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관

5·16 50년, 박정희 신드롬의 변화

기산(箕山) 2011. 5. 19. 15:05

[포커스] 5·16 50년, 박정희 신드롬의 변화

                                                                                     주간경향 | 입력 2011.05.19 14:17


ㆍ역대 대통령 신뢰도 여전히 1위지만 2·3위와의 격차 줄어

1980년대 후반 어느 평론가는 "사람은 두 번 죽는다.

한 번은 육체적으로 죽음으로써, 다른 한 번은 다른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짐으로써"라고 썼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육신은 32년 전 흙 속에 묻혔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50년 전 그가 5·16 쿠데타로 한국 현대사의 한복판으로 진입한 이후

독재정권의 수장으로 군림하던 때는 물론이고, 민주정부가 수립된 지 30년에 육박하는 지금까지도

여러 가지 형식으로 세상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남아 있다.



↑ 1961년 쿠데타 직후 박정희 당시 육군 소장이

   육사생도들의 5·16 쿠데타 지지 시위 행진을 지켜보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

 

 

박정희 정권 시기 기틀을 다진 산업화 패러다임은

성장 제일주의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우리 사회의 한 축에서 만만치 않은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담론의 차원에서도 박정희 체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여전히 뜨거운 논쟁거리다.

그의 이름 좌우로는 산업화와 경제성장의 주역이라는 호평과

민주주의를 억압한 독재의 화신이라는 부정적 평가가 양날개를 펼치고 있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그의 이름이 전면에 부각되는 일은 드물었다.

12·12 쿠데타로 박정희 정권을 넘어뜨리고 집권한 신군부 세력이 권력을 잡으면서

김종필 전 총재를 비롯한 박정희 정권 시기 핵심 세력들이 정치적으로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활'은

역설적으로 민주화와 함께 민주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출현했다.

 

1987년 전두환 정권이 무너지고 대통령 직선제가 성취된 상황에서

구 공화당 세력은 신민주공화당이라는 이름으로 김종필씨를 그해 대통령 선거 후보로 추대했다.

여론의 재평가 움직임도 이때부터 수면 위로 드러났다.

1989년 10월 25일 중앙일보가 10·26 10년을 맞아 조사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61%가 "과오보다 공적이 많았다"고 대답했다.

과오가 더 많았다고 응답한 이는 13.7%에 불과했다.

 

이보다 한 달 전에 실시된 한국갤럽조사연구소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약 66%가 박정희 정권 18년이 우리 역사에 유익했다고 답했다.

김영삼 정권은 5·18 특별법 제정, 친일 행적이 있는 독립유공자들의 서훈 박탈 등

'역사 바로세우기'를 통해 군사정권 유산 청산작업에 시동을 걸었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은 집권 후반기 친인척 및 측근 비리로 인한 정치적 혼란에

외환위기 등으로 인한 경제적 혼란이 겹치면서 정권의 중추가 흔들렸다.

민주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부활

보수진영의 '박정희 다시 보기' 흐름은 이같은 정권 실패의 반작용을 얻어 표면화됐다.

 

1997년 4월 동아일보 창간 77주년 기념 여론조사에서

박 전 대통령은 직무를 가장 잘 수행한 대통령 1위(75.9%)에 꼽혔다.

보수진영의 담론 공세도 이 시기에 본격화했다.

 

1990년대 후반 조갑제 당시 < 월간조선 > 부장은

조선일보 지면에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제목의 연재물을 실어 큰 반향을 얻었다.

이 시리즈는 < 월간조선 > 으로 지면을 옮겨 연재되다가 1998년과 1999년에 5권의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중앙일보는 1997년 7월부터 6개월 동안 '실록 박정희'를 연재했다.

주로 박 전 대통령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킨 내용이었다.

 

이런 흐름을 타고 1999년에는 < 박정희 붐, 우연인가 필연인가 > (말과창조사)라는

책까지 출간됐다.

 

한편 1997년에 소설가 이인화씨가 장편 < 인간의 길 > 을 출간하면서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문학적 재발견' 시도까지 나왔다.

정해구 성공회대 교수는

'박정희 신드롬의 양상과 성격'이란 글에서 이같은 움직임을

"과거에는 은밀하게 추진되던 박정희 관련 각종 사안들이 이제는 공개적이고 당당하게

추진되기 시작했다"고 정리했다.

홍윤기 동국대 철학과 교수는

이 시기 박정희 신드롬은 그의 지도자로서의 치적을 미화하려 했던

학계 중심의 정당화 담론과 비교해 언론계와 문화계를 중심으로 이뤄졌으며,

"혁명가로서 박정희 개인의 초인적 생애를 중심"으로

그를 대중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박정희 신드롬은 김대중 정권을 지나 노무현 정권 시기에도 이어졌다.

 

2004년 연말 경향신문 여론조사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응답자 67%의 지지를 받아 역대 대통령 중 국정 수행능력이

가장 뛰어난 대통령으로 꼽혔다.

2위를 차지한 김대중 전 대통령(19.3%)과 무려 47%포인트가 넘는 격차였다.

 

이런 상황에서 교과서의 5·16 관련 기술을 고치려는 시도까지 나타났다.

뉴라이트 계열 '교과서 포럼'은 지난 2006년 '한국 근현대사 대안 교과서' 시안을 집필하면서

4·19를 '의거'로 격하하는 동시에 5·16을 '산업화를 주도할 대안적 통치집단이 등장한 혁명'으로

규정하면서 격렬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내용은 결국 지난 2008년 출간된 <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 에서

"5·16은 일부 군부세력이 헌법 절차를 거쳐 수립된 정부를 불법적으로 전복한 쿠데타였다"면서도

"급격한 경제성장은 한국인의 물질생활과 정신생활에 혁명적인 변화를 초래하였다.

그 점에서 5·16 쿠데타는 근대화 혁명의 출발점이기도 했다"는 기술로 귀결됐다.

국정수행능력 역대 대통령 1위

이처럼 박정희 신드롬이 민주정부 시기에 강력하게 부상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진보진영 학자들은 대체로 민주정부가 한국 사회의 미래와 관련하여

성장중심 패러다임을 뛰어넘는 대안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데서 그 원인을 찾는다.

 

김성보 연세대 교수(사학과)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가 곧 그 시절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은 아닐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김 교수는

"민주화 이후 독재/민주주의의 이분법이 희석되면서 시민들의 관심이 경제적인 풍요로 이동했다.

그러나 민주정부 시기에 체감하는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됐다.

그런 배경에서 박 전 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십과 경제성장이 부각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정희 신드롬의 유효기간이 무한대는 아니다.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지난해 9월 시사주간지 < 시사인 > 은 역대 대통령 신뢰도 조사를 발표했다.

박 전 대통령은 순위로는 여전히 1위(34.2%)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25.3%)과 김대중 전 대통령(18.2%)이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응답자의 34.2%만이 박 전 대통령을 '가장 신뢰하는 대통령'으로 꼽아,

2007년 조사(52.7%)와 2009년 조사(41.8%)에 비해 눈에 띄게 하락했다.

좀더 또렷한 변화의 조짐도 있다.

지난 12일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는 여론조사기관 리서치뷰에 의뢰해

'다시 뽑고 싶은 대통령'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990명 중 57.5%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지목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47.4%, 김대중 전 대통령은 39.3%의 지지를 받았다.

 

연구소의 심상득 연구팀장은

"역대 대통령들을 상대로 한 과거의 조사 결과를 보면, 늘 박 전 대통령이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흐름이 바뀌었다.

이번 조사에서 노무현·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의 지지도를 합치면 박 전 대통령을 넘어선다"

고 말했다.

무슨 의미일까.

 

심 연구팀장은

"박정희식 발전국가 패러다임이 드디어 한계에 부닥치면서

시민들이 한국 사회의 미래 비전을 이제 진보와 복지에서 찾고 있다는 방증일 것"

이라고 말했다.



<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