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관

“YS의 호의 원치 않는다, 공정한 게임의 룰만 지켜라”

기산(箕山) 2011. 5. 29. 12:49

“YS의 호의 원치 않는다, 공정한 게임의 룰만 지켜라”

 

                                                                                           [중앙선데이] 입력 2011.05.29 05:34

[장성민 전 의원 金大中 이야기<14>] 대권을 향한 네 번째 도전의 시작

1995년 8월 15일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발기인대회에서

이희호 여사, 기업인 박상규씨, DJ와 김영배 의원이 박수를 치고 있다(사진 왼쪽부터). [중앙포토]


 

1995년 7월 18일, DJ는 마침내 정계에 복귀했다.

목표는 단 하나, 네 번째로 대통령 자리에 도전하기 위해서였다.

돌이켜 보면 그건 전부 아니면 전무(全無)인, 너무나도 두려운 도박이었다.

또다시 패배한다면 DJ는 죽는 날까지

‘약속을 밥 먹듯 어긴 정치인’이란 조롱과 비난을 받으며 살아가야 할 판이었다.

정치를 떠나도 더 이상 원로 대우를 받을 리 만무했다.

역사가 자신을 어떻게 기록할지 생각하면 DJ는 소름이 끼쳤을 것이다.

 

그러나 승리한다면, 상황은 정반대가 될 터였다.

지지자들은 DJ를 ‘온갖 시련을 극복한 불굴의 지도자’로 칭송하고

정적들조차도 그의 끈질김과 집요함에 혀를 내두를 게 뻔했다.

세상의 평가와 인심이란 게 원래 그랬다.

DJ는 무엇보다도 한평생을 꿈꿔온 국가 최고 지도자로서

자신의 정책을 실현할 수 있게 된다는 게 행복했을 것이다.

그런데 정계 복귀와 신당 창당에 대한 여론이 너무 나빴다.

정계 복귀 선언 하루 전날인 7월 17일 오전, 서울 홍은동 스위스그랜드 호텔에서 열린 중진회의에서

DJ는 창당을 너무 서두르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는 “창당 작업에도 경제속도가 필요하다.

차가 마구 달리다 중앙선을 넘어 사망하는 수가 많으니 과속하면 안 된다.

 

민주당 잔류파들에 대한 설득 작업을 계속하라”고 말했다.

그날 저녁 신라호텔에서 열린 만찬에선

“최선의 방법은 민주당에 남아 개혁하는 것인데, 현실이 허락하지 않아 할 수 없이 이 길을 택했다.

오죽하면 당사까지 넘겨주면서 창당을 하겠나.

그러나 한 고비 정리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가볍기도 하다. 나는 앞날에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당시 DJ에게 최상의 구도는 호남과 영남이 결합한 형태였던 민주당에 복귀해 당권을 잡고,

거기서 대선 후보로 나서는 것이었다.

 

민주당에는 홍사덕·이부영·노무현·이철 등 젊고 패기 넘치는 수도권과 영남 정치인들이 많았다.

차기 대선에서의 승리 가능성 면에서나 정계 복귀의 모양새를 볼 때나 그게 훨씬 나았다.

 

하지만 자신이 대선 후보가 되고픈 이기택 총재가 버티고 있었다.

그를 꺾는 건 쉽지만 두고두고 발목을 잡힐 게 끔찍했다.

울며 겨자 먹기라도 따로 당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DJ는 마지막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이기택 총재와 민주당 잔류파 의원들이 결국은 자신에게 돌아오길 기대했다.

비난을 자제하라고 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정치 9단의 착각이었다.

민주당은 97년 대선 상황에서 DJ에게 오는 대신 신한국당과 합당해 한나라당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원래는 신당이 창당되면 어? 하거나 야! 하는 말이 나와야 한다.

‘아니, 그 사람도 거기 갔어?’ 하고 깜짝 놀라거나 ‘그런 인물이 참여한 걸 보니 대단하구나’ 하는

감탄이 터져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95년 7월, DJ가 준비하던 신당엔 그런 거물이 없었다.

기자들 사이에선 “이게 무슨 신당이냐, 그냥 DJ당이라고 해라”는 비아냥이 나돌았다.

 

그런 분위기를 보고했다.

“총재님, 기자들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다들 어떤 사람들이 신당에 영입되는지 알려달라고 하는데요,

새로운 인물이나 거물급이 있는지 궁금해 합니다.”

 

DJ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아요.

장 동지가 기자들이 영입 대상으로 말하는 게 주로 어떤 사람들인지 파악해서 나한테 보고하세요.”

시간이 필요했다.

원래 창당을 광복절인 8월 15일에 맞춰서 하려다 9월로 늦춘 건 이런 배경이 있었다.

당명은 공모했다.

21세기와 통일과 새 정치의 의미를 포함시켜 달라고 했다. 분위기 탓인지 응모작이 시원찮았다.

 

‘통일민주연합’ ‘신세기당’ ‘신정치민주당’ ‘비전21세기연대’ 등이 있었다.

결자해지(結者解之)고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파는 법이다.

 

DJ 본인이 직접 ‘새정치국민회의’라는 이름을 제시했다.

인도의 초대 총리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가 몸담고 있던 국민회의파에서 착안한 것이다.

신당을 비꼬는 얘기들도 많이 나왔다.

신당이 아니라 낡아빠진 구당(舊黨)이고, 경로당이고, 호남당이고, 측근당이라는 거였다.

이 4가지 부정적 이미지를 벗어나는 게 과제였다.

 

DJ는 신당의 5대 지향점을 밝혔다.

▶지방화 시대의 책임정당

▶젊은 층에 희망을 주는 정당

▶중산층에 안정을 주는 정당

▶통일 주도 정당

▶21세기형 대체 정당이다.

 

젊은 층을 내세운 건 DJ 자신의 나이를 보완하기 위한 거였다.

중산층과 안정을 얘기한 건 강경투쟁 이미지를 희석하겠다는 뜻이다.

이 모든 게 차기 대선을 예비한 포석이었다.

DJ는 “젊고 참신한 전문직을 우대하라”고 영입 지침을 내렸다.

 

나는 때때로 ‘유연성’이야말로 DJ의 성공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DJ는 상황이 달라지면 그에 따라 대책도 바꾸었다.

도그마에 빠져 허우적대지 않았다. 그런 걸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사례를 들어보자.

DJ는 14대 대선을 앞둔 91년에는 재야 인사들과 구 야권 인사들을 영입했다.

그러나 결국 대선에서 패배했다.

그것도 적지 않은 표 차이였다. 그 쓰라린 경험을 DJ는 결코 잊지 않았다.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재야운동권이 아닌 젊은 전문직과 여성을 대거 영입하려고

노력한 건 그런 반성의 산물이었다.

8월 10일 새정치국민회의에 참여하는 외부 영입 인사 249명이 공개됐다.

한 100명쯤 될 것이라던 예상을 훌쩍 뛰어넘은 것이다.

그래도 대어급은 없었고 ‘질보다 양’이라는 게 언론의 평가였다.

법조계에서는 변정수 전 헌법재판관, 이영복 전 서울지법 부장판사, 정혜원 전 서울지검 검사와

신기남·유선호·천정배·임종인 변호사 등이 왔다.

 

학계는 미주리대 물리학과 김현영 교수, 경희대 조경철 부총장, 양성철 교수, 건국대 한정일 교수

등이었다.

 

공직자는 이동원 전 외무장관, 신도성 전 통일원 장관, 허재영 전 건설부 장관,

한준수 전 연기군수 등이 포함됐다.

 

군 출신은 천용택 전 비상기획위원장이 왔는데 이분은 나중에 DJ정부에서 요직을 많이 차지했다.

 

기업인으론 박상규 전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장과 해법수학 저자로 유명한 최용준 천재교육 대표

등이다.

 

문화체육계 인사 여러 명이 참여했는데 탤런트 정한용·이효춘·임현식, 가수 최희준· 남진·이선희,

야구감독 김동엽씨 등이었다.

 

여성계에선 정희경 전 현대고 교장이 동참했다.

 

9월 4일, 창당 하루 전날엔 2차 영입자가 발표됐다.

신낙균 여성유권자연맹회장, 유재건 경원대학장, 길승흠 서울대 교수, 추미애 전 광주고법 판사

등이다.

DJ의 측근들과 호남 의원들은 신당에서 차별 대우를 당했다.

 

신당 당무위원 70명이 발표됐는데 현역 의원 14명이 당무위원에서 탈락했다.

탈락자 중 10명이 호남 출신이었다.

 

당무위원에는 30대의 김민석·허인회와 40대의 신계륜 등 45세 미만이 10명이었다.

외부 영입 인사가 22명이고 여성이 7명이다.

한마디로 당의 이미지를 확 바꾼 것이다.

 

당직도 마찬가지였다.

당 6역에는 사무총장 조순형, 정책위의장 박상천, 비서실장 정동채, 기조실장 문희상, 연수원장 김충조,

지도위 부의장 한광옥이 내정됐다가

최종적으로 호남 출신인 박상천 의원이 부산 출신 손세일 의원으로 바뀌었다.

DJ의 측근과 호남 의원들은 억울했겠지만 다들 입을 다물었다.

DJ가 정계 은퇴를 한 뒤 그의 분신으로 궂은 일을 도맡아왔던 권노갑 부총재조차 몸을 낮춰

8명의 지도위원 중 하나로만 임명됐다.

 

9월 6일 첫 지도위 회의가 열렸을 때 그는 제일 말석에 앉았고, 회의 내내 아무 말 안 했다.

앞으로 가신들은 나서지 않겠다는 상징적 제스처였다.

당내에선 측근인 한광옥 부총재가 지도위 부의장에 임명된 것을 놓고

“왜 한 부총재만 중용하느냐”는 불만 섞인 목소리가 있었다.

그건 한 부총재의 독특한 캐릭터 때문이었다.

 

그는 DJ의 핵심 측근이면서도 측근 이미지를 별로 안 풍겼다.

DJ는 잡음을 안 만들면서 뚝심 있게 일처리를 하는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나중에 DJ가 JP(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이른바 DJP연합을 할 때

대리인으로 한 부총재를 내보낸 것도 그런 이유였다.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행사는 9월 5일 올림픽 펜싱 경기장에서 열렸다.

DJ와 거리를 두던 조순 서울시장이 내빈 자격으로 참석했다.

 

YS(김영삼 대통령)가 민자당 총재 명의로 화환을 보냈다.

김영구 정무장관과 강삼재 민자당 사무총장이 참석했다.

JP도 화환과 함께 한영수 자민련 원내총무를 보냈다.

 

정작 민주당의 이기택 총재로부터는 화환도 없고 당직자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마음에 맺힌 게 얼마나 많은지를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간난신고 끝에 창당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DJ는 자신감이 넘쳤다.

9월 11일 외신기자 회견 때는 그게 묻어났다.

 

“세대 교체의 잣대는 연령이 아니라 정신이다.

대통령에 적합한지의 여부는 얼마나 경륜과 경험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돼야 한다.

YS의 어떠한 호의도 원치 않고 공정한 게임의 룰만 지켜지면 된다.

다음 대선에서는 후보 간의 TV토론이 반드시 실시돼야 한다.

국민이 원하고 공정선거의 여건이 갖춰지면 내년께 출마 여부를 밝히겠다.”

또 이날 의총장에선 희망을 피력했다.

“지구당 조직책 인선 작업에 착수하자. 서울·경기·인천서 전승의 노력을 통해

96석 중 60~70%를 차지하고 호남을 추가하면 지역구를 100석 넘게 차지할 수 있다.

손볼 것을 손보고 빈 곳을 채워야 할 지구당이 수도권에 50여 곳이다.” 물갈이를 하겠다는 예고였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란 속담이 맞았다.

 

세상에 좋기만 한 건 없는 법이다.

정치를 시작한 이래 DJ를 가장 궁지로 몰아넣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이

불과 한 달도 안 돼 터져 나올 줄은 그 누구도 모르고 있었다.



정리=김종혁 중앙SUNDAY 편집국장 kimchy@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