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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정기의 상징인 단군 친일파가 중히 여긴 이유

기산(箕山) 2016. 10. 5. 04:14

민족 정기의 상징인 단군 친일파가 중히 여긴 이유

 

                                                                                        매일경제 | 이문영 | 입력 2016.10.04. 06:06

 

[물밑 한국사-15]

 

일본제국의 식민사학자들이 단군을 가공의 인물로 취급하고 일제는

단군을 박해하였다는 것은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이다.

 

그런데 친일파들,

그것도 손에 꼽힐 만한 악질 친일파가 단군을 숭배하는 운동을 펼쳤다면 믿어지겠는가?

 

하지만 사실이다.

또 조선의 사대주의 선비들은 중화만 떠받들고 단군은 무시했다는 일반적인 인식도 있다.

 

그런데 유림들이 단군을 숭배하는 운동을 펼쳤다면 믿어지겠는가?

하지만 이것도 사실이다.

 

평안남도 강동군에 단군릉이 있다.

북한이 진짜 단군릉이라고 뻥을 치는 바람에 더 유명해졌는데,

원래 옛날부터 단군릉이라고 알려져 있던 곳이다.

 

'동국여지승람'에 단군릉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북한이 조성한 단군릉.

북한이 조성한 단군릉.

 

 

조선시대 유림들은 이 단군묘에 제사를 지냈는데, 강동현감이 주관하여 봄가을로 올렸다고 한다.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단군을 이단시하거나 홀대했다는 이상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러다가 갑오경장 이후 제사는 더 진행되지 않았다.

1909년 단군묘는 능으로 숭봉되었다.

 

하지만 수리는 이루어지지 못해서(수리비로 중앙정부가 책정해 준 금액이 2000~3500원이었지만

집행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후 단군릉은 점점 더 황폐화되었다.

 

그래서 단군묘인지, 단군릉인지 여전히 모호한 상태였다.

1923년 강동 유림단체인 강동명륜회에 의해서 200여 원을 갹출하여 담장과 문이 만들어지는데,

이 당시 명륜회장은 강동군수, 즉 친일관료가 맡고 있었다.

 

이들은 내선일체, 동조동근론에 의해 단군을 이용하고 있었다.

 

대체 일제와 친일파가 민족의 구심점인 단군을 식민통치에 이용했다는 게 무슨 말인가 싶을 것이다.

그런데 단군을 보는 일제의 관점은 부정론 한 가지가 아니었다.

 

일제에는 단군을 자신들의 조상신인 아마테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의 동생 스사노 노미코토

혹은 스사노의 아들로 보는 관점이 있었다.

 

아마테라스와 단군이 혈연이라는 것은 일본인과 한국인이 혈연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내선 - 일본과 조선은 일체 - 하나라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일제강점기 때의 단군릉 모습.

일제강점기 때의 단군릉 모습.

 

 

이러한 두 가지 관점이 혼재해 있었기 때문에

단군에 대한 언급이 일체 금지된다든가 하는 일도 없었다.

 

가령 신궁봉경회 같은 단체는 박영효, 민영휘와 같은 친일파들이 주도하면서

아마테라스와 단군을 함께 제사 지낼 신궁을 건설하고자 했다.

 

중앙에는 아마테라스가 있고 좌우에 단군과 조선 태조를 놓을 작정이었다.

대표적인 친일파인 민영휘는 단군신전봉찬회 고문을 맡기도 했다.

 

1929년부터 평남유림연합회 주도로 단군묘 수호계(본래 단군릉이라 불러야 하는데

여전히 묘라고 불리고 있음)가 조직되었는데, 평남유림연합회 역시 친일단체였다.

 

1932년에는 강동군에서 단군릉수호각건축기성회가 조직되어 단군릉수축운동이 벌어진다.

평남유림연합회의 활동에 더 이상 기댈 것이 없다고 생각되어 강동명륜회의 김상준과

강동군수 김수철이 앞장선 것이다.

 

김상준은 평안도평의회원으로 역시 친일파였다.

1881년생으로 소유하고 있는 토지만 150정보(당시 시가 5만~6만원)에

소작인 80여 명을 거느린 강동의 대지주였다.

 

한일병합 후 1911년에 강동군 초대 참사로 일제의 행정에 참여했으며

1912년에는 강동면장, 강동면평의원,

1916년에는 명치신궁봉찬회 조선지부 평안남도 군위원 등등 적극적으로

일제에 협력하고 있었다.

 

3·1운동 당시에 강동군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노력한 바 있다.

특히 장남 김대우가 당시 경성공업전문대 학생으로 3·1운동에 참여하여 체포되자

자신의 충성심을 호소하며 아들의 석방을 위해 탄원서를 보내기도 했다.

 

1924년에는 평안남도평의회원, 1937년에는 평안남도 도의원이 되었다.

 

김상준의 동생 김상무도 강동면장을 역임했고 다른 동생 김상화는 의사였는데,

평안남도 도회의원을 역임했다.

 

한때 3·1운동에 참여했던 아들 김대우는 아버지 덕에 무사히 풀려난 후

일본 유학을 떠났으며 귀국 후 총독부 관리가 되었다.

 

1928년에는 평북 박천군수로 취임했다. 스물아홉의 나이였다.

1930년에는 용강군수, 이후 도이사관, 평북 내무부 산업과장, 경상남도 이사관,

총독부 학무국 사회과 사무관, 조선사편수회 간사로 2년을 지내기도 했다.

 

그 뒤 총독부 사회교육과장이 되었다.

1937년에는 '황국신민서사'를 작성했다.

 

1938년 당시 총독부 내 고등관은 12명이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선두를 달리는 인물이었다.

1943년에는 전북도지사, 1945년에는 경북도지사로 있다가 해방을 맞았다.

 

이 정도 인물이니 당연히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무죄로 풀려났다.

 

김대우의 동생 김호우는 경찰이었다.

교토제국대학을 졸업하고 평남 양덕경찰서에서 경부보로 시작,

평양경찰서 경부로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후 마포서장을 거쳐 내무부 치안국 수사과장, 충청남도 경찰국장을 지냈다.

 

강동군수 김수철은 메이지대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1929년 영변군수가 되었다.

오산학교에 기부를 약속하고 이행하지 않아 고소당했고 이에 져서 군수직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한편 단군릉 수축을 위해 1933년 12월 말까지 약 822원의 돈이 모였다.

이 중 동아일보가 기부한 돈이 500원.

 

성과가 미미한 탓에 조직 개편이 이루어지고 강동군 전체에 걸쳐 모금운동이 펼쳐졌다.

1934년 봄까지 성금은 2800여 원이 들어왔다(총 3600여 원).

 

그러나 이 비용으로는 능을 수축하는 데 필요한 재원에 턱없이 부족했다.

필요한 자금은 수만 원에 달했다.

 

그나마 있는 돈으로 아쉬운 대로 수축작업이 시작된다.

그러나 결국 수호각은 건립하지 못한 채 1935년 10월 단군릉제를 끝으로

단군릉수축기성회의 활동은 마감되었다.

 

일제는 단군릉 수축운동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는 내선일체, 일선동조를 내걸은 문화통치의 영향이다.

 

단군릉 수축운동에 기부한 많은 사람들은 일제에 대한 반감과 민족운동에 참여한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나,

이 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은 일제에 적극적으로 친일하고 있던 사람들이며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고 일제의 문화통치에 기여하고 있었다.

 

'단군을 숭배하는 일이 친일과 양립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분명 있겠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있었다.

 

[이문영 소설가]

 

*이 글은 <일제강점기 단군릉수축운동>(김성환, 경인문화사)을 참고하여 작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