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가 키우고, 정권 초에만 규제…‘커진 재벌’ 통제 못해
[재벌 개혁]④ 재벌은 어떻게 커왔나
경향신문 오창민 기자 입력 2012.02.07 22:18 수정 2012.02.08 00:27
가난했던 시절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모든 자녀를 고르게 가르칠 여건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부모는 큰아들이나 똑똑한 아들만 공부를 시켰다.
나머지 형제나 딸들은 농사를 짓거나 공장에서 일하며 학비를 대야 했다.
정부가 앞장서서 경제개발을 주도하던 1960~1980년대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1962년 박정희 정부는 '금융부문 자금운용 규정'을 만들어 금융기관 자금 대출의 우선순위를 정했다.
금융 혜택을 입은 기업은 그렇지 못한 기업에 비해 손쉽게 덩치를 불렸다.
1964년에는 환율현실화 조치로 1달러에 대한 원화값을 130원에서 255원으로 올렸다.
국민은 고물가에 신음했지만 수출 기업들은 막대한 환차익을 챙겼고 이는 투자를 위한 종잣돈이 됐다.
6·25 전쟁으로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했던 한국이 '한강의 기적'을 일굴 수 있었던 데는
재벌이 큰 역할을 했지만 그 바탕에는 이처럼 노동자·농민, 다른 기업의 희생이 있었다.
1970년대 들어 중화학공업의 중요성이 강조되자 정부의 금융 혜택은 특정 기업에 더욱 집중됐다.
1973년 제정된 국민투자기금법은 국가 채권 발행과 은행저축예금에서 거둬들인 기금으로
중화학공업과 전기업, 새마을공장사업에 종사하는 기업에 최장 10년 저리로 빌려줄 수 있게 했다.
이 과정에서 현대와 삼성, 럭키금성, 선경, 쌍용, 한진 등의 기업이
조선과 자동차, 전자, 항공, 운수 등에 진출하면서 각 분야에서 독과점적 지위를 누리며 재벌로 성장했다.
1974년 9개 계열사를 거느렸던 현대그룹은 1978년 계열사가 31개로 늘어났고,
같은 기간 삼성은 24개에서 33개, 럭키금성은 17개에서 43개로 계열사가 많아졌다.
1973년 상위 10대 재벌이 국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국내총생산(GDP)의 5.1%였으나
1978년에는 10.9%로 5년 사이 2배 이상 증가했다.
당시 정부 관료로서 경제정책 입안 과정 등을 지켜본
김운용 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해외에서 LC(신용장)만 끊어오면 돈이 기업으로 나가고, 기업은 그 돈으로 부동산도 사고
또 그 부동산으로 은행 융자도 받았다.
세제 혜택도 주었고 미 달러화 환율도 수출에 유리하게 개입해서 적정선을 유지했다.
조선·철강·자동차·건설·정유 등 어느 하나도 그냥 된 것이 없다"고 말했다.
전두환 정부에서도 재벌 지원정책은 이어졌다.
1981년 정부는 한국의 전자산업이 국제적인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육성방안을 내놓았고,
현대와 대우그룹 등이 전자산업에 뛰어들었다.
1980년 911억원이던 전자산업 부문의 투자는 1984년 8545억원으로 10배 가까이 증가했고,
가전과 산업용 전자 분야에서 집중 개발이 이뤄졌다.
유가 인상과 판매 부진으로 자동차 재고가 쌓이자 1982년 정부는 공직자 승용차 자가운전제를 도입해
자동차 수요를 늘려주기도 했다.
재벌이 경제를 좌지우지하게 되면서 각종 부작용이 뒤따랐다.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정경유착이 싹텄다.
재벌이 정권에 수천억원의 정치자금을 갖다 바쳤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떠돌아다녔다.
2002년 대선에서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측이 삼성 등 재벌들로부터 800억여원의 불법자금을 받은 사실이
검찰 수사를 통해 드러났다.
재벌의 힘이 커지자 정부는 견제에 나서기도 했다.
노태우 정부는 '5·8 부동산투기 억제대책'을 통해 재벌의 부동산 매각을 추진했다.
김영삼 정부도 초기에 30대 재벌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재벌이 정치자금을 제공한 사실이 드러나자
채무보증 폐지, 상속·증여세 중과 등의 정책을 도입했다.
그러나 재벌의 무분별한 투자 등을 방치해 국가 경제 전체가 누란의 위기에 봉착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김대중 정부는 기업의 무분별한 확장과 차입경영이 외환위기를 불러왔다는 지적에 따라
5대 재벌 사업 맞교환(빅딜) 등 지금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강한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노무현 정부는 외견상 재벌들과 긴장관계를 유지한 것처럼 보였으나 실질적인 조치는 거의 없었다.
이명박 정부는 출자총액제한제 폐지, 소득·법인세 인하 등 친기업 정책을 펴왔으나
집권 말기에 접어들면서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 오창민 기자 riski@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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