”는 원칙을 만든 임금이 태종이었다. 왕자의 난 때 동지로 활약했던 자신의 처남 민무구 민무질을 협유집권(挾幼執權) 혐의로 처형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외척발호는 왕권의 적이다

 

이러한 태종에게 심온의 뒷모습은 불길한 그림이었다. 명나라 문제로 노심초사하며 아들 세종에게 선위한 자신의 선택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록 왕비의 아버지이고 자신의 사돈이지만 심온의 뒷모습은 묵과할 수 없는 어두운 그림자였다. 결심의 순간이 다가왔다. 칼을 빼기로 마음을 결단한 것이다.


태종 이방원과 심온의 인간관계는 보통 이상의 특별한 사이였다. 고려조에서 문하시중(영의정)을 지낸 심온의 아버지 심덕부는 이성계와 요동정벌에 나섰다가 위화도에서 함께 회군한  사이였다. 조선개국 후 심덕부는 이성계의 딸 경선공주를 며느리로 삼았다. 심온 자신은 세종의 장인이 되었으니 겹사돈 관계다. 하지만 권력은 냉혹한 것이다.

 

 

 

 

@IMG1@수강궁 임금의 자리

 

부귀도 영화도 한조각 구름이어라.

 

수강궁에서 깊은 장고에 들어갔던 세종의 아버지 태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결행의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불같은 성미여서 그럴까?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척살하고 수송방에서 정도전을 벨 때처럼 태종의 행동은 전격적이다. 숨 돌릴 겨를이 없다. 명령을 수행하는 신하들의 숨이 턱에 찰 지경이다.


11월 13일. 대사헌 허지를 불러 “의금부에 나아가 박습을 국문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시동이 걸린 셈이다. 의금부 제조 유정현이 죄인을 심문하고 그로부터 보고 받으면 될 일이지만 대사헌  허지에게 직접 챙기라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하지만 이유가 있다.

 

전옥서에 갇혀있는 죄인을 끌어내라

 

지금까지의 심문은 진상조사 차원이고 이제부터는 원하는 답을 받아오라는 것이다. 시나리오에 맞는 모범 답안을  받아 오라는 것이다. 태종에게 좌 허지, 우 최윤덕 이라고 불릴 만큼 대사헌 허지는 태종의 심복이었다. 전옥서에 갇혀있던 죄인을 끌어내어 심문이 시작되었다.


죄인의 입장에서 심문을 받는 사람이지만 병조판서 박습이나 병조참판 강상인 또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국방부장관에 해당하는 판서요 기개가 대쪽 같은 선비였다. 어르고 윽박지르고 곤장을 쳐도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강상인은 심문자 이각을 보고 비웃었다. 당황한 쪽은 죄인이 아니라 심문하는 금군이었다.

 

 

@IMG2@신하들의 발걸음이 분주했던 수강궁 회랑

 

보고를 받은 태종은 압슬형(壓膝刑)을 가하라고 명했다. 압슬형 이거 보통 고문이 아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하게 만드는 잔인한 고문이다. 군사정권시절 전기고문이 반인륜적인 범죄행위라고 지탄받았지만 압슬형에 비하면 그래도 신사적인 고문이다. 아버지를 역적으로 지목하고 아들을 역적의 하수인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압슬형이다.


죄인을 묶어 사금파리 깔아놓은 자리에 무릎을 꿇게 하고 그 위에 압슬기나 돌을 얹어서 자백을 강요하는 압슬형은 사람의 인내 한계를 파괴하는 고문이다. 당하는 죄인의 입장에선 혼절하거나 숨이 멈추면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 하지만 압슬형은 생명하고는 관계없이 고통만 가중시키는 고문이다.

 

천하장사도 못 견디는 압슬형

 

1차에 2명, 2차에 4명 그래도 불지 않으면 3차에 6명이 달라붙어서 가하는 압슬형은 죄인의 입장에서 고통을 주지 말고 빨리 죽여  달라고 애원하는 고문이다. 반대로 심문자는 죄인의 고통을 극한대로 끌어 올려 각본대로 원하는 답을 받아 낼 수 있는 악랄한 고문이다.


“군사(호령)는 한곳에서 나와야 한다고 네가 말했지?”

“예”

“박습도 옳다고 말했지?”

“예” 

압슬형을 3번째까지 견디던 강상인이 4번째는 견디지 못하고 자백한 내용이다. 3번 이상의 압슬형은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지만 갈 길이 바쁜 심문자들은 지키지 않았다.

 

 

 

@IMG3@수강궁의 고목나무

 

강상인도 독한 사람이다. 그 험한 압슬형을 3번째나 견디어 냈으니 무서운 사람이다. 압슬형은 죄인의 입장에서 다른 대답을 할 선택의 여지가 없다. 다른 말을 하면 모범답안을 들이밀고 압슬형을 가하니 끝내는 “예” “예” 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다음날에도 고문이 계속되었다. 정신은 피폐해지고 몸은 만신창이가 된 강상인에게 압슬형을 가하니 심온의 아우 심청(沈泟)이 튀어나왔다. 아니 튀어 나온 게 아니라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예” “예” 대답을 하고나니 심청이 등장한 것이다. 압슬형의 위력은 심문자의 각본대로 답을 구할 수 있다는데 있다.


이제는 심청 차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다음날이 금형일이었다. 이명덕이 태종에게 금형일에 죄인을 다룰 수 없다고 말하자 “병이 급하면 날을 가리지 않고 뜸질을 하는 법이다. 이것은 큰 옥사이니 늦출 수 없다” 금형일을 무시하고 일사천리로 강행하라는 얘기다.

 

 

@IMG4@수강궁에서 창덕궁으로 넘어가는 길

 

심청에게 압슬형 가하니 이를 악물고 견디어 냈다. 자신과 형 심온. 그리고 가문의 존폐가 걸린 문제인데 죽을힘을 다하여 참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견딜 수 있는 고문이라면 누가 인간이기를 포기하게 만드는 고문이라고 말하겠는가. 심청도 역시 견디지 못하고 2차 압슬형에서 심문자의 답안지에 맞는 모범답안을 대답하기 시작했다.


“군사(호령)는 마땅히 한곳에서 나와야 된다고 네 형 심온이 말했지?”

“예”

“형의 말에 너도 옳다고 말했지?”

“예”

이제 굿판이 끝났다. 시나리오대로 원하는 답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명덕의 보고를 받은 태종은 더 이상 심문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이제 푸닥거리만 남았으니 굿판을 치우라는 얘기다. 다음날 11월 25일. “심온을 잡아오라”는 명이 떨어졌다.

 

 

@IMG5@상서원. 왕명을 출납하던 곳이다 

 

이튿날. 전옥서에 갇혀있는 죄인들을 사형에 처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당시 사형에는 교형과 참형 능지처사가 있었고 능지처사에도 오살과 육시, 거열이 있었다. 그 외에도 사사와 부관참시가 있었다. 박습과 이관, 심청을 참형에 처하고 강상인을 거열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인왕산 범 바위 계곡에서 발원한 물이 도성 밖 서쪽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물줄기가 있다. 욱천이다. 한양과 경기도를 구분 짓는 경교 밑을 흘러 서소문 밖 후미진 곳을 통과하여 한강으로 흘러들어가는 물줄기다.


돈의문에서 앞에서 개천을 따라 연결된 길과 서소문 언덕길로 연결되는 지점은 숲이 울창했다. 삼거리에는 길가는 나그네가 쌓아놓은 서낭당이 있고 이름 모를 묘지도 듬성듬성 있었다. 음산하고 괴기스러워 일반 백성들이 별로 이용하지 않은 길이다. 도성에서 삼개나루터로 통하는 지름길이다. 출동하는 군졸들이 주로 이용했으며 백성들은 조금 돌아 가드라도 만리재를 넘어 숭례문을 많이 이용했다.

 

 

@IMG6@종각

 

11월 26일. 죄인들의 사형이 집행되는 날이다. 형률에 따라 서교 삼거리에서 박습과 이관, 심청을 목 베어 참형에 처했다. 박습은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옥중에서 절명했지만 또 다시 목이 베어졌다.


종루 저자거리에서 푸닥거리가 펼쳐졌다. 문무백관이 참관하고 수많은 백성들이 지켜보는 현장에서 강상인을 거열하기 위하여 손과 발을 묶어 달구지에 걸었다. 거열(車裂). 이거 참혹한 처형이다. 살아있는 사람을 생으로 찢어 죽이는 형벌이다.

 

사지를 묶어 달구지에 걸어라


양손과 양발, 사지를 밧줄로 묶어 달구지에 연결하여 소나 말을 네 방향으로 출발시켜 인체를 찢어지게 하는 잔인한 형벌이다. 참관한 관리들과 일반 백성들에게 권력자가 최대의 전시효과를 노리는 반인륜적인 처형이다.


압슬형에 만신창이가 된 강상인이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밧줄에 묶인 채 울부짖었다.

“나는 실상 죄가 없는데 때리는 매와 고문을 견디지 못해 죽는다.”


그렇다. 압슬형에 견딜 사람은 없다. 천하장사도 안 되고 항우장사도 안 된다.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짐승이 된다 해도 견디어 낼 수 없는 악랄한 고문이다. 이러한 폐단을 조정에서도 알고 있었기에 1665년(현종6년) 법으로 사용을 제한하다가 1725년(영조1년)영구 폐지되었다.

 

 

@IMG7@수강궁 별당

 

의주에서 체포된 심온은 칼을 쓰고 함거에 올라 남행길에 올랐다. 갈 때는 가마타고 가는 길이었는데 돌아가는 길은 덜컹거리는 소달구지 길이다. 산천은 의구한데 자신의 신세만 달라져 있었다.


흔들리는 수레에서 눈을 지긋이 감았다. 지나온 일들이 주마등처럼 펼쳐진다. 청운의 꿈을 안고 벼슬에 나가 부귀영화도 누렸다. 44년 생애에 여한은 없지만 대역죄로 죽는다는 것은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갈 때는 영광의 길, 올 때는 죽음의 길


수레의 속도가 빨라진다. 오르막길을 오르던 달구지가 내리막길에 접어든 모양이다. 오르막  길에서는 힘들고 더디던 수레가 빠른 속도로 굴러간다. 자신의 삶을 뒤돌아 봤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평탄한 삶이었지만 그래도 오르는 길은 힘들었다. 하지만 내리막길은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급전직하 벼랑에서 굴러 떨어지는 격이 아닌가?


“내 비록 죄인의 몸으로 압송되고 있지만 한양에 가면 진실은 명명백백 가려질 터. 강상인과 대질하면 나에게 씌워진 혐의는 벗겨지겠지...”


허나, 이것은 심온의 꿈이었다. 꿈은 이루어진다지만 이루어지지 않은 꿈이 더 많다. 상왕은 강상인과의 대질은커녕 심온을 체포하라 명을 내린 이튿날 강상인을 처형했다. 그것도 모르고 꿈을 꾸고 있었으니 꿈은 꿈이었나 보다.

 

 

@IMG8@청송부원군 심온 묘. 묘비는 세종의 아들이자 심온의 외손자 안평대군이 지었다

 

유난히 흔들리는 함거에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임금의 장인이요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내가 왜 죽어야 하나?” 곰곰이 생각해도 죽을 이유가 없었다. 그 순간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 영의정 자신을 일컫는 말이다. 영상의 자리는 만백성을 내려다보고 오로지 한사람을 올려다보는 영광된 자리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말을 곱씹어 봤다. 이 때 등줄기를 흐르는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현실은 어떤가? 인정전에 주상이 있고 수강궁에 상왕이 있잖은가? 그렇다면 이인지하(二人之下) 만인지상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이라는 말이 덫이었단 말인가? 돌멩이를 타고 넘는 수레의 심한 흔들림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12월 22일. 심온이 압송되어 한양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은 상왕은 대사헌 허지와 이명덕에게 의금부에 나아가 심문하도록 명했다. 의금부의 우두머리 제조 유정현이 있지만 강상인을 심문할 때처럼 허지를 파견한 것은 필요한 답안지를 받아오라는 뜻이다.

 

 

@IMG9@수강궁 명정전. 지붕위에 지붕이 있는 것이 이채롭다.

 

심문이 시작되었다. 왕비의 친정아버지이고 영의정이라고 해서 봐주는 것이 없었다. 매로 치고 압슬형을 가했다. 인간성을 파괴하는 고문을 시작 한 것이다. 체통과 기개는 선비의 덕목이다. 한나라의 영상으로서 산 같은 위엄은 산산이 부셔져 내렸다. 자존심도 철저하게 망가졌다. 고통을 이기지 못한 심온이 순순히 모범 답안지를 그렸다.


“강상인 등 여러 사람이 아뢴 바와 모두 같습니다. 신은 무인(武人)인 까닭으로 병권(兵權)을 홀로 잡아 보자는 것뿐이고, 함께 모의(謀議)한 자는 강상인 등 여러 사람 외에 다른 사람은 없습니다.”(세종실록 즉위년 12월 22일)


이제 막이 내리는 시간이 가까워왔다. 더 이상의 심문도 더 이상의 고통도 마감하는 시간이 가까워온 것이다. 불과 4개월 전. 상왕이 아들에게 선위하고 세종이 즉위할 때, 새 임금 세종의 머리위에 익선관을 씌워주며 태종이 문무백관 앞에서 천명한 말이 있다.


,“주상이 아직 장년이 되기 전에는 군사(軍事)는 내가 친히 청단(聽斷)할 것이고, 또한 국가에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정부·육조(六曹)로 하여금 함께 그 가부를 의논하게 할 것이며, 나도 또한 함께 의논하리라. 병조 당상은 나에게 시종하고 대인들은 주상전에 시종하라”(세종실록총서)


이와 배치되는 자백을 받아냈으니 더 이상의 심문은 필요 없었다. 이튿날 진무 이양에게 심온을 수원으로 압송하여 자진(自盡)하게 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말이 자진이지 사사(賜死)나 다름없었다. 체포하라는 명이 떨어진 것이 지난달 11월 25일. 심온이 목숨을 끊은 것이 12월 25일 딱 한 달간의 일이었다.

 

 

@IMG10@태종 묘. 무인석과 문인석이 시위하고 있다

 

훗날 250여년이 흐른 현종시대.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하는 것을 보고 벼슬을 집어 던진 이익(李瀷)은 ‘성호사설’ 인사문에 이렇게 기록했다. “민(閔)씨와 심(沈)씨 두 집안이 태종에 의하여 흉화(凶禍)를 당하게 되었으나 대개 먼 장래를 생각함이 매우 깊었던 것이다”


588년이 흐른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덧붙이는 글*

수강궁은 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하고 상왕으로 물러앉은 궁입니다. 성종 14년(1483)에 중건하였으며 조일전쟁(임진왜란) 때 불 탄 것을 광해군 8년(1616)에 중수하여 동궐이라 불렀습니다. 일재시대에는 창경원으로 불리다가 오늘날에는 창경궁이라 불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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