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관

불의의 대통령...

기산(箕山) 2006. 10. 23. 00:25

                                                                                   2006년 10월 22일 (일) 11:33   뉴시스

 

12·12와 5·18을 짊어지고 떠난, 불의의 대통령 '최규하'

 
【서울=뉴시스】

최규하(崔圭夏) 전 대통령이 22일 오전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8세. 전직 대통령 가운데 최고령이었던 최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7시 37분께 영면했다

최 전 대통령은 10·26 사건 후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했으나, 전두환 신군부의 압력에 의해 1980년 사임한 불의의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될 전망이다.

최 전 대통령은 특히 한국 현대 정치사의 질곡을 고스란히 지켜본 정치인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대통령직 재임시보다 사임 후 25년 동안 국가원로로 정치적 발언은 자제한 채 은둔의 생활을 보냈다.

최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 중 한국 현대사 최대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는 12·12쿠데타와 5·18광주민주화 운동을 겪었다.

◇ 10·26으로 대통령직 수행, 신군부 압력에 결국 '사임'

10·26으로 박정희 대통령 유고가 있자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및 계엄사령관은 사건수사와 군인사 문제를 두로 심각하게 대립했다.

이때 전두환 등 신군부는 군부 내 주도권 장악을 위해 정승화 참모총장이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10·26사건 수사에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임을 내세워 정 총장을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했다.

그러나 모든 사태는 당시 대통령이던 최규하의 재가 없이 이뤄졌다. 따라서 사후 승인을 받기 위해 신군부가 최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했으나, 대통령이 총장 연행 재가를 거절당하는 국면이 전개됐다.

이에 신군부는 당시 노재현 국방부장관을 체포, 그로 하여금 대통령이 총장 연행에 재가토록 설득했다. 결국 최규하 당시 대통령은 13일 새벽 정승화 총장의 연행을 재가하고, 이후 신군부는 제5공화국의 중심세력으로 커가게 됐다.

이후 12·12는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이 재임한 1993년 초까지는 집권세력에 의해 정당화됐으나, 이후 김영삼 정부는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으로 규정했다.

◇ 민주화의 불꽃 '5·18 광주', 최 전 대통령 임기중 발생

광주민주화 운동은 당시에는 불순분자와 폭도들에 의한 난동으로 규정됐다. 원인은 전두환 등 신군부가 12·12를 통한 하극상을 군사독재의 연장으로 이끌기 위한 시도에서 비롯됐다.

신군부는 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전국확대조치를 발표하고 민주인사들을 체포 투옥했다. 이에 광주에서는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에 반발하는 학생과 시민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이 가속화됐다.

5월 18일부터 시작된 시민항쟁은 시민자치와 민주주의 공동체 구현 등 많은 이야기를 남긴채 2만 5000여명에 달하는 군을 투입한 무력진압에 의해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막을 내렸다.

광주민주화운동은 1988년 6공화국 출범 직후 국회에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정식 규정됐고, 1988년 11월 사건규명을 위한 국회청문회가 개최되는 등 진실에 바탕을 둔 역사적 규명 작업이 지금까지 진행 중에 있다.

최규하 전 대통령은 대행 기간을 포함해 1979년 10월부터 1980년 8월 16일까지 제10대 대통령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한편 최 전 대통령 장례식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 규정에 따라 행정자치부에서 절차를 진행한다. 청와대는 오후 2시 장례와 관련된 회의를 열고 유족의 뜻에 따른 가족장으로 치룰지 국민장으로 치룰지 결정할 방침이다. 유족은 장남 최윤홍 씨 등 2남 1녀.

권대경기자 kwondk@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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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10월 22일 (일) 13:21 YTN

'불운의 대통령' 최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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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멘트]

12·12 사태 뒤 대통령에 올랐던 최규하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짧은 임기를 보낸 대통령이었습니다.

5·18 광주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뒤 8달 만에 사임하기까지 파란만장한 역사 속의 '불운의 대통령'이었습니다.

박소정 기자입니다.

[리포트]

격동의 시기였던 1970년대 말.

박정희 대통령의 계속된 독재로 쌓여왔던 정치·경제적 모순이 폭발하기 시작했습니다.

1979년 부마사태를 계기로 유신체제는 크게 흔들렸고, 박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살해되고 마는 10·26 사태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최규하 국무총리는 곧바로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은 뒤 전국에 비상 계엄을 선포하고 유신 헌법 폐기를 결정합니다.

그리고 두 달 뒤, 이른바 체육관 선거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에 의해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됐지만 12·12 군사쿠데타로 실질적 권력은 신군부 세력으로 넘어갔습니다.

당시 10.26 사태 합동수사본부장이었던 전두환 장군이 이끈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 세력은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도 받지 않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강제 연행합니다.

대통령이었지만 아무 권한도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12·12 사태를 계기로 군 내부 주도권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이 이듬해 비상계엄령을 전국에 확대했고, 결국 5·18 광주민주화 운동이 벌어졌지만 피흘리는 민심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대통령이었습니다.

군부에 눌려 허울 뿐인 자리에 앉아 있던 최 전 대통령은 결국 1980년 8월, 스스로 대통령직을 내놓기에 이릅니다.

사실상 신군부의 힘에 밀린 하야였습니다.

8달 만에 물러난 최규하 전 대통령.

격동의 시기에 군부의 힘에 휘둘렸던 역사상 가장 짧은 '불운의 대통령'으로 기록됐습니다.

YTN 박소정[sojung@ytn.co.kr]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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