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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조훈현의 미생탈출법.."복기가 있을뿐 묘수는 없다"

기산(箕山) 2015. 9. 11. 04:10

'국수'조훈현의 미생탈출법.."복기가 있을뿐 묘수는 없다"

 

                                                                      머니투데이 | 이영민 기자 | 입력 2015.09.10. 19:07

 

"졌는데 기분 좋은 복기는 없습니다. 이기는 준비를 위해 복기를 하는 것이죠."

패배 후 기분 좋게 복기를 한 경기가 있었냐는 20대 청년의 질문에 조훈현 9단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는 영원한 국수로 불리지만 좌절도 많이 맛 봤다.

자신이 일본에서 한국으로 귀국한 뒤 일본인 스승의 죽음도 겪었고 바둑계를 제패한 뒤로

스스로 키운 제자(이창호 9단)에게 1인자 자리를 내줬다.

 

그리고 세월을 거스를 순 없었다.
그런 그가 내놓은 승리를 위한 준비는 복기였던 것.

 

바둑의 승패가 갈린 뒤 복기를 통해 대국자들은 마주 앉아 자신들이 방금 전에 둔 대국 내용을 되짚어 본다.

패배 직후 자신의 실수를 바라보기란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바둑 기사들은 복기를 통해 성찰하고 성장한다.

패자는 또다시 지지 않기 위해, 승자는 계속 이기기 위해 머리를 맞대는 것.

 

 

 

↑ 9일 저녁 7시 서울시 덕수궁 정관헌에서 진행된 '정관헌에서 명사와 함께' 행사에서

조훈현 9단이 강연을 하고 있다./ 사진=이영민 기자

 

 

조 9단은

"복기는 자기의 잘못한 부분을 다시는 하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며

"그래야만 다음에는 지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복기가 필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가을이 본격적으로 시작한다는 백로(白露)를 하루 넘긴 9일 저녁 7시,

선선해진 바람을 맞으며 서울시 덕수궁 정관헌에 모여 앉은 시민들은

조훈현 9단의 단호한 대답에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조 9단의 말에 집중했다.

스타벅스코리아가 후원하고 문화재청 덕수궁 관리소에서 주최하는

'정관헌에서 명사와 함께' 행사에는 조훈현 9단의 인생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모인 시민들로 가득했다.

 

연세가 지긋하신 흰 머리의 바둑팬부터 최근 발간된 조 9단의 에세이에 감명받고 찾아왔다는 20대 청년까지

정관헌 내부는 물론 외부에 설치된 스크린 앞 객석을 꽉 채웠다.

 

 

↑ 9일 저녁 7시 서울시 덕수궁 정관헌에서 진행된 '정관헌에서 명사와 함께' 행사에서

조훈현 9단이 강연을 하고 있다./ 사진=이영민 기자

 

 

조 9단은 이날 강연에서 4살 때 처음 바둑돌을 잡았을 때부터

세계 최정상에 서게 된 1988년 잉창치배 결승, 15살 제자 이창호 9단에게 연달아 패했던 위기의 순간,

1998년 국수전에서 이창호를 꺾고 다시 정상에 오르기까지.

 

정상과 밑바닥을 여러번 오갔던 파란만장한 삶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들려줬다.

언제나 승리만 했을 것 같은 조 9단이지만 그의 인생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일본 바둑계의 거물 세고에 9단 밑에서 바둑을 배우던 그는 군입대를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당시만 해도 일본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 스승 세고에의 죽음 등을 이유로

한국에 머물게 됐다.

조 9단은

"한국에 와서 생활이 엉망이었다"며

"평생을 추구하던 길에서 방향을 잃으니 아무런 희망도 없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그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여동생의 대학 등록금 마련을 위해 나간 대회에서 우승한 것을 계기로

그는 한국 대회 모든 타이틀을 따내기 시작했다.

 

결국 한국을 넘어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올라선 그는 한국 바둑의 위상을 정상급에 올려놓았다.
조 9단이 숱한 실패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데는 스승 세고에의 역할이 컸다.

 

조 9단은

"세고에 선생님은 내게 바둑보다는 바둑의 정신을 알려주셨다"며

"선생님은 '고수가 되기 전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항상 말씀하셨다"고 회상했다.

이어

"세고에 선생님이 생각하는 스승의 역할은 제자가 가고자 하는 길의 울타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며

"이래라 저래라 가르치는 건 스승의 역할이 아니라고 생각하셨다"고 말했다.

스승 세고에의 뜻을 이어받았기 때문인지, 조 9단의 강연도 세고에의 교육관과 비슷한 인상을 줬다.

 

자식에게 어떤 정신 세계를 물려주셨냐는 20대 후반 한 여성의 질문에

"정신 세계에는 답이 없다"며

"어떤 인생의 길이든 최선을 다해서 나아가야 하는 것은 똑같다.

다만 최선의 방법은 자신이 보고 느끼고 깨달아야 한다"고 답했다.

조 9단은 결코 '이래라 저래라' 가르치지 않았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며 위로하지도 않았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바둑이 있는 법'이라는 웹툰 '미생'의 명언처럼.

 

청중들은 돌아갔다.

그가 묘수를 안겨주지는 않았지만 복기라는 확실한 미생 탈출법의 화두를 부여잡은 채로.



이영민 기자 letsw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