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김시민장군 동상
-취재기-
나는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성대첩을 이끈 충무공 김시민장군의
전적지를 찾기위해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8월 25일 진주를 방문 하였다.
대전 통영간 고속도로를 달리다 진주시에 접어드니 길가에 대나무들이 많았다.
절개를 지키며 나라를 지켜 온 진주시민의 정신을 나타내 주는 듯 하였다.
나는 진주성에 도착한 순간 내 자신의 무지를 부끄럽게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나는 진주성과 촉성루는 서로 떨어져 있는줄 알았는데,
촉성루가 바로 진주성 내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주성도 평소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컸고 그 안에는 국민의 정신교육을 위한
귀한 문화재와 자료들이 많아 누구든지 꼭 한 번 가봐야 할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비오듯 쏟아지는 땀을 연신 수건으로 닦아내며 총연장 1,760 m가 되는 성을
하나도 빠짐없이 돌아보며 사진을 찍었다.
그 분량이 너무 많아 우선 '충무공 김시민 장군과 진주대첩'을 먼저 다루고,
'의기 논개와 촉석루'에 대한 내용은 다음에 싣기로 한다.
진주(晋州)는
시가지 중심으로 남강이 흐르고 기암절벽이 강물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도시이다.
선사시대를 거쳐 가야, 삼국, 통일신라시대의 중심도시로 성장하면서 고려시대(AD940년)에
"진주"라는 이름을 가진 이래 천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남부지역 문화관광도시이다.
조선시대 3대 절경으로 유명한 촉석루의 아름다운 자태는 진주성 위로 날아갈 듯 솟아 있고,
임진왜란의 3대 대첩지로 철옹성을 자랑하던 진주성은 남부지방의 관광지로 부상 하고있다.
현재 진주는 인구가 35만 정도이고 그 중 32%가 학생인 교육도시이기도 하다.
진주성(晋州城)은
사적 제118호로서 외적을 막기 위하여 삼국시대부터 조성한 성으로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깃든 유서 깊은 곳이다.
고려말 우왕 5년(1379)에 진주목사 김중광이 잦은 왜구의 침범에 대비히여 본래 토성이던
것을 석성으로 고쳐 쌓았으며 임진왜란 직후에는 성의 중앙에 남북으로 내성을 쌓았다.
선조 25년(1592) 10월 왜군 2만여 명이 침략해 오자 김시민 장군이 이끄는 3,800여명의
군사와 성민이 힘을 합쳐 물리쳤다.
이것이 바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이다.
이듬해 6월에는 왜군 10만 명이 다시 침략해 옴에 7만 민. 관. 군이 이에 맞서 싸우다
모두 순국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1972년, 촉석문을 복원하였고 1975년에는 일제 강점기에 허물어졌던
서쪽의 외성의 일부와 내성의 성곽을 복원하였다.
1979년부터는 성 안밖의 민가를 모두 철거하는 등 진주성 전화작업을 시작해
2002년 공북문(拱北門) 복원공사를 마지막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성곽의 들레는 1,760m이고 높이는 5~8m이며 성 안에는 촉성루, 의기사, 영남포정사,
북장대, 창렬사, 호국사, 서장대, 임진대첩계사순의단, 국립진주박물관 등이 있다.
촉석루 중 삼장사 기실비(矗石樓 中 三壯士 記實碑)
촉석문을 들어가자마자 만나게 되는 이 비는 진주성싸움에서
장렬하게 순국한 삼장사인 김천일, 황진, 최경희의 활동내용을 기록하고
그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촉석루 옆에 꽃과 화초로 장식해 놓은 '환영 진주성'은 사진이 아닌 실제로 볼 때는
너무 아름답고 화려했다.
호국의 종 (종신 2.7m, 지름 1.7m)
진주성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진주시가 문화체육조성기금으로 1980년에 제작한 범종이다.
종신에는 각종 문양이 부조되어 있고, 이은상 시인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촉석문을 통과하자마자 오른편 높은 곳에 위치한 종이 보인다.
촉석루 뒤담 출발지점 코너에 서 있는 안내표지판.
김시민장군 전공비 . 촉석정충단비
두 비는 나란히 일직선으로 서 있으며 안내 표지판도 두 비 사이에 하나로 제작하여 세워 놓았다.
이 두 비석은 각각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호와 2호로 지정 받았다.
김시민장군 전공비(金時敏將軍 戰功碑)
이 비는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성싸움을 승리로 이끈 주장 김시민 장군의
전공을 새긴 것이다.
당시 김시민장군은 진주목사로서 판관 성수경, 곤양군수 이광악 등과 함께
주도면밀한 작전을 펼쳐 왜적을 격퇴하였다.
비문에는 왜적을 1천 명도 되지 않는 병력으로 10만의 대군을 물리쳤다고 하였으나,
다른 기록에는 3,800명의 적은 병력으로 2만여 명의 왜적을 격퇴하고,
진주성을 지킨 것으로 나타난다.
촉석정충단비(矗石旌忠壇碑)
이 비는 조선 선조 26년(1593) 6월 19~29일 사이에 있었던 제2차 진주성싸움에서
장렬하게 순국한 삼장사 김천일(김천일), 황진(황진), 최경희(최경희) 및 군. 관. 민의
영령을 제사하기 위하여 세운 전충단 비석이다.
진주성 제1차 전투에서 패한 왜군은 이에대한 보복전을 시도, 도요도미히데요시의
특명에 의해 카토오 키요마사. 코니시 유키나가 등이 이끄는 최정예 대군을 편성하여
2차로 진주성을 공격해 왔다.
이 때 3장사를 중심으로 뭉친 진주성의 군. 관. 민은 압도적으로 많은 적의 공세에
두려움이 없이 맞서 전원이 순국하는 장렬한 최후를 맞았던 것이다.
김시민장군 전공비가 경남문화재 1호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기록이 새겨져 있다.<전공비 옆>
임진왜란 때 사용했던 포
이것은 김시민장군 전공비 뒷쪽에 전시된 것인데, 진주성에는 이곳 말고도
다른 두 곳에 더 전시를 해놓고 관광객들이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진주성 임진대첩 계사순의단
1592년(임진년) 음력 10월, 진주성 제1차 전투시,
김시민 진주목사를 비롯한 아군 3,800여 명이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 2만 여명과
6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을 물리친 임진년 진주성 대첩을 기리고.
이듬해인 1593년(계사년) 음력 6월, 진주성 제2차 전투시,
창의사 김천일.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최경희. 충청도병마절도사 황진 등
세 장사를 비롯한 의병. 관군 6.500여 명과 피난민 6만여명이 풍신수길의 명령으로
진주성을 재 공격해온 왜군 10만 여명을 맞아 11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모두 순의하였으므로 그분들의 충혼을 위령하기 위하여
1987년 문화재 관리국에서 건립한 것이다.
임진대첩 계사순의단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중심으로 왼편 전면에는 김시민장군의
전적과 추모의 글을 새겨 놓았고, 오른편에는 계사순의에 대한 글이 전면에 새겨져 있다.
왼쪽 측면에는 김시민장군의 진두지휘하에 왜군을 무찌르는 3편의 조각 작품이 있으며
오른쪽 측면에는 의기 논개가 왜장과 함께 남강에 뛰어드는 장면등 3편의 조각작품이
부착되어 있다.
단 뒷편에는 임진대첩과 계사순의에 대해 조선시대 한문으로 수록해 놓은 여러 서적을
한글로 번역하여 새겨 놓았다.
1987년 12월에 세웠으며, 번역은 이정섭(李廷燮), 글씨는 서예가 정문장(鄭文丈)씨가 썼다.
쌍충사적비(雙忠事蹟碑)
이 비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싸우다가 전사한 제말(諸沫)장군과 그의 조카 제홍록(諸弘祿)의 공을 새겨 놓았다.
제말장군은 경상도 고성사람으로의병을 모아 웅천. 김해. 의령등지에서 왜적과싸워
곽재우 장군과 함께 그 공적이 조정에 알려져 성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성주싸움에서 전사했다.
조카 제홍록은 숙부를 따라 공을 세운 후 이순신장군 휘하에 있다가 정유재란 때 전사 하였다.
정조대왕은 이들의 충의를 기리도록 이조판서 서유린에게 명하였고,
그는 비문을 짓고 쌍충각을 촉석루 옆에 세웠다.
그 후 일제 때 일본관원들에 의해 비각이 헐리고 비가 방치되엇던 것을 1961년 지금의 자리인,
의기사 뒷편으로 옮겼다.
공북문(拱北門)
진주성의 주된 문으로 2002. 5. 1 준공하였다.
공(拱)은 손을 모아 가슴까지 올려 공경한다는 뜻,
북은 임금님이 계시는 북쪽, 북두를 뜻하는 말이다.
공북문은 17세기 이후에 그려진 진주성도 및 진주지도에 북쪽으로 나 있는 문으로
공복문으로 표기되어 있고, 홍예식 2층 다락루이다.
공복문은 김시민 동상 앞 길에서 오른쪽으로 30여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충무공 김시민 장군 동상 (원경)
충무공 김시민장군 동상 (중경)
충무공 김시민장군 동상 (근경)
받침 돌 (앞면)
받침 돌 (뒷면)
충무공 김시민장군 동상 (뒷면)
김시민장군 동상 왼쪽에 있는 오르막길 입구에 세워진 안내표지판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
김시민 장군 동상을 오른쪽에 끼고 100여m 언덕길을 오르면
경상남도문화재 제3호인 영남포정사에 도착하게 된다.
조선 광해군 10년(1618)에 병사 남이흥(兵使 南以興)이 내성의 동문을 고쳐 세우고,
성문 옆에 대변루(待變樓)를 설치하였다.
이것이 망루의 전신이다, 이 문은 고종 32년(1895) 경상도 가 남북으로 분리될 때
관찰사 청사의 관문으로 영남포정사라 했으며 도청의 정문이기도 하다.
비석군(碑石群)
영남포정사를 지나 언덕에 오르면 진주지방을 위해 공헌 해 온 역대 지방관리들을 위한
공덕비들을 한데 모아 놓은 비석군이 나온다.
북장대(北將臺)
비석군 앞을 통과하여 성벽을 끼고 오르면 경상남도 문화재 제4호인 북장대가 나온다.
북장대는 조선 광해군10년(1618)에 임진왜란으로 상한 것을 병사 남이흥(兵使 南以興)이
중건한 건물이다.
북장대는 군사건물 중에서 조선 중엽에 속하는 다락집형으로 후대에 세워진 군사건물의
모범이 되었다.
북장대는 내성 북쪽 끝 제일 높은 곳에 있어 낭떠러지 밑의 성 밖은 물론 성대와 외성에
포진한 성병(城兵)까지 지휘할 수 있다.
북장대에서 내려다 본 성벽
포루에서 북장대 쪽을 바라보고 찍은 성벽의 모습
포루(砲樓)
포루에는 임진왜란 때 사용한 대형총통, 즉 천자총통(天字銃筒), 지자총통(地字銃筒).
현자총통(玄字銃筒) 등이 전시되어 있다.
포루에서 내려와 창렬사를 향해 가는 도중 뒤를 바라 보며 찍은 사진.
창렬사(彰烈祠)에 오르는 길
창렬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30여개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계단을 오르면 유중문(有重門)이 나온다.
이중으로 된 앞문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듯 하다.
유중문을 열고 들어가면 좁은 뜰을 통과하여 또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이 문
의 이름은 '전파문'이다.
창렬사(彰烈祠)/ 경상남도 문화재 제5호
이 사당은 임진왜란 당시 계사년(1598)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분들의
신위를 모시기 위해 선조 40년(1607)에 건립된 사액(賜額) 사당이다.
고종 5년 대원군의 사원철폐령으로 훼절된 충민사에 모셔져 있던
충무공 김시민장군의 신위와 3장사 등 39위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김시민 장군의 신위를 맨 위자리에 모시고 있으며,
매년 음력 3월초 정일(丁日)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창민사 주 건물 옆에는 양쪽으로 대칭을 이루는 작은 사당이 지어져 있다.
이곳에도 많은 위패가 모셔져 있다.
오른쪽 건물 옆에는 제장군졸지위(諸將軍 卒之位)라는 비석이 서 있다.
제장군지위(諸將軍之位)라고 새겨진 비석
표지석에는
"대통령권한대행,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육군대장 박정희 각하"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호국사(護國寺)
고려시대 창건한 것으로 전하는 이 절은 원래의 이름이 산성사(山城寺)였다고 한다.
고려말기에 왜구를 막기위해 진주성을 고쳐쌓고, 승병을 양성하기 위해 창건된 것으로
생각되는 이 절은 임진왜란 때는 승군의 근거지가 되었다.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성과 함께 운명을 같이한 승병들의 넋을 기리어 임진왜란 후
호국사(護國寺)란 이름으로 재건되었다고 전한다.
최근에 진주성을 정화하면서 일주문 자리가 발견되어 새로 세웠으며,
사찰의 건물들은 모두 근년에 새로 이룩된 것이다.
대웅전/ 일주문을 지나서 정면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호국사 명부전
일주문을 지나 정면에 대웅전이 있고, 왼쪽에 이 명부전이 있고 그 맞은편에
요사채겸 법당이 있다.
승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지었기 때문에 이 절에서 명부전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뒷쪽에서 바라 본 호국사.
호국사 앞에는 시내로 통하는 계단길이 있다.
즉 진주성에는 매표소가 세 개가 있다는 얘기가 된다.
1. 촉석문, 2. 공복문, 3. 호국사 앞 등이 바로 매표소가 있는 출입문이다.
호국사 앞에서 서장대로 올라가는 길.
서장대(西將臺) / 경상남도 문화재 제6호
진주성 서쪽의 지휘소로서 일명 회룡루(回龍樓)라고 불리고 있다. 건립년대는 확실치 않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보면 이 서장대도 규모는 작았으나 촉석루와 같은 다락집이었다고 한다.
서쪽 벼랑위에 세워져있는 이 서장대는 푸른 남강과 벼랑이 조화를 이루고 있고
주위 전망이 수려하여 촉석루, 박물관, 호국사를 연결하는 좋은 산책코스이다.
규모는 팔작지붕에 목조외가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서장대에서 내려다본 천수교와 주위경관이 무척 아름답다.
서장대에서 걸어 내려와 뒤를 바라보고 찍은 풍경으로 더 없이 좋은 산책로이다.
오른쪽은 호국사 뒤쪽에서 일주문을 향해 내려가는 길이다.
앞쪽의 비는 3.1 독립운동 기념비이다.
이 비는 6,25 동란시 전승을 기념하는 비이다.
국립진주 박물관
이 이름다운 석조간판은 촉석문 앞 매표소 부근에 세워져 있는 것이다.
국립진주박물관 전경
국립진주박물관은 1984년에 국립박물관으로는 여섯 번째로 지은 것으로
진주성내 호국사와 창렬사 앞쪽에 위치하고 있다.
개관 당시에는 가야문화를 중심으로 한 박물관이었고,
그 후 임진왜란 3대 대첩지었던 진주성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 임진왜란을
주제로하는 역사박물관으로 1998년 재 개관하였다.
여기에는 임진왜란 관련 유물 800여점을 전시하고 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난 동기. 전황. 결과. 역사적 의미 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아
교육적으로도 좋은 장이되고 있다.
본관 건물은 우리나라 전통목조탑을 석고건물로 형상화한 것으로
건축가 김수근 (1931~1986)선생의 대표적 작품이며,
상설전기시설과 기획전시실을 갖추고 있다.
2001년에는 별관이 증축되었으며 이곳에는 재일동포 두암 김용두 선생의 기증유물전시실과
강당. 사회교육실이 있다.
두암관에는 100여점이 전시되고 있다.
[찾아 가는길]
서울쪽에서 가려면 대전에서 통영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타고 달리
다 진주 톨게이트로 빠져 나오면 된다. 진주시로 접어드는 산에는
'천년의 역사가 흐르는 강의 도시'라는 환영 간판이 눈에 띈다.
진주성을 가려면 톨게이트를 통과하여 조금 달리다 우회전을 하여
산청방면을 향해 달리다 보면 위의 간판이 나온다.
왼쪽으로 진주 남강을 끼고 달리다 위의 간판이 보이는 삼거리에서
좌회전을 해 들어가면 곧 진주성에 도착하게 된다.
시외버스를 이용할 경우, 전국 어디에서 오든 진주성이 진주시외버
스터미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찾기 쉽다.
푸른빛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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