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관

‘탐욕의 덫’에 걸린 우면산

기산(箕山) 2011. 8. 21. 04:53

[심층취재] ‘탐욕의 덫’에 걸린 우면산

 

                                                                                         [중앙일보] 입력 2011.08.21 00:30

 

서울 강남에서도 가장 터 좋기로 소문난 우면산 자락이 올여름 집중호우로 쑥대밭이 됐다.

100년 만의 폭우라지만, 멀쩡했던 산이 사방에서 허물어졌다.

지난해 추석 때도 태풍 곤파스로 산사태를 치렀던 곳이다.

혼비백산할 일이었다.

<월간중앙>이 우면산의 내력과 사람의 손을 탄 현재의 우면산을 들여다보았다.

 

마치 우면산이라는 이름도 이를 증명하는 듯하다.

우면산은 그 형상이 소가 조는 형국이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조는 소라면 명당의 으뜸 조건과 같은 평온한 땅이라고 풍수에서는 해석한다.

즉 편안하고 안정된 땅이다. 게다가 지기가 가득한 땅이다.

‘대동풍수지리학회’ 고제희 회장의 말이다.


“산은 다른 산으로부터 지맥을 따라 지기를 받아 전달하기도 하지만

스스로 지기를 생산해 흘려보내기도 한다. 즉 산은 지기의 공장이거나 저장탱크다.

따라서 산은 크기와 모양에 따라 지기의 저장량이 각기 다른데 우선 산이 커야 하고 토성의 산이어야 한다.

산이 평평할 경우 토심이 깊어지고 지기를 많이 저장할 수 있다.

토성의 산은 흙만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다.

우면산은 규모는 작지만 형태로 보면 지기가 꽉 찬 산이다.”

그래서인지 우면산 기슭은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터 잡고 삶을 일군 곳이다.

지금도 우면동 한국교육개발원 남쪽 갓배(대한교원복지회관 앞 언덕)에는

전형적인 북방식 탁자형 고인돌이 남아 있다.

이 고인돌은 지금은 도시개발에 휩쓸려 대부분 사라졌지만

인근 양재동·원지동의 고인돌과 연결돼 일군의 문화유적지를 형성했던 것으로 관련 학계에서는 간주한다.

우면산터널 남쪽 입구 근처에서는 백제시대의 횡혈식 묘제가 발견돼

삼국시대에도 이곳은 중요한 삶의 터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면산 북쪽 기슭에는

침류왕 원년(384) 백제에 처음 불교를 전한 동진(東晋)의 승려 마라난타와 얽힌 전설이 있다.

이곳은 소년 소녀의 형국이어서 이 생기처에서 두 줄기의 생명수가 솟았는데

마라난타가 전도 중 수토병을 얻어 고생하다 이곳에 대성초당을 짓고 머무르며 생명수를 마시고

병을 고쳤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우면산 남쪽 기슭은 밖에서는 바람이 부는 등 일기가 사나워도 이곳에만 들어서면

움 속처럼 따뜻하다고 해서 ‘움 안’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사람이 살기 좋은 땅이라는 방증이다.

지금도 우면동을 ‘우마니’라고 하는데, 이는 발음이 비슷한 우면동에서 비롯한 지명으로 오인하기 쉬우나

사실은 ‘움 안’이 변한 말이라는 것이 형촌마을 토박이 조경구(76) 씨의 말이다.

그는

“이전에는 말죽거리부터 과천시 뒷골 인근까지 모두 열두 우마니가 있었다”고 말했다.

형촌마을 앞에는 조선조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태를 묻었다는 태봉이 자리하며,

인근 송동마을은 능안이라는 또 다른 이름처럼 능이 자리할 정도의 명당 중의 명당으로 알려졌다.

이렇듯 사람들이 살기 좋은 자연환경을 갖춘 데다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된 이후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이는 바람에 개발이 덜 돼 도심에 가까운 전원주택지라는 점이 부각되면서

이 지역은 부자들이 앞다퉈 들어가고 싶어하는 땅이 되었다.

우면산 북쪽으로도 입지를 살린 고급 아파트가 하나둘 들어서고 부자들이 몰리면서

이 일대는 우면산의 지기를 받은 명당으로 소문났다.

그런 우면산 자락이 산사태 이후로는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이번 산사태로 우면산의 북쪽 자락에 위치한 방배동으로부터 우면동 EBS 뒷산,

형촌마을, 송동마을, 식유촌, 과천시 안골과 뒷골, 무너미, 그리고 서쪽인 남태령의 전원마을까지

골짜기마다 토사가 쓸려내리지 않은 곳이 없었다.

 

똑같이 집중호우가 쏟아진 인근의 관악산이나 구룡산·대모산과 달리 유독 우면산만 흘러내림이 심했다.

명당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곳곳이 산사태 1급지로 둘러싸여


산사태는 강우·지진·중력 등의 힘으로 산지의 경사면이 붕괴하거나 지반이 꺼지거나

토석류가 한꺼번에 빠른 속도로 사면 아래로 이동하는 현상이다.

이때 토석류는 점성이 크기 때문에 돌덩어리나 나무 혹은 자동차를 움직일 정도다.

 

산림청 ‘산사태공간정보’는 전국의 지형을 가로세로 각 10m의 점으로 나눈 다음

각 점의 경사도·토심·임상·경사길이·모암·경사위치·사면형 등 7가지 인자에 각각 점수를 부여한 뒤

등급(1~3등급)을 나누어 표시했다.

 

이에 따르면

우면산 지역의 경우 양재동 인재개발원 남쪽 산비탈, 방배동 아파트촌 맞은편의 산록,

우면동 형촌마을 뒷산 등이 산사태 1급지로 분류됐다.

이번 산사태가 난 지역은 모두 규모는 작지만 산사태 1급지였다.

방배동 전원마을, 형촌마을 저수지 위, 죽암마을 뒷산 등은 2급지로 분류돼 있다.

산사태를 일으키는 직접적인 요인으로는 호우·지형·지질·식물분포상태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 중부지역에서 일어나는 산사태는 대부분 집중호우가 원인이다.

산림청에 따르면 강우량이 1시간에 30mm 이상이거나 하루 150mm 이상,

연속 강우량 200mm 이상일 경우 산사태 경보를 발령한다.

경보 발령자는 시장·군수다.

 

산사태위험지관리시스템에 의해 자동으로 산림청에서 각 자치단체 담당 공무원에게

SMS로 경고 메시지를 보내면 이를 받아 시장·군수가 경보를 발령하는 식이다.

 

이번 우면산 사태를 놓고 산림청과 서초구청이 메시지를 받았다 못 받았다 갑론을박하는 이유다.

우면산 지역에서 산사태가 터지기 하루 전인 7월 26일부터 28일까지

이 일대에 쏟아진 비는 587.5mm를 기록했다.

3일 연속 산사태 경보 기준을 훨씬 넘는 수치였다.

이번 우면산 산사태는 천재였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다.

그런데 정작 피해를 본 지역에서는 이것을 천재로 여기지 않는 분위기가 강했다.

유독 우면산에만 집중적으로 산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우면산에서 산사태가 일어난 27일 오전 7시 31분에서 8시 30분 사이

관악구에도 시간당 110.5mm에 달하는 집중호우가 내렸다.

여러 가지 주장이 등장했다.

우선 우면산은 악산인 관악산과 달리 육산이라는 점이 제기됐다.

그러나 육산이라고 해서 모두 산사태에 취약하지는 않다는 반론도 있다.

오히려 토심이 두껍고 경사가 완만한 토성의 육산은 웬만해서는 산사태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뿌리가 얕은 아카시나무가 주를 이뤄 산사태에 취약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러나 우면산의 낮은 지대에는 아카시·현사시·상수리나무·잣나무가 많지만,

산사태가 시작된 높은 지역에는 신갈나무·물박달나무 등 자연식생이 여전히 잘 보존돼 있다.

산사태의 시작점이 군부대 인근이라는 이유로 군부대에도 원망의 눈길이 쏠렸다.

직접 확인해보려고 군부대까지 올라가 보았다.

산중에서 본 산사태의 현장은 아래쪽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처참했다.

마을 주민들의 말처럼 산사태는 군부대 담장 바로 밑에서 시작됐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진단은 군부대 규모, 시설물 위치, 배수구 현황, 배수량 등 여러 상황을 고려해

정확한 연구를 거치지 않고는 사태의 원인을 장담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제때 제대로 대책을 세우지 않은 행정관청의 잘못이 크다는 주장도 나왔다.

지난 27년 동안 물 걱정 하고 살지 않았다는 방배동 S아파트 주민 유정희 씨의 말이다.
“산사태를 촉발한 원인이 집중호우라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인재가 피해를 더욱 키웠다.

 

지난해 태풍 곤파스로 인한 피해 복구를 장마가 오기 전에 끝내겠다고 하더니 4월에야 시작했다.

그 와중에 베어낸 나무를 제때 치우지 않은 탓에 이들 나무가 물길을 막아 더 큰 피해를 유발했다고 본다.

산사태가 났을 때 피해복구 공사를 하던 포클레인과 컨테이너 박스가 토사와 함께 떠내려왔다.

특히 토사와 함께 떠내려온 나무등걸이 아파트로 밀려들어오면서 피해를 키웠다.”

주민들의 성난 목소리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지난해 태풍 곤파스가 왔을 때 산사태의 흔적이 있어 주민들은 구청에 여러 가지 대비책을

요구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구청에서는 오히려 둘레길을 조성하면서 유모차를 끌고 다닐 수 있게끔

산책로를 넓혀주겠다는 말로 주민들의 불만을 잠재우려 했다.

이렇게 등산로와 산책길에 둘레길까지 최근 들어 산을 너무 파헤쳤다는 것이 주민들의 주장이다.

한마디로 손을 너무 많이 댔다는 말이다.

우면산 둘레의 피해 현장을 취재하다가 새로운 주장도 들었다.

터널에 대한 이야기다.

현재 우면산 아래에서는 민자로 건설되는 강남순환도로의 7공구 터널공사가 한창이다.

서초공고 쪽에서 우면산터널 남쪽 입구까지 우면산을 종으로 꿰뚫는다.

주민들은 “발파공사로 인한 진동이 암반층과 토층 사이에 간극을 만들고

이 부분으로 물이 스며들어 산사태를 부채질하지 않았느냐”고 주장했다.

 

환경운동연합 시민환경연구소장인 박창근 관동대(토목공학과) 교수에게 물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터널공사를 위한 폭파작업의 영향은 미미하다고 본다.

도심지역에서의 터널공사는 공법 자체가 다르다.

결국 산사태의 원인은 둘레길 조성 등 난개발이라고 본다. 화장을 엄청나게 했다.

공원사업, 둘레길 조성, 배수로 문제도 컸을 것이다. 배수로의 본래 형태가 많이 왜곡됐다.

난개발 외에는 문제가 생길 곳이 없다.”

전망 중시하는 마을 조성이 화 불렀다


피해 주민들의 확신에 찬 추측이 허무하게 빗나가는 듯했다.

중부대 송석환 교수에게 다시 물어봤다. 대답은 비슷했다.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지만 다른 요인들에 비하면 너무 미미해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그 영향력이 0.1%도 채 안 될 것이다.

머무르는 곳이 대전이어서 직접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난개발 말고는 문제를 찾을 수 없을 듯하다.”

우면산 주변의 피해 마을 몇 군데를 더 돌아봤다.

우선 대기업 회장 부인의 사망으로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은 형촌마을을 찾았다.

형촌마을은 풍양 조씨의 집성촌으로 시작됐다.

조선왕조 인조 대인 1644년 우면산 아래 성촌고을에 들어와 촌락을 형성하고 살았다고 한다.

지금 형촌마을이라고 불리는 곳은 엄밀히 말하면

성촌마을(잿말)과 형촌마을(샛말)이 합쳐져 한 마을을 이룬 동네다.

지금은 마을의 중심 진입로가 된 저수지 계곡의 물길을 기준으로 동쪽이 성촌, 서쪽이 형촌마을이다.

성촌마을은 말죽거리부터 과천까지 우면산 남쪽기슭에 늘어서 있던 열두 우마니 중에서

가장 큰 동네여서 큰말이라고도 불렸다.

 

일제강점기에는 시흥군 신동면 사무소가 있었다고 한다.

1963년 서울로 편입된 후

1979년 경부고속도로 인근 마을의 취락구조개선사업으로 도시형 마을로 탈바꿈했다.

2006년 서쪽의 송동(능안)·안골마을과 함께 개발제한구역에서 풀리면서 큰 집들이 들어섰고

이곳 토박이들의 상당수는 마을을 떠났다.


 

형촌마을을 물바다로 만든 주범은 마을 상류 저수지의 붕괴로 인한 범람이다.

현장에서는 수면 높이에 지름 1m 정도의 관이 눈에 띄었다. 배수로라고 했다.

 

형촌마을에서 문제의 저수지를 건설할 때 주민대표로 참여하고 또 7월 27일 아침에도

현장에서 저수지가 붕괴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조경구(76) 씨는 바로 그 배수로가 범람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저수지는 1965년 마을 아래 천수답에 물을 대기 위해 조성했다.

처음 콘크리트로 설치했던 배수로가 깨진 후 생태공원을 조성할 때 새로 냈는데,

준설도 하지 않고 상식적으로 저수지 바닥에 내야 할 배수로를 수면 가까이에

구경이 작은 관을 심는 것으로 끝냈다.

물이 급하게 쏟아져 들어오면 배수로로 배출되기 전에 바로 둑이 넘칠 수 있는 구조다.

아침에 저수지가 넘칠 것 같다는 주민의 말에 올라갔다 저수지가 터지는 순간을 목격했다.

저수지 옆 산비탈에 사태가 발생해 땅이 흔들리면서 저수지 둑도 함께 흔들리다

물이 넘치며 둑이 터졌다.

골목에 세워놓은 자동차가 넘친 물길을 막아 피해가 더 커졌다.”

형촌마을은 원래부터 평온한 자리가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

마을이 자리한 곳이 계곡 입구의 선상지라는 것이다.

 

골짜기를 따라 내려오던 물이 넓게 퍼지는 자리여서 늘 홍수 피해가 염려되는 곳이라고 한다.

마을은 산을 등져야지 골을 등지면 안 되는데, 형촌마을은 전망을 중시하다 보니

선상지의 ‘독기’와 ‘살기’ 등 가장 꺼려야 할 것들을 무시하고 오히려 찾아든 모양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형촌마을은 범람한 물길 주변의 집들만 피해를 봤을 뿐

언론에 등장한 것보다는 피해가 훨씬 적다고 조경구 씨는 말했다.

아침저녁으로 남태령을 넘어 출퇴근하는 직장인이라면 한 번쯤은 부러움의 시선을 보냈을 법한

남태령 전원마을은 뜻밖에도 세 줄기의 물길 위에 세운 마을이었다.

논이 펼쳐진 계곡의 집 몇 채 없던 마을에 취락구조개선사업을 하면서

도로 건너편 군부대 자리에 살던 주민을 이주시키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1987년 입주를 시작해 현재는 주택 200여 채에 600여 가구가 모여 산다.

물길 위에 마을을 조성하다 보니 뒷산에서 내려오는 물은 주택가 길을 따라

네 번이나 꺾이고서야 남태령을 따라 흐르는 큰 계곡으로 연결된다.

이 마을이 형성될 때부터 거주했다는 최모(73) 씨는

“그런 만큼 수로를 자주 청소해야 하는데 이를 방치한 것이 피해를 키웠다”고 주장했다.

“1990년대 초에 물난리가 한 번 났어.

그 후 매년 준설하다 별 문제 없자 10여 년간 방치해놨어.

그러다 이렇게 당한 거야.

지름 150cm짜리 하수도관을 열어보니 토사가 쌓여 깊이가 30cm도 안 돼.

게다가 태풍 곤파스 때 쓰러진 채 방치한 나무와 계곡의 비닐하우스에서 떠내려온 부직포가

물길을 막아 피해를 더 키웠어. 배수로만 뚫렸더라도 피해는 훨씬 적었을 거야. 인재가 반이지.”

산이 아닌 골을 등진 전원마을


전원마을의 침수는 물길을 따라 세 방향에서 시작됐다.

최씨가 언급한 계곡은 상류에서 산사태가 일었지만 토사가 중간에 경사가 완만한 지역을 거치면서

마을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마을 중심부를 향해 흐르는 계곡은 토사를 밀고 내려와 네다섯 채의 주택을 덮쳤다.

마을 입구에서 보면 왼쪽, 상류에 주말농장이 자리한 계곡의 물은 떠내려온 차에 물길이 막혀

방향을 틀어 흐르면서 가장 큰 피해를 냈다.

TV에 여러 번 비친, 트럭 위에 얹힌 승용차가 있던 곳이 바로 이곳으로,

전원마을의 인명 피해는 대부분 이쪽에서 발생했다.

우면산 북쪽 기슭인 서초구 방배동의 산사태는 8차선이나 되는 남부순환도로를 휩쓴 데 이어

아파트단지로 밀려든 형세다.

특히 도로 쪽 아파트는 토사의 직격탄을 맞아 피해가 컸다.

 

박창근 관동대 교수는

“남부순환도로는 개설된 지 제법 오래돼서 원래부터 지금의 형상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이번에 산사태가 난 곳은 산을 깎아 길을 낸 절개지다.

피해를 본 아파트 역시 3층까지는 인근 도로와 비슷한 높이다. 산을 깎아 지었다는 말이다.

결국 이번 산사태는 절개지를 치고 나온 것”이라고 해석했다.

인근에 사무실을 둔 고제희 대동풍수지리학회장은 색다른 해석을 내놨다.

그는

“S아파트 인근은 집을 북향으로 지어야 했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그래야 통풍과 배수가 좋다.

그런데 억지로 남향으로 짓다 보니 배산임수가 아니라 배수의 진을 친 형상이다.

배산임수만 지켰어도 집 안까지 토사가 밀려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앞산을 바라볼 때는 곡살(谷殺·계곡을 말하는 풍수 용어)을 바라봐서는 안 된다.

앞산의 높이도 눈썹과 심장 사이 정도여야 좋다.

눈썹보다 높이 보이면 ‘압혈’이라고 해서 집안에 불구자가 나타나거나 재산을 잃는 형세다.

안산의 개념으로 사방 둑을 쌓아야 한다.”

산사태 직후부터 10여 일 동안

우면산 일대를 돌아보면서 주민·전문가 등 수십 명을 만나 의견을 청취했다.

이들은 제각각 지난해 곤파스의 피해복구 지연, 그로 인한 수로 막힘,

무분별한 산책로 조성 등을 산사태를 키운 원인으로 지목했다.

그중에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하는 주장은 “과도한 난개발”이었다.

이번 산사태는 집중호우가 촉발했지만 결국은 인간의 과도한 욕망이 빚어낸 참사라는 말이다.

‘구글 어스’를 통해 우면산 지역을 살피면

골짜기마다 파고든 인간들의 자취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벌레 먹은 나뭇잎처럼 보이기도 한다. 너덜너덜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다.

 

풍수에서는 골은 위험해서 피해야 할 지역이다.

“골로 간다”는 말은 “죽으러 간다”는 말로

한국전쟁 때 양민들이 골짜기로 끌려가 죽음을 당하던 데서 온 말이라지만,

풍수에서는 골짜기를 피하라는 말로 이해한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조망이니 전원이니 하며 자꾸 계곡으로 파고든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이런 욕심에 못 이겨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였던 땅도 야금야금 베어져나갔다.

간신히 개발에서 돌아난 산자락과 능선에는 산책로와 등산로가 잎맥처럼 뻗었다.

박창근 교수는

“지구상에는 인간의 공간, 자연의 공간,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공간이 있는데

문제는 항상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공간에서 발생한다.

인간이 자신들의 공간을 넓히려다 자연의 공간을 과도하게 침범하고 조종하려다 문제를 유발한다.

모든 문제의 일차적 원인은 인간의 욕심”이라고 말했다.
인간의 끝없는 욕심이 하늘이 준 명당을 파괴하는 격이다. 욕망의 덫에 걸려 화를 자초하는 셈이다.

 

땅과 어울리는 집 짓기를 주장해 세간의 관심을 끄는 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 씨 역시

문제의 시작은 “인간의 욕심”이라고 말했다.

“조망이 좋은 데만 찾다 보니 산으로 올라가고 깎아낸다.

현대인들은 지나치게 기술을 믿는다. 옛날에는 지리를 읽었는데 지금은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이 만든 길은 바꿀 수 없다.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

또 우리나라의 기후가 과거와 많이 바뀌었다.

100년에 1회 빈도라니 설마 내가 사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까 방심하는데,

이전의 통계치를 대폭 보완해야 한다.

자기 집안만 생각할 때 밖의 문제가 자기 집에까지 영향을 주게 된다.

옛날에는 비가 오면 모두 밖으로 나가 함께 대비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안 한다.”

난개발이 사람과 자연 모두에 피해준 것


임형남·노은주 씨는

“또 국토를 다루는 사람들, 특히 지자체장들이 전문가의 조언을 외면한 채

자신의 기호에 따라 임기 안에 무엇인가 만들어 보여주려고 하다 문제를 유발하기도 한다”고 꼬집었다.

개인의 헛된 욕망이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형촌마을 위 계곡에는 물길을 막고 산길을 깎아내면서 자연생태공원이라는 것을 만들어놓았다.

제일 훌륭한 자연생태공원은 자연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다.

굳이 관찰이나 학습을 위해서라면 여기에 약간의 편리만 더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연 속에 인위적으로 꾸민 자연생태공원을 만들었다.

사람이 의지해 살기 좋다는 우면산의 과도한 난개발로 사람과 자연 모두 크게 서로에게 상처를 줬다.

산사태는 자연을 그대로 둔 곳에서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고 무조건 개발을 막을 수는 없다.

 

자생풍수가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는

“풍수라고 해서 원래 지형을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잘못이다.

땅을 사람과 별개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 사람은 땅에 의지해 살아간다.

개발이 무조건 반풍수적(反風水的)이지는 않다”고 말한다.

“토성(土星)의 육산(肉山)은 산사태에 비교적 강하다.

반면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손길을 타기도 쉽다.

우면산이 심하게 개발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그 정도다.

소가 존다는 것은 매우 평화로운 형국이다. 그러나 소는 일을 해야 한다. 필요하면 깨워야 한다.

바로 개발이다. 그러나 졸던 소가 깜짝 놀라 날뛰게 하는 단계까지 갔다는 것이 문제다.

깨우되 놀라게 하지 말아야 한다. 상식의 눈으로도 위험은 감지할 수 있다.

사람들이 이를 무시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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