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종 용흥궁 잠저지 (潛邸址)
[답사 2006. 6. 18 한국의산천 ]
왕세자와 같이 정상법통이 아닌 다른 방법이나 사정으로 임금으로 추대된 사람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을 잠저(潛邸)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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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종의 잠저지(潛邸址) 용흥궁 (지방유형문화재 20호) ⓒ2006. 6. 18 한국의산천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441
이곳은 고려 궁지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으며 강화도령 철종이 임금님으로 등극하시기 전에 기거하시던 잠저지이디.
원래는 3칸짜리 초가집이었으나 임금님이 되신지 4년 되던 해에 강화유수 정기세가
현재와 같은 기와집을 짓고 용흥궁이라 하였다.
문을 들어서서 오른편으로 계단을 올라가면 작은 비각안에 '철종잠저구기'라 적혀
철종이 머물던 곳임을 표시하고 있다.
강화시내를 남북으로 지나는 도로에서 주택가쪽으로 약 5분거리 (안내판 있음: 용흥궁)
ⓒ2006. 6. 18 한국의산천
골육상쟁의 제물이 되는 운명을 피하려고 왕족이 한낱 나무꾼이 되어 살다가 갑자기
부름을 받고 왕위에 오른 강화도령이 살던 곳에 지금은 철종 잠저지(潛邸址)의 비가 서 있다.
(잠저비 표지석은 문안 왼쪽 누각안에 있다)
ⓒ2006. 6. 18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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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6. 18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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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의 아들중에 은신군, 은전군은 자식이 없었고, 은언군만 상계군, 풍계군, 전계군
세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상계군은 역모를 꾀한 자들이 추대한 죄로 정조때 처형되었고, 은언군도 처형되고,
풍계군은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남은 사람은 전계군 뿐이었는데 전계군은 아버지와 형들이 비명횡사하는 것을
보고 자랐고 집안은 거의 쑥대밭이 되어서 강화도에서 농사를 지며 근근이 연명하는 처지였다.
전계군이란 것도 나중에 아들이 철종이 된 후에 붙여진 칭호이며 그 전에는 왕족 대우도
받지 못했다.
전계군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 원경(元慶)이 또 안동김씨들에 의해서
역모죄로 처형되었습니다.
그래서 둘째인 영평군(나중에 붙인 이름)과 셋째 원범(元範)만 남게 된 것입니다.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철종(이원범)의 유명한 별호는 바로 "강화도령"이다.
안동김씨 세도 이후 왕가의 직계를 제외한 왕손들이 역모로 많이 사망하자,
철종의 아버지 전계군은 자신이 왕족임을 숨기고 먼 강화도에 와서 농사나 지으며 살고
있었으며 철종은 자신을 데리러 궁에서 나올때까지 자신이 왕족인것도 몰랐다고 했다.
사연인즉 순조가 죽기전에 세자인 효명세자가 사망하자 어린 왕손인 헌종이 왕이 되고
이 헌종이 24세 어린 나이에 후사가 없이 사망하자 왕의 직계에서는 적당한 인물이 없게된다.
그 때 흥선대원군의 옹립이 유력하였으나 안동김씨에서 반대하여 강화도에서
이원범을 데려와 철종으로 세우게 된다.
이후 철종은 안동김씨의 엄청난 세력에 휩싸여 제 뜻을 펼치지 못하고....
ⓒ2006. 6. 18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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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6. 18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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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의 무상함속에 철종 잠저지의 담장에는 담장이 넝쿨 잎사귀가
유월의 푸르름을 더하고 있다.
ⓒ2006. 6. 18 한국의산천
교통
강화대교→강화읍→고려당삼거리에서 고려궁지방향 우회전후 20m직진→우회전하여
골목 안으로 50m→용흥궁(좁은 골목 주택가 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입장료 없음
▲ 섬 전체가 노천 박물관인 강화도 유적지 안내도(클릭,확대해서 보세요)
ⓒ2006. 6. 18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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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국의산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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