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립(鄭汝立, 1546∼1589)은 조선시대의 인물 중에서 가장 첨예한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한 사람이다.
그렇게 된 핵심적 원인은 그가 조선시대 당쟁의 중심적 사건인 기축옥사(己丑獄事, 1589, 선조 22년)를 불러온
장본인이었지만, 여러 의문을 남긴 채 사망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 결과 기축옥사는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조작과 진실의 양론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명민한 능력과 순탄한 출세
정여립의 본관은 경상도 동래(東萊)고, 자는 인백(仁伯)이다.
아버지는 군수ㆍ첨정(僉正, 종4품) 등을 지낸 정희증(鄭希曾)이다.
전주에서 태어났고 대동계(大同契)의 거점이자 피난했다가 죽음을 맞은 곳도
진안(鎭安) 죽도(竹島)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정여립의 지역적 기반은 전라도였다.
그는 뛰어난 능력을 지녔고 상당히 순조롭게 출세했다.
1570년(선조 3년) 우수한 성적(5등)으로 문과에 급제했다. 24세의 나이였다.
조선시대 평균 급제 나이가 30세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상당히 이른 성공이었다.
그 뒤 여러 하위직을 거쳐 37세 때(1583) 예조좌랑(정6품)이 되었고, 이듬해는 홍문관 수찬(정5품)에 올랐다.
이때까지는 흠잡을 데 없는 순탄한 출세였다.
무엇보다도 정여립은 당시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던 이이(李珥, 1536~1584)와 성혼(成渾, 1535~1598)의
각별한 인정을 받았다.
다시 말해서 그는 서인(西人)의 촉망 받는 젊은 인재였던 것이다.
서인과의 결별과 낙향
그러나 그의 인생은 중년에 와서 급변했다.
1584년(선조 17년) 수찬이 된 뒤 이이ㆍ성혼ㆍ박순(朴淳) 등 서인의 주요 인물을 비판하고
동인으로 돌아선 것이다.
이런 급변의 원인은 확실치 않다.
그가 이조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이이가 그의 직정적(直情的)인 성격을 문제 삼아 반대했기 때문이라는 설명과
이런 그의 기질이 동인의 영수인 이발(李潑, 1544∼1589)과 좀더 잘 맞았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아무튼 그는 갑자기 당파를 바꿨고, 선조는 그것을 비판했다.
그러자 정여립은 즉시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이런 행보는 그가 직정적인 성격의 소유자라는 판단을 뒷받침해 준다.
대동계의 조직
그 뒤 그가 역모를 꾸몄다고 제시된 주요한 증거는 대동계의 조직과 활동이었다.
정여립은 진안 죽도에 서실(書室)을 짓고 대동계를 조직해 매달 활쏘기 모임을 열면서 세력을 확장했다.
그 조직의 군사적 능력은 상당했던 것 같다.
1587년(선조 20년) 왜선들이 전라도 손죽도(損竹島)에 침입하자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으로
출동해 물리친 것은 그런 측면을 잘 보여준다. 그 뒤 대동계의 조직은 전라도와 황해도를 중심으로 확대되었고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邊崇福)ㆍ박연령(朴延齡), 해주의 지함두(池涵斗),
전라도 운봉(雲峰)의 승려 의연(義衍) 등 기인(奇人)과 모사(謀士)들이 모여들었다.
좀더 중요한 측면은 정여립의 생각이었다.
‘대동계’라는 이름 자체에서도 어떤 변혁의 지향을 읽을 수 있지만,
정여립은 “천하는 공공의 물건(天下公物)”이며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랴(何事非君)”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각각 중국 전국시대 때 왕촉(王燭)과 맹자(孟子)의 발언이지만,
그것을 먼 후대의 왕조국가에서 거론하고 지지했다는 것은 엄청난 의미를 갖고 있었다.
신채호(申采浩)는 이런 측면에 주목해 정여립을 혁명적인 사상가로 높이 평가했다.
기축옥사의 발발
정여립의 운명을 결정지은 기축옥사는 1589년 10월에 일어났다.
황해도관찰사 한준(韓準), 안악군수 이축(李軸),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 신천군수 한응인(韓應寅) 등은
정여립과 대동계의 무리가 황해도와 호남에서 동시에 서울을 공격해 대장 신립(申砬)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려는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했다.
조정에서는 즉시 선전관과 의금부 도사를 황해도와 전라도로 파견했다.
정여립은 변숭복에게서 제자 조구(趙球)가 자백했다는 소식을 듣고 진안 죽도로 도망쳤다가 자결했다.
그러나 같이 피신했던 아들 정옥남(鄭玉男)은 체포되어 문초를 받은 끝에
길삼봉(吉三峯)이 주모자고, 해서 출신 김세겸(金世謙)ㆍ박연령ㆍ이기(李箕)ㆍ이광수(李光秀)ㆍ변숭복 등이
공모했다고 자백했다.
옥사는 계속 확대되었다.
동인의 영수 이발은 정여립의 집에서 자신이 보낸 편지가 발견되어 고문을 받다가 사망했고,
그의 형제와 노모 ㆍ자식까지 모두 죽음을 당했다.
호남의 대표적인 처사(處士)였던 최영경(崔永慶, 1529∼1590)은 길삼봉으로 지목되어 고문 끝에 옥사했다.
그 뒤 3년 동안 옥사로 사망한 사람은 무려 1천여 명에 이르렀다.
이런 대규모의 희생을 겪으면서 동인과 서인은 화해할 수 없이 결별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