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관

[국악이론] 진도아리랑의 세계 <펌>

기산(箕山) 2012. 1. 14. 17:44

 

 

 

[국악이론]
진도아리랑의 세계

 

                                                                       ㅇ 대금기초 음악이론  설촌(雪村)청주 | 2011.10.23. 10:08

진도아리랑의 세계


-소리판, 놀이판을 여는 소리-
아리랑은 곡명에서 ‘아리랑’을 쓰거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나 ‘아리 아리랑····’

또는 ‘아라리가 났네’를 여음(후렴)으로 쓰는 노래로서, 곡명 아리랑은 여기에서 연유했다.

이를 정체성으로 한 노래군을 아리랑이라고 한다.

 

이런 노래 중

서울·경기의 본조아리랑, 강원도의 정선아리랑, 경상도의 밀양아리랑

그리고 호남의 진도아리랑을 우리나라 ‘4대 아리랑’이라고 한다.

이는 우리가 자연스럽게 부여한 대표성이다.

 

이들 네 가지 아리랑의 후렴은 다음과 같다.

○ 정선아라리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를 나를 넘겨 주오

○ 서울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밀양아리랑
   아리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어절씨구 아라리가 났다

○ 진도아리랑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모든 아리랑의 후렴에서 ‘아라리’가 후렴소(素)로 존재하여 동일체의 요소임을 알 수 있다.

이를 굳이 문화전파론 또는 진화론의 결과로 보거나

아니면 자연스런 인간 행위의 보편적 현상으로 보거나 간에

시공을 고려한다면 주목되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아라리’를 모든 아리랑이 담고 있어 이것이 어원의 최소 실사(實辭)이며,

동시에 동일성의 단서, 즉 DNA임을 알게 한다.

결국 아리랑이란 ‘아리랑’ 또는 ‘아라리’를 함유한 2행의 후렴 여부가

장르적 정체성을 확정 시켜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진도아리랑은 흥과 멋이 흥건한 육자배기 토리(idiom)에,

남도의 섬들을 전승지로 하고, 주로 여성들이 부른다는 점에서

다른 지역 아리랑이나 시속의 잡가들과 변별성을 지닌다.

 

진도아리랑은 남도음악권 중 무악(巫樂)에 기반을 두고 있는 음악으로,
매개자(무당/샤만)가 춤과 노래로 접신하여 황홀경 또는 무아지경에서 신을 즐겁게 하여
살아있는 이들의 바램을 성취시켜려는 과정에서 연주되는 음악이다.

 

그러므로 이 무악은 즉흥성과 신명성이 그 생성구조를 이룬다.

이는 많은 아리랑 중에 진도아리랑만의 속성이다.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남도음악,

그 중에서도 전라도의 잡가(雜歌) 진도아리랑에 한정해 그 위상을 정리한다면,

우선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을 할 수 있다.


그 하나는 남도에서 기능을 초월하여 어느 소리판에서도 불린다는 ‘소리의 개방성’,
둘은 화자(話者)가 주로 여성이라는 ‘사설의 여성성’이고,

셋은 남도음악의 기층인 ‘무악적 육자배기조의 음악성’을 들 수 있다.


진도에서 소리판이나 놀이판을 열고 닫는 소리는 거의 진도아리랑이다.
시작과 휘날레로 장식된다.
진도의 ‘노래사랑’은 진도군 지산면 소포리의 70년대 ‘노래방’의 존재인데,
이는  우리나라 ‘노래방 역사’라는 사실에서 상징적으로 축출된다.

이렇게 노래 부르기가 생활의 일부라는 점에서 일상적이며, 다분히 즉흥적인데

당연히 진도아리랑으로 노래판의 장을 열고 닫았다.


연구가 박병훈선생 조사(90년대 진도군 의신면 돈지리)의 경우,

이 최초의 노래방 소리판의 구성은 적게는 서너명으로 시작해서 예닐곱 명이 무반주로,

크게는  20여명 내외로 남성이 북 반주를 맡는 판이다.

사설을 매기는 선소리는 주로 여성들이 맡고, 고정적인 후렴인 뒷소리는 모두가 함께 참여한다.
서너 순배 정도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사설로 불려진다.

 

예컨대 진도아리랑의 제1절로 불려지는 다음의 사설,
“문경 새재는 몇 구비냐/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로구나”로 시작되고,

초성 좋고 비위살이 좋은 이가 자극적인 사설이나 재미있는 창작 사설을 불러 웃음판을 만들면

이내 춤이 곁들여지고 다음과 같은 걸판진 사설이 이어진다.

“베개가 낱거들랑 내팔을 베고/ 아실아실 춥거들랑 내품에 들게”

이런 남녀 간의 정분 얘기는 성능력이 여법하지 못한 남정네나 그의 어머니(시어머니)
또는 무능한 시아버지를 비아냥하는 사설로 이어져 왁자자껄한 놀이판으로 변해간다.


이때는 메기는 사설을 좌중이 돌아가며 주고받는 돌림노래 윤창(輪唱)이 된다.
이 윤창은 즉흥성의 폭을 넓여 노래 부르기를 놀이로 전이시킨다.

노래로는 긴장을 풀게 하고, 사설을 주고받게 하여 놀이로 충족시키는 ‘노래와 놀이판’이 되게 한 것이다.

● 진도아리랑의 역사


진도아리랑의 역사는 잡가(雜歌)가 전국적 보편화가 이뤄지는 1900년대 초

남도지역에서 불려지기 시작한 것으로 부터이다.

 

이때는 ‘진도’아리랑으로 불려지지 않고 ‘남도’아리랑 등 다르게도 불렸는데,

당시 유행하던 구아리랑(잦은아리랑),

즉 1896년 선교사 H. B. 헐버트가 채보한 <A-RA-RUNG>류에서 파생된 것이다.


황현의『매천야록』1894년 정월 기사에서

고종과 명성후가 평복을 하고 광대들이 부르는 ‘아리랑타령’을 즐겼다고 한 바로 그 아리랑이다.
이 구아리랑의 대표 사설은 오늘의 문경아리랑 사설 제1절과 동일한 것이다.

문경새재 박달 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나간다

이 사설은 경복궁 중수 공사 7년간 삼남지방에서 올라오는 공출 물산이 통과하고  
반강제로 끌려 오는 부역군들의 원한이 서린 문경새재,

그리고 문경의 특산품인 박달나무가 허수이 공사장 공구 자루로

일시에 대량으로 베어져 나가는 상실감을 노래한 것이다.


이 사설이 당시 민중들에게 공감을 얻어 널리 불려지자

이에서 일부를 수용하여 오늘의 진도아리랑 제1절인 사설로 전승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국악학자 장사훈이
“진도아리랑 첫 마루에서도 이 노래를 부르는데, 비록 곡조는 한 계통이라 할지라도,
그 이름에서 볼 때 ‘문경새재’의 것이 진도아리랑으로 옮아 간 것으로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라고 해서 이미 지적한바가 있다.

 

이 사설에 이어 당시 유행 장르인 잡가적인 세태를 노래한 다음과 같은 사설이 덧붙여져 불려졌다.

저놈의 계집에 눈매를보소
곁눈은 감고서 아이고 속눈떴네
아리아리랑 아리아리랑 아리랑이 났네
아리랑 응 어- 응 아르랑이 났네

1911년 총독부가 조사한 자료 중

김제공립보통학교(金提公立普通學校) 교사가 제보하여 전해지는

이 사설은 오늘의 진도아리랑 형태와는 일치하지 않으나

특징적인후렴 소(素)인 ‘아리랑응 어-응’을 포함하고 있어 주목하게 한다.

 

특히 후렴에서 확인되듯 명칭도
‘아리랑’과 ‘아르랑’이란 음가(音價)로 혼용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과 같은 일반론과는 다르게 진도아리랑의 역사에 대해서는

진도 지역 나름의 주장이 전해지고 있다.

즉, 동아일보 1936년 1월 1일자 <무녀관노 부락, 엄격한 생활규율>을 근거로

진도는 율향(律鄕)으로 370여년 전 무녀관로(巫女官奴) 부락인 성내리에

<장락청>(獎樂廳)을 두었을 만큼 무악이 성한 곳이라 오래 전부터 형성, 불려왔고,
이 증거가 『매천야록』의 ‘아리랑타령’(阿里娘打令)으로,

바로 진도아리랑을 이르는 것이라고 하는 주장이다.

 

매우 적극적인 향토애적 주장인데, 이보다는 후기 상황의 주장도 있다.

그것은 진도 출신 대금 명인 박종기(1879~1939)가 구성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많은 이들이 동의하고 있는 주장이다.


이는 다음의 두 가지로 나뉘는데,

그 하나는 1920년대 “박종기·박석기·박석주 등 당시 활동하던 음악인들이

진도의 신청(神廳)에서 예기조합(藝妓組合)을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 할 때 불려오던

‘산아지타령’에서 함배(박자)와 째(制曲)를 정리하고

이를 박종기가 ‘진도아리랑’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하는 주장이다.
진도의 전 문화원장인 조담환·박병훈 원장이 주로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원로 사진작가 정범태가 1999년 명창 김소희의 증언을 따라

자신의 저서 『명인명창』에서 주장한 다음의 내용이다.

“박종기가 OK레코드사와 콜롬비아사에서 두 번이나 반주 녹음한 진도아리랑은

박종기의 창작으로 알려져 있다.

판소리 인간문화재였던 김소희 증언에 의하면

진도아리랑은 음반을 취입하러 일본으로 가는 배안에서 작곡했다고 하는데

아직 논란의 여지가 많으나 원래 아롱타령으로 불려지는 전통민요를

박종기가 새롭게 편곡했다는 설이 진도지방에서 유력한 것으로 보아

박종기의 창작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하겠다.”

이 주장은 박종기와 김소희가 일본에 레코드를 취입하러 가는 선상에서
‘가는 김에 진도아리랑을 짜서 취입하자’며 박종기가 대금으로 구성하여 김소희가 불렀다는

에피소드(마치 박영효가 일본행 배안에서 태극기를 고안했다는 예처럼)와 부합이 된다.


이상의 주장에서 차이가 있긴 하지만,

오늘의 형태로 정형화 되는데는 박종기의 영향력이 중심에 있었고,

그 시기는 이르면 1920년대 초, 늦으면 음반 취입이  반드시 일본에서만 가능하여

음악인들이 도일한 최종 시점인 1934년이 된다.


그런데 이 형성 시기를 추정하는데 유용한 자료가 있다.
그것은 1930년 김지연이 조선총독부 기관지《조선》에 쓴 <조선민요 아리랑>(상·하)이란 기사인데,

여기에서는 17종의 아리랑을 처음으로 정리, 특화 하였는데
여기에는 ‘진도아리랑’이 포함되지 않았다.

 

이는 적어도 1930년도 전후에는 진도아리랑이 형성되었다 하더라도 유행은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록상으로 진도아리랑 상황은 1930년 중반부터 확인이 된다.

 

우선 방송 상황인데,

1934년 11월 10일 박종기의 대금연주로 ‘남도아리랑’이란 이름으로 방송되었고,
3일 후인 13일에는

①아리랑 ②景福宮아리랑 ③元山아리랑 ④密陽아리랑 ⑤江原道아리랑 ⑥江原道메나리아리랑과 함께

‘全羅道아리랑’이란 곡명으로 방송(최수성 반주, 김학선 소리) 된 사실이다.

이는 남도아리랑·전라도아리랑·그리고 진도아리랑이란 동곡이명(同曲異名)으로 불려온 것이다.


그리고 1935년 7월에는 <조선일보> 주관의 <독자위안회>라는 공연에서

‘名物 珍島아리랑 만장의 갈채가 끊일 줄 몰라’라는 제하로 알려지는데,

여기에서 ‘우리의 고전민요 무용인 진도아리랑’이라고 기술하어 있어

경성의 중요 공연에서 연주 될 만큼 명성을 떨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진도에서의 상황에서도 확인이 되는데,
<계몽극단>과 <신극단> 공연에서 항일적 소재로 기능을 할 만큼 공동체에 일반화 되었다.


예컨데 ‘신극단사건’(新劇團 事件/조선일보, 1935. 07. 14) 등에서 알려지기로는  
진도아리랑이 ‘거꾸로아리랑’과 같은 다음과 같은 ‘노가바’(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되기도 했다.

 

극단의 작품에서 불렸다는 가사는,
“일본대판 딸각바리 왜놈의새ㄲ ㅣ들/ 총칼을 찼다고 자랑을 마라
이순신 거북선이 두둥실 떠가면/ 죽다남은 종자 새ㄲ ㅣ들 몰살을 하리라”
이런 가사를 불러야 하는데,

당시는 일본인 형사가 임검석에서 감시를 하고 있어 부득이 가사를 거꾸로해서 불러야 했다.
“판대본일 리바각딸 들끼새의놈왜 /고다찼을칼총 라마을랑자
이선북거신순이 면가떠실둥두/ 들끼새은 남다죽 라리하을살몰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났네/ 아리랑 응 응 응 아라리가 낳네“

이 가사를 무대와 객석에서 합창을 하는데,

임석 경관은 멋도 모르고 후렴을 따라하며 ‘조선 아리랑 참 재미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무사히 공연을 마쳤는데,

며칠 후 이것이 발각되어 배우들이 피체되었다는 것이 이 사건의 진상이다.


이런 진도아리랑의 여세는 남도의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이런 확산 현상은 새로운 각편(各篇·verion·딸림형)들도 확인되는데,

그 하나가 진도군 속도(屬島) 거차도의 이름을 단 ‘거차도아리랑’의 존재가 그것이다.

 

<조선일보> 1939년 9월 29일자에는 다음의 두 수가 수록되어 있다.


“열두시에 오라고 우데마끼를 주었더니/ 일이삼사를 몰라서 새로 한시에 왔냐
아리랑리랑 시리시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 응 응 아라리가 났네

구장네 방에는 나지오(라디오)가 노는데/ 오는 말은 있어도 가는 말은 없다네
아리랑리랑 시리시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 응 응 아라리가 났네”

이 사설의 말미에는 박종기의 대금 연주가 ‘세계 제일 소리’라고 부기하고 있어
이것이  진도아리랑에서 영향 받은 각편임을 확인시켜 준다.


이렇게 진도아리랑은 전승 아리랑을 진도 지역음악인이 재구성한 뛰어난 ‘창작된 민요’이다.
이런 사정으로 남도 특성인 육자배기조의 전형으로 구성되어 남도적인 흥과 멋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남도 지역 뿐 아니라 전국적인 분포를 갖게 하였다.

 

음악성에서 육자배기조의 흥과 멋, 후렴에서 ‘응-응-응’의 요소,

그리고 여성적인 사설이 진도아리랑의 정체성의 요소이다.  

● 진도아리랑 대표 사설

후렴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난다
    
문경새재는 왠 고갠가
넘어올적 넘어갈적 눈물이로구나

세월아 네월아 오고가지를 마라
아까운 이내청춘 다늙어 간다

바람은 손없어도 나무를 흔들고
이몸은 팔이 있어도 님을 못잡누나

국화는 피어서 서릿발에 울고요
가시낸 자라서 임의 손에 우네요  

오라고 오라는데야 야밤에가고
동네라 술집은 대낮에나가자

중신애비 죽으면 청개구리가 되고
요내 나는 죽으면 꽃배암 될란다

씨엄씨 씨엄씨 강짜을 말거라
니 자식 여법하면 내가밤마실 갈까나

산천이 높아야 꼬랑도 깊으제
조고마한 여자 속이 얼매나 깊으냐

알그닥 짤그닥 짜던 베는
언제나 다짜고 친정에럴 갈거나

야답세 두번걸이 열두폭 치매
신작로 다 씰고 임 마중얼 가네

노다 가소 노다나 가소
저달이 떴다 지도록 노다나가세

세월아 네월아 오고가지를 마라
아까운 이내 청춘 다 늙어간다

바람은 손 없어도 나무를 흔들고
이 몸은 팔이 있어도 님을못 잡는구나

국화는 피어서 서릿발에 울고요
가시낸 자라서 임의 손에 우네요  

저기가는 저 처녀 엎으러나 지거라
일쎄나 주는 듯이 보듬어나 보자

보고도 못 먹는 건 그림에 떡이요
보고도 못 사는 건 남의 님이로세

가는님 허리를 아드득이 잡고
하룻밤만 자고 가라 통사정을 하네

오다가 가다가 만나는 임아
손목이 끊어져도 나는 못놓겠다

뼘가웃 이불비게 둘이 덥고 자도
얼마나 다정하여 뼘가웃이 남았네

니가 날만치 자신이 있담사
가사덤풀 천리라도 맨발로 오니라

니가 잘나 내가 잘나 천하일색이드냐
내 눈이 어두워서 반달이로구나

논두렁 개구리는 뱜에 간장을 녹이고
밭고랑 저 가시나는 내 간장을 녹이네

담 넘어 갈 때는 강아지가 짖고
님에 품에 등께로 새벽 닭이우네

임이 얼마나 임 다움사
한비개 둘이 비고 등돌려 눌까

맹감은 고와도 가시덤풀에 놀고
유자는 얽어도 한량 손에 노네

빨래터 좋아서 빨래하러 갔더니
못된 놈 만나서 돌 비게를 비었네

한국 최남단 보배섬 진도
인심이 좋아서 살기가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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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도 아리랑                                 

 

 

 

 

내용

 

한국 민요에는 아리랑이란 이름이 붙은 민요가 여러 고장에 전승되고 있는데,

전라도에 전해지는 <진도 아리랑>을 위시하여 강원도에는 <정선 아리랑>과 <강원도 아리랑>,

경상도에는 <밀양 아리랑>, 서울 지방에 <본조 아리랑>과 <긴 아리랑>따위가 그것이다.

 

<진도 아리랑>은 근래에 진도 출신의 젓대 명인인 박 종기가 짰다는 설이 있다.

세마치 장단에 맞고 3분박 중몰이 장단에도 맞는데, 장절 형식으로 되었다.

 

여러 사람이 어울려 놀 때에 즐겨 부르는데,

선소리꾼이 중몰이 두 장단을 메기면 여러 사람이 중몰이 두 장단을 받는다.

육자배기토리로 되어 있어서 음악쪽으로 보아 <물레타령>과 <삼산은 반락>과 비슷한 점이 많다.

매우 흥겨운 느낌을 준다.

 

소리- 김동애, 안숙선 반주- 장구: 장덕화, 대금: 서용석, 아쟁: 박종선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데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문경 새제는 웬 고갠가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로다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약산 동대 진달래꽃은
한 송이만 피어도 모두 따라 피네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데

나 돌아간다 내가 돌아간다
떨떨거리고 내가 돌아간다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치어다보느냐
만학은 천봉
내려굽어보니 백사지로구나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만경 창파 둥둥 뜬 저 배야
저기 잠깐 닻 주거라 말 물어 보자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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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아리랑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노래 듣기 - 희망의 문학

 

문경 새재는 웬 고개인고
구비야 구비야 눈물이 난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치어다보니 만학 천봉(萬壑千峰)
굽어보니 백사지(白沙地)로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임이 죽어서 극락을 가면
이내 몸도 따라가지 지장 보살.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다려가오 잘 다려가오.
우리 임 뒤따라서 나는 거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원수야 악마야 이 몹쓸 사람아
생사람 죽는 줄을 왜 모르나.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저 넘에 계집에 눈매 좀 보소
속눈만 뜨고서 발발 뜨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왜 왔던고 왜 왔던고
울고 올 길을 왜 왔던고.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바람은 손 없어도 나뭇가질 흔드는데
이내 몸은 손 둘이어도 가는 임을 못 잡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말은 가자고 네 굽을 치는데
임은 붙들고 아니를 놓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물을 쓰면 돌만 남고
임은 가면 나 혼자 남는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백 년을 살자고 백년초를 심었드니
백년초는 어딜 가고 이별초만 남았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다른 작품

문경의 새재는 웬 고개인가,
구비구비마다 눈물이 난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후렴)

쳐다보니 수많은 골짜기와 산봉우리,
굽어보니 흰 모래밭이로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후렴)

임이 죽어서 극락에 가면
이내 몸도 지장보살 의지하여 따라가지.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후렴)

데려가오 날 데려가오.
우리 임의 뒤를 따라서 나는 가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후렴)

원수여 악마여 몹쓸 임이여,
생사람 죽는 줄을 왜 모르나.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후렴)

저놈의 계집애 눈매 좀 보소.
속눈만 뜨고서 발발 떠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후렴)

왜 왔던가, 왜 왔던가.
울고 올 길을 왜 왔던가.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후렴)

바람은 손 없어도 나뭇가지를 흔드는데,
이내 몸은 손이 둘인데도 가는 임을 잡지 못하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후렴)

말은 가자고 네 굽을 치며 재촉하는데,
임은 붙들고 놓지를 않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후렴)

물은 다 쓰면 돌만 남고,
임은 가고 나면 나 혼자 남는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후렴)

백 년을 함께 살자고 백년초 심었더니,
백년초는 어디 가고 이별초만 남았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후렴)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요점 정리

갈래 : 민요, 서정 민요

성격 : 제창요

운율 : 4음보 위주

표현 : 대구법,
제재 : 한국인의 생활 감정, 사별한 임에 대한 원망
특징 : 소박하고, 직설적인 표현, 선후창의 연창 형식에 후렴구가 있으며,

         후렴구에 '응응응'과같은 콧소리가 들어가 있다는 점이 이 노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주제 : 인생의 험난함에 대한 원망과 자책, 사별한 임에 대한 안타까운 사랑

채집지 : 진도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내용 연구

문경 새재는 웬 고개인고 구비야 구비야 눈물이 난다.

[인생의 험난한 고비를 '문경 새재'로 표현하여 현재 화자의 삶이 힘든 상황임을 드러내고 있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치어다보니[쳐다보니] 만학 천봉(萬壑千峰)[수많은 골짜기와 봉우리]
굽어보니 백사지(白沙地)[
흰 모래가 깔려 있는 땅]로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임이 죽어서 극락을 가면[너없이 안락하고 아무 걱정이 없는 곳이나 그러한 지경을 비유한다]
이내 몸도 따라가지 지장 보살[
부처 없는 세계에서 머물면서 중생을 제도한다는 보살].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다려가오 잘[날(나를)'의 오기인 듯] 다려가오[데려가오].
우리 임 뒤따라서 나는 거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원수야 악마야 이 몹쓸 사람아
생사람 죽는 줄을 왜 모르나.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저 넘[저놈의]에 계집에 눈매[눈의 생긴 모양새. 눈맵시] 좀 보소
속눈[
감은 듯 만 듯한 눈]만 뜨고서 발발 뜨네[떠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왜 왔던고 왜 왔던고
울고 올 길을 왜 왔던고.

[원망과 자책의 감정 속에서 슬픔. 원통함. 한스러움이 드러남 / 자신의 생에 대하여 원망, 자책하고 있다.

서정적 자아가 애(哀), 원(怨), 한(恨)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주고, 인생의 고달픔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바람은 손 없어도 나뭇가질 흔드는데
이내 몸은 손 둘이어도 가는 임을 못 잡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말은 가자고 네 굽[짐승의 발톱, 말굽]을 치는데
임은 붙들고 아니를 놓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물을 쓰면 돌만 남고
임은 가면 나 혼자 남는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백 년을 살자고 백년초를 심었드니
백년초는 어딜 가고 이별초만 남았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다른 작품

문경 새재[경상북도 문경군과 충청북도 괴산군 사이에 있는 고개]는 웬 고갠가

구부[생의 험난한 굽이]야 구부구부가 눈물이 난다.

[인생의 험난한 고비를 '문경 새재'로 표현하여 현재 화자의 삶이 힘든 상황임을 드러내고 있다.]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후렴구 이하 생략)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이내 가슴 속엔 희망도 많다.

[화자가 처한 현실이 절망적임을 고려할 때, 일종의 반어적 표현으로 볼 수 있음]

 

날 다려 가거라 날 다려 가거라

무정한 우리 임아 날다려 가거라.

 

세월아 멈춰라 오고 가지를 말어라

아까운 내 청춘 다 늙어 간다.

 

임은 죽어서 극락세계로 가고

나는 죽어서 나무아미타불.

 

해당화 한 송이 와자지지근 꺾어

우리 임 머리 위에다 꽂아나 주세.

 

왜 왔던고 왜 왔던고

울고나 갈 길을 왜 왔던고.

[원망과 자책의 감정 속에서 슬픔. 원통함. 한스러움이 드러남 / 자신의 생에 대하여 원망, 자책하고 있다.

서정적 자아가 애(哀), 원(怨), 한(恨)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주고, 인생의 고달픔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약산 동리 진달래꽃은

한 송이만 피어도 모두 따라 핀다.

 

울 넘어 담 넘어 임 숨겨 놓고

호박잎만 너울너울 날 속이는구나.[임을 만날 기회를 주지 않는 무정한 세월을 한탄]

 

저놈의 기지배 눈매 좀 보소

속눈만 뜨고서 발이 발발 떠네.[눈을 감은체 하면서 조금 뜨는 눈]

 

만나니 반가우나 이별을 어이해

이별을 하라거던 왜 만났던고.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해와 감상

 아리랑은 한국 민요 중에서 그 종류와 가사가 가장 많은 민요의 하나이다.

구비 문학이며 적층적 성격을 띠고 있어 당시의 세태와 다수 민중의 공동 체험을 그 안에 담아 내고 있고,

민요 중에서 가장 널리 분포하고 있는 '아리랑'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그 특성과 명칭이 다른 모습을 보인다.

이 노래는 '진도 아리랑'으로, '아리랑'의 일반적 특성인 애(哀), 원(怨), 한(恨)의 정조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아리랑'의 이런 정조는 험난한 삶의 역정 속에서 우리들이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쓰라림이고 애달픔이었다.

때로는 원(怨)이자 한(恨)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부정적 정서는 그 표층에서는 아픔의 표상으로 해석되지만

그 심층에서는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긍정적 인생관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해와 감상1

한국 민요 중에서 그 종류가 가장 많은 노래가 [아리랑]이다.

경기·강원·밀양·진도·정선 등 오늘날 알려진 가사의 수만 하더라도 2,277연에 달하는 대표적 민요라 할 수 있다.

다른 민요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특히 [아리랑]은 가사의 원형이 굳어져 있지 않고

서민들의 공감대가 새로이 형성될 때마다 노랫말이 바뀐다.

 

이처럼 [아리랑]은 한국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슬픔·원통함·한스러움 등의 정감을

진솔하게 드러내고 있는, 가장 한국적인 노래라고 하겠다.

이 [진도 아리랑]의 기본 성격은 남녀의 사랑과 이별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 노래에는 배경 설화도 전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진도 총각이 경상도 대갓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다가 주인집 딸과 사랑을 하게 되었는데,

두 사람은 밀애(密愛) 끝에 쫓기는 몸이 되어 진도로 도망쳐 와서 정답게 살다가

총각이 병으로 먼저 죽었다는 이야기와,

진도 총각과 혼약한 한 처녀가 총각이 육지에서 다른 처녀를 데리고 오자 원망하며

이 노래를 불렀다는 이야기 등이다.


 이러한 설화를 바탕으로 이 민요를 이해할 때, 임과 헤어지게 된 처지인 여성의 슬픈 속내를

소박하고 솔직하게 드러낸 민요의 가사가 더욱 절절하게 느껴진다.

 

이해와 감상2

전라남도 진도 지방의 민요.

부요적(婦謠的) 성격이 강한 서정민요이다.

현지에서는 ‘아리랑타령’이라고 부른다.

전라남도 진도에서 발생한 노래이나 지금은 전국적으로 불리고 있다.

사설은 기본적으로 남녀의 사랑과 이별을 주제로 하고 있다.

 

사설 내용에 욕·상소리·한탄·익살 등이 응집되어 부인네들의 야성을 거침없이 노출시키고 있으며,

또한 도서 지방의 지역성을 표출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사설의 형식은 2행 1연의 짧은 장절형식(章節形式)으로 이루어지는 분장체(分章體) 장가(長歌)이다.

 

가창 방식은 기존 사설을 바탕으로 새로운 형태의 사설이 창자에 의하여 계속적으로 덧붙여질 수 있는

선후창 형식의 돌림노래〔輪唱〕이다.

돌림노래란 여럿이 부를 때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메김소리를 하고 나머지는 맞는소리(맞음소리)를 하는 것으로,

이러한 가창 방식은 집단 노동요의 전형적인 가창 방식과 일치한다.

 

대표적인 가사는 다음과 같다.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 지느냐.

날 두고 가신 임은 가고 싶어 가느냐.

(후렴)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리라가 났네.

문경새재는 왠 고갠고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로구나.

(후렴)

니정 내정은 정태산 같은데

원수년의 탄광 모집이 니정 내정을 띤다.

(후렴)

저 강에 뜬 윤선은 바람심으로 놀고

점방에 유성기는 기계심으로 논다.

(후렴)

오동나무 열매는 감실감실

큰애기 젖통은 몽실몽실

(후렴)

씨엄씨 잡년아 잠깊이 들어라

문밖에 섰는 낭군 밤이슬 맞는다.

(후렴)

서방님 오까매이 깨벗고 잤더니

문풍지 바람에 설사가 났네.

(후렴)

 

창작연대는 확실하지 않고 대략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로 추정된다.

이 때는 유교적 전통문화와 개화문명이라는 새로운 문화 사이에서 가치관의 혼란이 나타나고,

외세의 침탈로 피폐해진 현실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던 시대였다.

사설 중에는 유성기·윤선·자동차·자전거 등의 개화문물이 나타나고, 그 속에서 흔들리는 세태가 풍자되어 있다.

한편, 창작자는 진도 출신이며 신청(神廳)에서 작사·작곡했다는 설도 있다.

사설에 대한 기원설화는 두 가지가 전한다.

 

하나는 진도 총각과 경상도 처녀의 사랑에 얽힌 이야기로,

진도 총각이 경상도 대갓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다가 주인집 딸과 사랑을 하게 되었는데,

두 사람은 밀애 끝에 쫓기는 몸이 되어 진도로 도망쳐 정답게 살다가 총각은 병으로 죽었다는 이야기와,

진도 총각과 혼약한 한 처녀가 총각이 육지에서 다른 처녀를 데리고 오자 원망하며

이 노래를 불렀다는 이야기이다.

 

다른 하나는 설이향과 소영공자의 이야기로,

설이향과 소영이 굴재를 오가며 사랑을 하였는데, 어느 날 소영공자가 떠나 버렸다.

슬픔에 찬 설이향은 소영공자가 육지 처녀와 결혼을 하게 되자 사생결단을 내려 했으나 죽지 못하고,

비수로 머리를 자르고 쌍계사의 중이 되었다는 설화이다.

장단은 세마치 장단이며, 육자배기토리를 바탕으로 한 선율구조로 장식음·비음(鼻音)의 사용이 많다.

일반적으로 중모리장단으로 부르나

때에 따라서는 느린 박자인 진양조나 중모리보다 약간 빠른 중중모리로 부를 수도 있다.

 

〈진도아리랑〉은 〈정선아리랑〉이 지니고 있는 비탄조와는 달리〈육자배기〉가락에

판소리의 구성진 목청이 어우러진 진도 지방 특유의 정조(情調)를 지니고 있다.

혼자 부를 때에는 유장하고 슬픈 노래가 되어 신세타령과 같은 표출 기능이 두드러지지만,

노래판에서 여럿이 부를 때에는 빠르고 흥겨운 노래로 신명을 고양시키고 일체감을 조성·강화시킨다.

 

≪참고문헌≫ 朝鮮民謠硏究(高晶玉, 首善社, 1949)
≪참고문헌≫ 韓國民謠集 Ⅰ∼Ⅵ(任東權, 集文堂, 1961∼1981)
≪참고문헌≫ 아리랑……역사여 겨레여 소리여(金烈圭, 朝鮮日報社, 1987)
≪참고문헌≫ 珍島아리랑形式攷(池春相·羅景洙, 湖南文化硏究 18, 全南大學校湖南文化硏究所, 1988)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심화 자료

 

아리랑의 대하여

 

기원

〈아리랑〉의 기원설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대체로 여음인 '아리랑'의 어원에서 그 바탕을 찾고 있다.

〈아리랑〉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시기는 1930년대를 전후한 시기이다.

이런 이유로 어원설은 대체로 〈아리랑〉의 최초의 형태가 1930년대에 정착된 〈아리랑〉과

유사할 것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아리랑'이라는 말을 실사(實詞)로 보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① 아리랑(我離娘):'나는 사랑하는 님을 떠난다'는 뜻을 갖고 있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설,

② 아이농설(我耳聾說):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때 고생하던 민중들이 반가운 말은 못듣고

    괴로운 말만 듣게 되니 "차라리 귀가 먹었으면 좋겠다"라고 한 말에서 나왔다는 설,

③ 아랑전설(阿娘傳說):밀양 영남루의 아랑낭자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한 노래에서 나왔다는 설,

④ 알영설(閼英說):신라의 박혁거세의 아내 알영부인을 찬미한 말에서 변했다는 설 등이 있다.

 

이밖에도 여러 발생설이 있으나 어느 것도 확실한 근거가 없으니

그저 구음(口音)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나 유래했다고 봄이 바람직하다.

 

역사적 상징

아리랑은 다른 민요와 마찬가지로 본래 노동요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때의 주로 두레노래로 불렸으며, 따라서 구술과 암기에 의한 전승 또는 자연적 습득이라는 민속성 이외에

지역공동체 집단의 소산이라는 민속성을 가지게 되었고, 그 집단성은 시대성과 사회성을 내포하게 되었다.

비록 그 노랫말이 개인적인 넋두리의 비중이 컸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근세의 민족사가 반영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농부든 어부든 광부든 각기 그들 생활 속의 애환을 아리랑에 담았다는 점에서

직업공동체·사회공동체의 이른바 문화적 독자성이 강한 노래가 되었고,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는 민족적 동질성을 지탱하는 가락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대원군에 의한 경복궁 중건때의 민중의 고통이나 관리의 가렴주구가 아리랑에 얽혀 전해지는가 하면,

일제 강점기하의 민족적 수난에 대한 저항의식이 나운규 제작의 영화〈아리랑〉을 탄생케 했음이 이를 입증한다.

특히 영화〈아리랑〉의 등장은 아리랑이 지니는 역사적 상징이 민간전승으로부터

다른 차원의 문화영역으로 옮겨갔음을 보여주는 획기적인 예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리랑은 단순히 단일한 장르의 민요로 파악할 수 없는 다양성과 초역사성을 지닌

음악사·문학사·예술사의 거봉으로서, 우리 민족의 원초적 정서와 맥을 같이 해왔다고 할 수 있다.

 

아리랑의 파급

한국의 3대 전통민요 아리랑은 〈정선아리랑〉·〈진도아리랑〉·〈밀양아리랑〉을 말한다.

 

〈정선아리랑〉은 태백산맥 동서를 따라 설정된 메나리토리권의 민요로 민요적 전통성과 지역성이 강하다.

〈진도아리랑〉은 호남지역의 육자배기토리권에 속하지만 다른 육자배기토리 민요와 약간 차이가 있다.

                      전라남도 진도와 호남지역, 충청남도 일대, 경상남도 서부지역, 제주도 등에 분포되어 있다.

〈밀양아리랑〉은 영남지역에서 전하지만 영남지역의 정자토리 민요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한편 1926년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 〈신아리랑〉을 계기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고

통속민요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후 〈아리랑〉은 대중가요·영화·무용·문학 등의 전 예술분야에 파급되는 현상을 가져왔다.

대중가요로는 1931년 〈낙랑아리랑〉을 비롯하여 많은 곡이 만들어졌고

신민요에는 〈경기아리랑〉이 효시가 되어 많은 곡들이 불렸다.

 

3대 전통 아리랑을 제외한 여러 아리랑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춘천아리랑〉(한말에 춘천에서 의병투쟁을 벌일 때 부른 노래)·

〈본조아리랑〉(대원군과 민비의 권력 싸움을 민중들이 성토한 노래)·

〈광복군아리랑〉(만주 광복군의 독립의지를 담고 있는 노래)·

〈치르치크 아리랑〉(조국을 빼앗기고 소련으로 떠난 알타아타시의 한인들이 부른 노래) 등이 있다.

 

대중가요 아리랑으로 〈아리랑 삼천리〉·〈영암아리랑〉 등이 있다.

남북이 분단된 지금은 아리랑이 민족화합의 노래로서 널리 불리고 있다.

 

밀양아리랑

경상도의 대표적 통속민요의 하나로 밀양지방에서 발생되었다고는 하나 지금은 전국적으로 불리며,

1968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장려상을 수상했다.

 

〈밀양아리랑〉에는 영남루에 얽힌 전설이 있다.

옛날 밀양 부사에게 아랑(阿娘)이라는 예쁜 딸이 있었는데 젊은 관노가 아랑을 사모해 아랑의 유모를 매수한 뒤

아랑을 영남루로 유인했다.

관노는 아랑에게 사랑을 호소했지만 아랑이 꾸짖으며 거절하자 관노는 칼로 아랑을 죽였다.

밀양의 부녀자들은 아랑의 정절을 흠모하여 노래로써 찬미했다고 한다.

세마치장단에 맞추어 비교적 빠르게 부르며 활달한 느낌을 준다.

'라도레미솔'의 5음음계이고 '라'로 시작해 '라'로 끝맺는다.

 

노랫말은 다음과 같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후렴)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강원도아리랑

〈정선아리랑〉과 더불어 강원도지방의 대표적인 민요로 장단은 엇모리장단.

선법은 5음음계 계면조의 곡이나 제2음은 사용하지 않는다.

5음음계 중 가장 높은 음으로 시작하여 차차 낮아지는 형식으로, 느리고 구슬픈 느낌을 준다.

 

17절과 후렴으로 이루어지는데, 순서가 고정된 것이 아니고 부르는 사람에 따라 변한다.

산간지방의 생활을 소재로 하며 내용은 산골처녀의 사랑의 하소연을 담고 있다.

후렴은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아리아리 얼씨고 놀다가세"이며,

1절의 가사는 "동백(冬柏)아/열지 마라/누구를 꾀자고/머리에 기름……"으로 이루어졌다.

 (자료 출처 : 브리태니카백과사전)

 

아리랑

한국의 구전민요. ‘××아리랑’이라고 하여 뒤에 ‘아리랑’을 붙인 다른 아리랑과 구별하기 위해

《본조(本調)아리랑》이라고도 한다.

 

어느 때부터 불리기 시작하였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고래로부터 조금씩 첨가·개조되면서 오늘의 노래가 이루어진 듯하다.

 

남녀 노소 사이에서 가장 널리 애창되는 이 노래의 기본 장단은 세마치로 우리의 정서에 알맞고,

내용도 한말(韓末)에서 일제강점기를 통하여 이 겨레의 비분을 표백(表白)한 것으로

지방에 따라 여러 가지 별조(別調)아리랑이 불리며, 장단과 사설(辭說)도 매우 다양하다.

 

즉 《본조아리랑》 《신아리랑》은 현재의 곡조와 같으나, 이 밖에도 《밀양아리랑》 《강원도아리랑》

 《정선아리랑》 《진도아리랑》 《긴아리랑》 《별조아리랑》 《아리랑세상》 등 종류가 매우 많고,

그 유래설(由來說) 또한 갖가지이다.

 

 ① 아랑설(阿娘說):

옛날 밀양 사또의 딸 아랑이 통인(通引)의 요구에 항거하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일을 애도한 데서 비롯하였다.

 

② 알영설(閼英說):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비 알영을 찬미하여 ‘알영 알영’하고 노래부른 것이

‘아리랑 아리랑’으로 변하였다.

 

③ 아이롱설(我耳聾說):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백성들이 원납금(願納金) 성화에 못견뎌

“단원아이롱 불문원납성(但願我耳聾 不聞願納聲:원하노니 내 귀나 어두워져라, 원납소리 듣기도 싫구나”하고

부른 ‘아이롱(我耳聾)’이 ‘아리랑’으로 와전되었다.

 

④ 아리랑설(我離娘說):

역시 대원군시절 경복궁 공사에 부역온 인부들이 부모처자가 있는 고향 생각을 하며

‘아리랑(我離娘) 아리랑’ 노래한 것이 발단이었다는 등의 유래가 있다.

 

이 밖에도 다른 발생설이 전하나 오히려 구음(口音)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유래하였다고 봄이 자연스러울 듯하다.

이 노래는 외국에도 널리 소개되어 세계적으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노래는 다음과 같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이 난다.”

(자료 출처 : 동아대백과 사전)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육자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