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관

춘천 장절공묘역 답사 그리고 꽃과 제비 구경

기산(箕山) 2016. 10. 3. 00:12

http://blog.daum.net/drhong77/89

 

춘천 장절공묘역 답사 그리고 꽃과 제비 구경

 

자 이제는 장절공 신숭겸장군이 잠드신 곳, 춘천 장절공 묘역에 관해서 알아볼까요?

 

전철이나 ITX청춘열차, 직행버스로 일단 춘천시내로 오셔야 됩니다.

 

그리고는 버스터미널이나 남춘천역에서 중앙로로 가는 버스(노선이 많음)를 타고

‘약사명동 주민센터’나 ‘인성병원’에서 내려 82번 버스로 갈아타고 30분 정도 가서 종점에서 내리면 됩니다.

 

버스요금은 어른이라면 현금 1,300원, 교통카드는 1,150원이고 한번은 환승이 가능합니다.

 

82번 버스는 하루 11회 왕복을 하는데,

기점에서 출발 시각은 06:00, 08:05, 09:45, 11:20, 13:15, 14:30, 16:05, 18:00, 19:15, 21:00 이며

기점에서 출발한 시내버스가 약사명동주민센터나 인성병원까지 걸리는 시간은 15~20분 정도 걸립니다.

 

종점에서 시내로 나오는 버스 출발시각은

06:45, 09:00, 10:45, 12:15, 14:10, 15:25, 17:05, 18:55, 20:15, 21:50입니다.

 

 

 

 

궁예를 축출하고 왕건이 태조로 즉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태조 1(918)1등 공신이 되었다.

이후 태조 10(927)년에 있었던 후백제와의 공산 동수전투에서 패배하여 왕건을 대신하여 전사하였다.

 

신숭겸과 관련하여 삼국유사2 기이 후백제견훤(後百濟甄萱)조에는,

927년에 태조가 정예한 기병(騎兵) 5,000을 거느리고 공산(公山) 아래에서 견훤을 맞아서 크게 싸웠으나,

태조의 장수 김락과 신숭겸은 죽고 모든 군사가 패했으며, 태조만이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같은 내용이 삼국사기50 열전10 견훤조에도 기록되어 있다.

 

신숭겸의 출신과 죽음에 대하여

고려사92 열전5 홍유(洪儒) () 신숭겸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신숭겸의 처음 이름은 능산(能山)이니 광해주(光海州) 사람이다.

체격이 장대하고 용맹이 있었다.

927년에 태조가 공산 동수에서 견훤과 싸우다가 불리하게 되어

견훤의 군대가 태조를 포위하였는데 형세가 심히 위급하였다.

 

이때 신숭겸이 대장으로 있었는데 김락(金樂)과 더불어 힘껏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태조가 그의 전사를 매우 슬퍼하였으며 시호를 장절이라 하고

그의 동생 능길(能吉), 아들 보(), 김락의 동생 철()을 모두 원윤(元尹)으로 등용하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하여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崇謙初名能山光海州人 長大有武勇 十年 太祖與甄萱戰於公山桐藪不利萱兵圍太祖甚急 崇謙時爲大將與元甫

金樂力戰死之 太祖甚哀之 謚壯節 以其弟能吉子甫樂弟鐵並爲元尹 創智妙寺 以資冥福)”

 

이에 의하면, 신숭겸의 출신은 광해주로, 현재의 춘천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신숭겸의 출신에 대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41 황해도 평산도호부 인물조에는 달리 기록되어 있다.

 

, 신숭겸은 원래 전라도 곡성현 사람인데

태조가 성()을 주고 평산을 본관으로 하였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39 전라도 곡성현 인물조에도,

신숭겸이 세전(世傳)에는 죽어서 현()성황신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그가 곡성 출신이라고 전하고 있다.

 

신숭겸에 관한 최초의 공식기록인 고려사에서는

고려 건국 과정과 공산 전투에서의 역할만 부각되어 있을 뿐,

출신지나 가계, 수학과정, 관직 생활 등에 대해서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 고려사에서 신숭겸의 가계와 출신지에 대한 기록은,

처음 이름이 능산이고 광해주 사람이며, 체격이 장대하고 용맹이 있었다는 것 뿐이다.

 

이에 대하여 신숭겸이 평민신분층이라는 견해도 있고

(김은택, 1999),

동시대에 활약했던 인물들 가운데 ()”자를 이름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호족 출신으로

후삼국 쟁투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신숭겸도 호족 출신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인재, 2001)

 

신숭겸의 출신지에 대해서는

고려사에 의하면 광해주(춘천) 사람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41 황해도 평산도호부 인물조에 의하면 곡성현 사람으로

서로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신숭겸은 본래 곡성 출신인데 뒤에 춘천에 거주한 바 있으며,

태조가 그를 다시 평주(平州, 平山)에 본관(本貫)을 내려 평산 신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이수건, 1984)

 

, 광해주는 오늘날의 춘천인데,

이곳은 그가 타향에서 임시로 사는 우거지(寓居地)였으며,

그가 죽어서 곡성현의 성황신이 되었다는 것을 보면,

그가 곡성 출신일 뿐 아니라 일정기간 그곳에서 살았고

나름대로의 족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청주, 1996)

 

그런데 곡성 출신인 그가 언제 어떻게 왕건과 함께 활동하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이에 대하여 신숭겸이 조세(租稅)나 공부(貢賦), 역역(力役) 등 과중한 부담을 피해

곡성을 떠나 광해주로 이주하였으며, 이곳에서 궁예의 군대에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정청주, 1996)

 

한편, 신숭겸은 왕건이 900년대 초 서해안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왕건과 만나게 되면서

곡성을 떠나 궁예정권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광해주에 머물게 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신호철, 2007)

 

신숭겸은 왕건과 연결된 이후, 궁예를 축출하고 왕건이 태조로 즉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이로 인해 그는 태조 1(918)1등 공신에 올랐다.

 

그 후 신숭겸은 고려 태조 10년에 대구의 공산 동수 전투에서 견훤의 군대에게 태조가 포위되자

왕건을 대신하여 순절함으로써 태조를 사경에서 구하였음은 물론,

왕건으로 하여금 민족 재통일의 위업을 성취케 한 결정적 계기를 제공하였다.

(민병하, 1994)

 

대구 공산 전투가 발생하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다.

 

9279월 견훤은 정예군을 인솔하여 근품성을 쳐서 이를 불사르고, 진군을 계속하여

신라의 고울부를 습격하고 경주 교외에까지 육박하였다.

그러자 신라왕은 왕건에게 급함을 알려 구원을 요청하였고,

왕건은 시중 강공훤(康公萱)에게 군사 1만명을 주어 구원하게 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견훤은 처음 계획에 없던 신라 도성에 대한 군사적 점령을 감행하였다.

도성에 들어간 후백제군은 왕궁에 들어가 거처하면서 경애왕을 찾아내

자진(自盡)케 하였으며, 왕비를 능욕하는 등 만행을 자행하였다.

그리고 경순왕을 세우고 후퇴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왕건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경애왕의 죽음을 조제(弔祭)하는 한편,

견훤과 정면대결하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그 대결장소가 바로 공산 동수(桐藪, 동화사)였던 것이다.

 

그러나 태조 왕건이 정기 5천을 거느리고 직접 전투에 나선 공산 전투는

고려군의 일방적인 패배로 마무리되었다.

 

당시의 급박했던 정황은 안정복의 동사강목5하 정해년 겨울 11월조에는

다음과 같이 훨씬 사실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고려왕이 친히 정기 5천을 거느리고 공산 동수에서 견훤을 맞아 크게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견훤의 군사가 몹시 급하게 왕을 포위하였는데, 신숭겸의 모습이 왕을 닮았으므로 대신 왕의 수레를 타고

김락과 더불어 힘을 다하여 싸우다 죽었다.

 

견훤의 군사는 그를 고려왕으로 알고 목을 베어 가지고 갔으며 고려왕은 겨우 몸만을 모면하였다.

견훤이 승리한 기세를 타고 대목군(大木郡)을 취하여 전야(田野)에 노적한 곡식을 모두 불살랐다.”

 

이렇듯 공산 전투에서 고려군은 대장 신숭겸과 김락 등이 힘써 싸우다 모두 죽고,

왕건 역시 겨우 죽음을 모면하고 도망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이 전투에서 신숭겸의 대신 죽음은

왕건이 후삼국 통일전쟁에서 성공할 수 있게 만든 디딤돌이었고,

중세 사회 내내 그를 충절의 상징으로 만든 일대 사건이었다.

(이인재, 2001)

 

신숭겸은 죽은 후 머리가 잘려 시신만으로는 그를 구분할 수 없었는데,

유금필이 신숭겸의 왼발 아래에 사마귀 무늬가 있는데, 북두칠성과 같았다

신체적 특징을 근거로 시신을 수습하게 되었고,

이에 목공을 시켜 얼굴을 새겨 만든 다음 조복(朝服)을 갖추어 입혀

신숭겸의 출신지인 춘천 비방동에 묘소를 정하여 장례를 치루었다.

 

그리고 공산 전투 현장과 가까운 현 대구시 동구 지묘동 위치에 지묘사를 창건하여

명복을 빌게 하고, 신숭겸에게 장절공(壯節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문화콘텐츠닷컴

 

 

 

자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답사를 해볼까요?

이곳은 관광지가 아닌 유적지이므로 구경이라는 말보다는 답사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

 

 82번 버스가 목적지에 서있습니다. 정류장 이름은 장절공아주 간단하게 설명해주지요!

 

신숭겸 장군 동상 - 앞에 쓴 글에서도 말했듯이 대구와 곡성에도 똑같이 생긴 동상이 서있습니다.

단지 동상의 위치만 유적지의 앞이나?(춘천), 옆이냐?(곡성), 멀리 떨어진 입구에 있느냐?(대구)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동상의 옆쪽으로 나있는 길을 따라가면 3거리가 나옵니다.(버스 종점에서 145미터, 아주 가깝지요..*^0^*..)

3거리에는 비룡지라는 인공연못이 있는데 요즘(2016.6.11.일 현재)은 수련이 아주 예쁘게 피어 있습니다

 

 

 

속세와의 경계를 나타내는 홍살문. 홍전문이라고도 합니다.

 

 

장절공 신숭겸 장군이 잠드신 장절공 묘역 웬만한 왕릉에 못지않아 보입니다.

단지 무인석과 문인석, 석수, 장명등 따위의 석물이 없을뿐...

봉분이 3개인 것이 보이시나요?

 

봉분을 향해 오르는 길 -

약간 가파르긴 하지만 다리가 안 좋은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보다 2배의 시간만 쓴다면 아무런 무리도 없이 오를 수 있습니다.

 

곡장과 뚜렷하게 보이는 3개의 봉분

 

 

 

저멀리 춘천 시가지와 춘천의 진산인 봉의산이 보입니다.

참 내가 사진을 찍은 이곳까지는 올라가시면 안 됩니다.

나는 곡장에 올려 진 기와가 망가진 것이 있어서 살펴보려고 올라간 김에 곡장 너머서 사진을 찍은 것입니다.

 

- 이곳에서 해설을 하는 나도 평소에는 못 가는 곳으로 여태까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올라 갔었지요...

 

 

명당중의 명당이라는 장절공묘역은 다른 명당들과 차별되는 점이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명당이 남향이지만 장절공 묘역은 동남동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시계의 12시 방향을 북쪽으로 잡으면 6시가 남쪽, 3시가 동쪽, 9시가 서쪽을 가리킵니다.

장절공 묘역은 4시방향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신숭겸 장군의 사당인 장절사 전경

 

입구인 충렬문

 

 

신도비 1805년 당시 최고의 세도가 김조순이 짓고, 상단의 전자체는 좌의정 서매수가 쓴 것이라고 합니다

이제는 경내의 다른 건축물과 자연을 살펴볼까요?

 

기념비,

 

기념관

 

 

전사청

 

 

 

광인문과 상충재 문화관광해설사의 사무실도 이곳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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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신숭겸장군의 후손들인 대종중회에서 운영하는 사이트인데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될 만한 것만 무단 복사를 하여 왔습니다.

 

붉은 줄을 친 것이나 네모칸 안에 것만 보셔도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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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4월에 촬영할 때 핀 꽃구경을 하지요.

 

올봄에는 날씨가 변덕이 심하더니 꽃들도 정신을 못 차리더군요.

정상이라면 맨 처음에 개나리, 그다음에 진달래 - 철쭉 - 목련 - 벚꽃의 순으로 피고 지어야 될 것인데

올해는 전부다 동시에 피어났습니다.

 

한마디로 날씨 때문에 꽃들도 돌았다고 해야 될려는지...

 

자목련

 

벚꽃 - 뒤에 보이는 곳은 주차장, 기와집은 화장실입니다.

 

길가에 떨어진 벚꽃 꽃잎들 - 바람이 불 때면 마치 눈이 내리는 것 같이 꽃잎이 바람에 날리더군요.

 

박태기 꽃

 

개나리

 

희한하게 자라는 향나무들

 

 

 

우리나라 토종인 하얀 민들레 - 하얀민들레는 100% 토종민들레이고,

노란민들레의 99.99999999%는 외래종 민들레입니다.

 

토종 민들레의 특징은 꽃받침이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위로 바짝 붙어있습니다.

외래종은 수평이하로 쳐져있고요..

 

이것은 특별한 서비스입니다.

우리 집 마당에 있는 아주 희귀한 토종 노란 민들레입니다.

 

 

장절공묘역 바로 옆의 또 다른 볼거리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흥부놀부의 또 다른 주인공 제비는 최근에는 도시는 물론이고 농촌에서도 자주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제비가 떼거지로 살고 있는 곳이 있습니다.

장절공묘역 홍살문에서 100미터도 안 되는 곳에 있는 식당입니다.

 

음식 맛은 평범하다고 해야 될지 아니면 토속적인 맛이 강하다고 해야 될지 아리송한 정도의 이 식당

이 식당에 들어선 사람들은 제비와 제비집 구경에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 지 모를 경우도 생깁니다.

제비 구경해보세요

 

 

새끼제비 3마리가 나란히 ㄴ앉아 엄마, 아빠를 기다리고 있네요

 

 

재미있게 보셨나요?

그럼 다음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