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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대 동계전투인 '장진호전투', 총알보다 무서웠던 '추위'

기산(箕山) 2017. 6. 26.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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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대 동계전투인 '장진호전투', 총알보다 무서웠던 '추위'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최종수정 2017.06.26 16:15 기사입력 2017.06.26 14:52


66년만에 방한한 참전용사들, "수혈관, 모르핀조차 얼어붙었다"



장진호전투에 참가했던 미군 모습(사진=위키피디아)



지난 25일 오후,
6·25 전쟁 참전 용사 제임스 워런 길리스(87)씨가 전우들과 함께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을 찾았다.


유엔 참전국 전사자 명비(名碑) 앞에 선 노병들은 국화 한 송이를 헌화하고 거수경례했다.

치열했던 전쟁터를 겪고 66년 만에 한국 땅을 밟은 노병들의 눈가는 촉촉했다.


길리스씨는 미군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투이자
모스크바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세계 3대 동계전투로 알려진
'장진호(長津湖) 전투'에 참여했던 용사다.


장진호 전투는 1950년 11월26일부터 12월13일까지 개마고원 장진호에서 진행된
중공군과 미군의 혈전이다.


미군이 유일하게 겪은 영하 40도의 혹한기 전투로
중공군의 갑작스러운 기습공격에 개마고원까지 진출했던 미 해병대 1사단이 큰 피해를 입었다.


길리스씨는
"무기는 물론이고 부상병에게 써야 할 수혈관·모르핀조차 얼어붙었다"고 회상했다.


얼마나 끔찍한 전투였는지 이때 살아남은 미군 참전용사를 가리켜 'The Chosen Few'라고 지칭한다.
글자그대로 풀면 장진호 전투에서 살아남은 선택받은 소수란 의미다.

장진(長津)의 일본어 독음을 따서 Chosin(ちょうしん)이라고 불렀던 것을 그대로 쓰기 때문이다.
당시 미군에게는 한국어 지도가 따로없었고 일본어 지도뿐이었기 때문에 일본식 독음이 붙었다고 한다.



장진호 전투 중 동사한 병사들의 모습(사진=위키피디아)



당시 세계 최강군이었던 미군이 이렇게 참혹한 전투를 치르게 된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일단 전투 직전까지 중공군의 규모가 정확히 판단되지 않았다.


10월 5일 중공 외상인 저우언라이(周恩來)가

UN군이 38선 이북으로 진격할 경우 개입하겠다고 밝혔으나

미국에서는 신생 중공이 외교적인 공갈을 치는 것으로 판단했다.


1949년 국공내전을 겨우 수습하고 집권한 중공이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으로
제3차 대전에 필적하는 대규모 전투에 개입하리라고 생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10월 말부터 중공군의 대규모 개입과 관련한 경고들이 있었으나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극동사령부에서는 3만 가량의 중공군이 제한적인 개입을 할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예상은 완전히 빚나갔으며 11월까지 중공군 30만명이 북한 전역으로 들어왔다.


이 중공군들은 18만명은 서부전선에, 12만명은 동부전선에 투입됐으며
이들은 항일전투, 국공내전 등 30년 가까운 세월을 각종 전장터에서 보낸 베테랑들이었다.



장진호전투에서 전사한 중공군 모습(사진=국방부 정책 블로그)



특히 장진호 전투는
1만2000여명 규모의 미 해병 1사단을 궤멸시키고자

7만에 가까운 중공군 6개사단이 투입된 전투였다.


미군은 숫적 열세와 참혹한 추위에 맞서 싸우며 치열한 전투를 이어갔다.


중공군은 연대 이하에 무선통신 장비가 따로 없고 나팔, 뿔피리, 꽹과리 등을 치면서 밀고 내려왔다.
중공의 인해전술이 시작된 것.


아직도 장진호 참전 용사들 중에는 피리소리나 나팔소리, 꽹과리 소리를 들으면
몸서리 쳐진다는 수기가 남아있을 정도다.
 
그나마 중공군이 무기와 병참, 항공지원 등이 형편없던 덕분에
살아남은 미군들은 흥남부두에 모여 민간인들과 함께 해상철수를 감행할 수 있었다.


11월27일부터 12월11일까지 장진호 전투에 참여했던 미국 1 해병사단은
전사상자 3637명, 비전투전사상자 3657명을 기록했으며 비전투사상자 대부분은 동상으로 사망했다.


한편 중공군은 피해가 더 극심해 2만5000여명이 사망했고 1만2500명에 가까운 부상자가 발생했다.
중공군은 미군을 남쪽으로 몰아내는 것에는 성공했으나 전투에 참여한 6개 군단이 거의 궤멸됐다.


미군의 화력상 압도적 우위가 확인되면서 중공군은 한국전쟁 이전 북한영토 회복을 최우선 목표로
제한적인 전투를 수행하게 됐다.


이때 참전한 미군의 희생으로 흥남철수작전이 가능했었기 때문에
아직도 우리나라는 물론 미국 내에서도 이 전투에 대한 회고와 칭송이 많다.


지난 2004년에는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미국 1해병사단을 방문해 장진호 전투를 치뤘던
미국 1해병사단의 전통에 대해 칭송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한편 이 전투는 동계전투 중 동상 부상자에 대한 처우에 대해서도 새로운 기준을 정립했다.


미국 내에서 '장진호 전투 동상 위원회'의 노력으로 장진호 전투의 생존용사 가운데 4000여명이
전후 47년 만인 1997년, 비로소 미국 원호청의 '동상 후유증 보상'을 받았다.


그 이전에는 동상 후유증이 보상대상에 포함되지 않았었다고 한다.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