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관

영어의 한국 상륙사

기산(箕山) 2011. 4. 11. 08:17

영어의 한국 상륙사

 

하멜과 함께 영어사용자 조선에 첫 발?

 

구한말 영어의 확산과정을 알아보기 전에 몇가지 전사(前史)를 살펴보고 넘어가자.

먼저 영어, 혹은 영어문화권의 사람이 한반도에 첫 발을 디딘 것은 언제일까?

기록상 1653년이라는 '설'이 있다.

 

바로 네덜란드 사람 하멜(Hendrick Hamel) 일행이 탄 배가 제주도에 난파, 표류했을 때다.

하멜 일행 36명은 이 표류로 조선에서 13년20일동안 '구금' 생활을 하다가,

1666년 9월 일본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해 널리 알려진 '하멜 표류기'를 출간하면서 

조선의 세계화에 처음으로 기여했다.

 

그런데 이 하멜 일행 가운데 한명이 스코틀랜드 출신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기록상 최초의 영어권 인물이 한반도에 발을 디딘 것이 될 것이다.

효종실록에는 하멜 일행의 표류 사실을 제주 목사(濟州牧使) 이원진(李元鎭)의 보고를 통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배 한 척이 고을 남쪽에서 깨져 해안에 닿았기에 대정 현감(大靜縣監) 권극중(權克中)과

판관(判官) 노정(盧錠)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보게 하였더니,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배가 바다 가운데에서 뒤집혀 살아 남은 자는 38인이며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도 다릅니다.

 

파란 눈에 코가 높고 노란 머리에 수염이 짧았는데, 혹 구레나룻은 깎고 콧수염을 남긴 자도 있었습니다.

그 옷은 길어서 넓적다리까지 내려오고 옷자락이 넷으로 갈라졌으며

옷깃 옆과 소매 밑에다 이어 묶는 끈이 있었으며 바지는 주름이 잡혀 치마 같았습니다.

왜어(倭語)를 아는 자를 시켜 묻기를 ‘너희는 서양의 길리시단(吉利是段/크리스챤)인가?’ 하니,

다들 ‘야야(耶耶)’ 하였고, 우리나라를 가리켜 물으니 고려(高麗)라 하고,

정동(正東)을 가리켜 물으니 일본(日本)이라고도 하고 낭가삭기(郞可朔其)라고도 하였는데,

이어서 가려는 곳을 물으니 낭가삭기라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서울로 올려보내라고 명하였다.

전에 온 남만인(南蠻人) 박연(朴燕)이라는 자가 보고 ‘과연 만인(蠻人)이다.’ 하였으므로

드디어, 금려(禁旅/금군)에 편입하였는데, 대개 그 사람들은 화포(火砲)를 잘 다루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에는 코로 퉁소를 부는 자도 있었고 발을 흔들며 춤추는 자도 있었다."---


의사소통을 위해 왜어를 아는 자를 통역관으로 썼음을 알 수 있다.

당시까지만해도 외국인과의 의사소통은 중국과 왜, 여진, 몽골이 거의 전부 였다.

 

태국-이슬람-타타르 등과 이미 교류

 

조선 사회는 다양한 외국인과의 접촉 기록은 물론 많은 외국인들의 귀화 기록을 갖고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섬라곡국(暹羅斛國/태국), 조와국(자바), 회회사문(이슬람교 승려),

달달(타타르) 등과의 교류 기록이 곳곳에 나타난다.

특히 교류가 많았던 왜나 야인(여진)들은 큰 사회문제가 될 정도였다.

 

광해군일기(광해군 1년,1609) 4월 10일자엔,

"귀화한 오랑캐들이 해서(海西)로부터 경기, 호남, 호서의 해변에 이르기까지 없는 곳이 없으며,

그중에도 호남과 호서에 더욱 많습니다.

이들은 고기잡이로 생업을 삼으면서,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드는 자가 날로 불어나,

4도에 뿌리박고 있는 배가 200여 척에 이릅니다.

이들은 해로(海路)에 익숙해 배 부리기를 말 부리듯 하여 우리나라 사람이 미치지 못할 지경입니다."

라고 기록할 정도다.

 

이처럼 조선과 외국과의 교류가 적지 않았으나, 영어 문명과의 교류는 17세기 들어 비로소 시작됐다.

그 이전 영어권은 '야만'이었고, 이때 비로소 세계사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멜 일행, 자카르타 출발 대만 거쳐 나카사키로 가다 난파


'하멜표류기'를 쓴 하멜은 배가 난파했을 때 배의 화물 감독으로 회계 기록을 맡고 있었다.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표류와 조선에서의 구금 생활에 대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효종실록 기록에는 38인이 살아남았다고 했지만, 하멜은 36인으로 기록했다.

자신들에 관한 스스로의 기록이기 때문에 하멜의 기록이 정확할 것이다.

 

이 '하멜 표류기'를 보면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만났을 때,

의사소통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보여준다.

'하멜표류기'(김태진 옮김, 서해문집 2009년)에 기록된,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낯선 이방인끼리의 소통 과정을 보자.

 

"1653년 6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의 무역선 스페르베르(Sperwer) 호는

포르모사(대만)를 향해 바타비아(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당시 동인도회사의 거점)를 출발했다.

 

항해는 순조로워  7월16일 포르모사의 항구에 도착했다.

짐을 내리고 며칠을 쉰 뒤, 스페르베르 호는 다시 일본 나카사키를 향해 떠났다.

 

태풍이 몰아치는 시기여서 순조로운 항해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빌었다.

몇차례 날씨 변덕으로 항해의 차질을 빚더니, 8월15일 밤 배가 바위에 부딪쳐 산산조각 났다.

8월16일 아침 해변에서 수습해 보니, 64명의 선원 가운데 36명만이 살아 남았다.

 

이튿날 조선인들과 처음으로 조우했다.

몇 백m쯤  떨어진 곳에서 1명이 나타나 '손짓'을 했지만, 그들은 보자마자 달아났다.

얼마후 또 3명이 나타나 '손짓 발짓'을 다해도 다가오지 않았다.

그런데 나중에 1천명 내지 2천명이 몰려와 포위하고,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물었으나 알아 들을 수 없었다.

 

우린 손짓 발짓 해가며 일본에 있는 나가사키로 가려 했다는 걸 말해 보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우린 서로 의사소통이 안되었고, 그들은 '야판(Japan)'이라는 말을 몰랐다.

 

8월22일, 제주 목사 앞으로 끌려갔다.

목사 가까이에 가니, 그는 손짓으로 우리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우리도 온갖 손짓 발짓으로 일본 나카사키로 간다는 대답을 나타내고자 했다.

이에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뭔가 알겠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몸짓으로 대답했으나, 서로의 말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말은 서로 전혀 알아 듣지 못했지만,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음을 볼 수있다.

말은 안통해도 보디랭귀지는 동서고금을 떠나 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네덜란드 귀화인 박연 서울서 내려와 통역

 

'서울로 올려보내라'는 조정의 명에 따라, 난파 두달 보름여 뒤

일행을 서울로 압송할 사람들이 제주에 도착했다.

 

이 압송단 가운데 네덜란드인으로 조선에 귀화해 살고있던 박연(朴燕)이 포함돼 있었다.

박연은 네덜란드 선원으로 1627년 제주 해안에 식수를 구하러 상륙했다가 체포돼

서울로 압송되어 조선에 귀화한 인물로,

본명은 벨테브레(Jan. Janse. Weltevree)였다.

 

물론 박연은

신라 우륵, 고구려 왕산악과 함께 3대악성으로 불리는 조선초기의 박연(朴煙)과는 다른 인물.

박연을 포함한 압송단과 하멜일행과의 만남은 '하멜표류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10월29일 오후에 서기와 일등항해사 그리고 하급선의(下級船醫)가 제주 목사에게 불려갔다.

그곳에 가보니 긴 붉은 수염을 한 어떤 사람이 있었다.

 

목사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맞춰 보라고 해, '우리와 같은 네덜란드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목사는 웃으며 "그는 조선사람"이라고 우리에게 손짓 발짓으로 설명해 주었다."

 

하멜 일행과 제주부 사람들은 두달여를 함께 지내면서

서로간에 손짓 발짓으로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제주 목사가 '당신들과 같은 나라 사람이 아니라 조선사람이라고 설명'하고,

이를 하멜 일행은 알아들었던 것이다.

 

"그는 약 57, 8세로 보였는데 놀랍게도 모국어를 거의 잊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의 말을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없으나, 약 한달정도 같이 지내다보니

그가 다시 모국어를 알게 되었다."

 

아무리 모국어라도 오랫동안 안 쓰면 완전히 잊어먹는다는 것도 알 수 있다.

1627년에 배가 난파돼 잡힌 뒤, 26년동안 네덜란드말을 쓰지 않고 살았으니,

아무리 모국어라도 잊을만한 시간이었다.

 

하멜 일행은 나중에야 그의이름이 벨테브레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1626년 홀란디아 호를 타고 고국을 떠났고,

1627년 오버커크 호를 타고 일본으로 가던 중에 조선 해안 근처에서 역풍을 만나면서 식수가 떨어졌다.

 

그래서 벨테브레를 포함한 3명이 식수를 구하러 보트로 제주해안에 내렸다가

조선 관헌에게 잡혀 서울로 압송됐다.

홀란디아 호는 그들 3명을 남겨놓은 채 달아났다.

 

 

 

 

서울 압송 훈련도감 배속--- 탈출 시도하다 강진 유배

 

하멜 일행은 제주에서 10개월을 보낸 뒤 서울로 압송되어

'화약을 잘 다룬다'는 이유로 금려(禁旅/금군)에 배속된다.

훈련도감 소속 왕의 친위대에 임명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서울 생활은 몹시 고달펐다.

하멜표류기에 따르면, 이들은 고관들의 집에 불려가 광대처럼 자신들의 모습을 구경시켜야 했고,

밖에 나가선 물론이고 집에서조차 구경꾼들 때문에 조금도 쉴 수가 없을 정도였다.

붉은 머리와 흰 피부, 파란 눈을 가진 이들은 조선사람들에게는 참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이처럼 피곤한 생활을 하던중 1655년 청나라 칙사가 조선을 방문하자, 

이들에게 호소해 조선을 탈출하려는 시도가 벌어졌다.

실패로 돌았갔지만, 이를 계기로 하멜 일행은 전라도 강진의 병영으로 유배됐다.

 

효종실록에는 이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청나라 사신이 왔을 때에 남북산(南北山/ 헨드릭 얀스)이라는 자가 길에서 하소하여

고국으로 돌려보내 주기를 간청하니, 청 사신이 크게 놀랐다.

남북산이 애가 타서 먹지 않고 죽었으므로 조정이 매우 근심하였으나,

청나라 사람들이 끝내 묻지 않았다."---

 

남북산이란 자가 청나라 사신 앞에 나타나 고국으로 돌려보내 줄것을 간청하고,

먹지 않아 스스로 굶어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멜표류기에는 효종실록과는 다소 뉘앙스가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일등항해사(헨드릭 얀스)와 포수(헨드릭 얀스 보스) 등 2명이

청나라 칙사 앞에 네덜란드 옷을 입고 나타나 고국으로 돌려보내 줄 것을 호소했으나 말이 통하지 않았고,

두사람은 곧 체포돼 수감됐는데 얼마 후에 죽었다.

그들이 자연사했는지 참수됐는지는 분명히 알지 못했다"고 했다.

 

조선은 외국인을 억류하고 있다는 사실이 밖으로 알려지기를 원치 않아,

실제 2명이 탈출하기위해 '거사'를 일으켰음에도 1명으로 축소 기록하고,

나아가 스스로 곡기를 끊어 굶어죽었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13년 20일만에 나카사키로 탈출 성공

 

이 거사로 인해 하멜 일행은 제주에서 서울로 압송됐을 때의 길을 거꾸로 거슬러 강진으로 유배됐다.

 

유배 7년째 되는 해, 큰 흉년이 들어 이들을 먹여 살릴 쌀이 부족해지자

이들은 다시 여수, 순천, 남원으로 분산 이송됐다.

여수로 이송됐던 하멜은 1666년 9월 동료 7명과 함께 일본 나카사키로 탈출하는 데 성공,

1668년 7월 네덜란드로 귀국했다.

 

제주에 난파 후 14년 가까이 조선에 억류되는 동안, 36명 가운데 16명만 살아 남았다.

이들 가운데 하멜을 포함한 8명이 탈출하고, 나머지 8명 가운데 1명을 제외한 7명은

하멜 일행이 탈출 한뒤 2년 뒤인 1668년 협상을 통해 석방돼 네달란드로 귀환됐다.

 

홀로 남은 1명은 가장 나이가 많았던 요리사 얀 클라슨으로,

그는 조선 여인과 결혼해 자신이 이제는 기독교도나 네덜란드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동인도회사 공식기록엔 '얀 클라슨은 하멜 일행이 탈출하기 2년전 죽었다'고 보고돼 있다.

 

다양한 종류의 '하멜표류기'--- 동방의 낯선 나라에 대한 서구 관심 고조

 

하멜 일행이 조선에서의 생활이 자세히 기록되어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배의 회계기록을 맡았던 하멜이 조선에 억류된 기간의 임금을 동인도회사에 청구하기 위해

'하멜일지'를 작성했기 때문이다.

 

하멜일지는 원래 '스페르베르 호의 생존선원들이 코레왕국(조선)의 지배하에 있던

켈파르트섬(제주도)에서 1653년 8월16일 난파당한 후 1666년 9월14일 그 중 8명이

일본의 나가사키로 탈출할 때까지 겪었던 일 및 조선 백성의 관습과 국토의 상황에 관해서

네덜란드령 인도총독 요한 마짜이케르 각하 및 형의원 제위 귀하'라는 긴 제목의 보고서였다.

 

임금 청구를 위한 이 기록에,

당시 동방의 낯선 나라에 대한 각종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섞어 씌여진 '하멜표류기'가

1668년 네덜란드에서 몇 종류 출판됐고,

이는 곧 불어 영어 독어로 번역되어 출판되면서 유럽 전역에 코레아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일행 36명 중 스코틀랜드인이 있었다는 '설'이

하멜일행이 조선에 첫 상륙한 영어 사용자라는 근거

 

국내에서 영어의 확산과정을 탐구한 거의 시초격 논문을 쓴 박부강(서울대 교육대학원,1974)에 따르면,

"은자의 나라 한국이 영어문화권과 접촉하게 되기는 홀란드 사람 하멜(Herdrick Hamel) 일행이

제주도에 표착했던 1653년(효종 4년)이다.

그 표류된 일행 36명 가운데는 스코틀란드 사람인 샌더 바스켓(Sander Basket)이 포함되어 있었는 바

그는 그배의 목공이었던 것이다."라고 했다.

 

조선에 처음으로 영어 사용자가 나타난 것은 하멜 일행의 표류와 함께 였다는 주장이다.

 

육당 최남선이 1943년 지은 한국사 개설서 '고사통(故事通)'에는

선조 15년(1582년)에 핑리이(憑里伊)라는 외국인이 표류하다가 제주도에 표착했다'고 기록하고,

임진왜란때 예수회 선교사 그레고리오 다 세스페데스가 왜군을 따라 한반도에 입국했다는 사실이 있지만,

이들이 영어문화권으로 온 사람들은 아니라며, '하멜 일행이 최초의 영어권 인물의 조선 상륙'이라고 주장한다.

(박부강, '한국의 영어교육사 연구(1883~1945)', p8)

 

샌더 바스켓이 스코틀랜드인이라면 하멜일행의 표류가 영어 사용자로선 처음으로

한반도에 상륙한 기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표류자 36명 가운데 스코틀랜드 사람이 포함돼 있다는 기록은 하멜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다.

 

하멜 일행 가운데 영어를 사용하는 스코틀랜드인이 포함됐다는 내용은

'왕립 아시학학회 한국지부'가 펴낸 회보에 근거한 것이다.

왕립 아시아학회 한국지부는,

1884년 조선 최초의 미국 선교사로 입국한 알렌 (H Newton Allen,1858~1932)이

1900년 결성한 모임으로, 주로 조선에 살고 있는 주한 외국인자들로 구성됐다.

 

이들이 1918년 발행한 회보 9호에, 당시 영국 국교회 한국 주교이며 왕립아시아학회 회장인

마크 나피에르 트롤로페가 기고한 하멜에 대한 연구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탈출에 성공하지 못한 불행한 선원 중에 알렉산더 부스켓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스코틀랜드 인이다.

그의 무덤이나 다른 동료들의 무덤이 언젠가 밝혀질지 어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나중의 조사에 의하면, 부스켓은 네덜란드 토박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15년 이상 하멜과 네덜란드 선원들의 17세기 조선에서의 생활 자료를 수집한 뒤

'낯선 조선 땅에서 보낸 13년20일의 기록, 하멜표류기'를 번역한

전 전남대 김태진교수는

"샌더 바스켓은 '(네덜란드의)오래된 고문서를 찾아 보면' 리스라는 작은 도시 출신의

네덜란드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80여년 전 하멜 연구보다 네덜란드 현지 조사를 통한 보다 최근의 연구가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하멜 일행 이후 한반도에 발을 디딘, 최초의 영어 사용자는 누구일까?

 

불발된 '한국 근대사의 최대 사건'

 

'논란'이 있는 최초의 영어 사용자 조선 상륙에 대해 장황하게 살펴본 것은 이유가 있다.

 

사실, 샌더 바스켓이 스코틀랜드인이라고 하더라도 단 1명에 불과한 영어 사용자의 상륙은

'영어의 전파와 확산'이란 측면에서 큰 의미를 두기 어렵다.

'최초'라는 수식어는 붙일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두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하멜 일행의 행적을 장황하게 살펴 본 것은 '아쉬움' 때문이다.

 

하멜 일행이 표류했던 17세기 후반은 서구 열강이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각축하던 때였다.

15세기 초부터 시작된 유럽 열강들의 유럽 밖으로의 대항해 시대의 패권이,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대패하면서 네덜란드와 영국으로 이동할 때였다.

 

새롭게 세계의 강국으로 떠오른 네덜란드인 36명의 불시착은,

조선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줄 수도 있는 대사건이었다.

 

그러나 이들 '불시착'한 선원들은 '은둔의 나라' 조선에 아무런 임팩트를 주지 못했다.

조선은

"이들의 외모와 관습 등에만 관심을 보였을 뿐 서양세계를 연구하고

그들의 앞선 문명을 받아들이기 위해 이들과의 접촉을 꾀한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예로 효종은 하멜일행을 어전에 불러, 그들의 노래와 춤, 높이뛰기 같은 것을 해보라고 분부함으로써

자기의 호기심을 만족시킬 수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박대헌, 서양인이 본 조선:조선관계 서양서지사, p57)

 

앞서 보았듯이 조선은 이들을 그냥 '구경거리'로 여겼다가, 지방으로 유배시켜 버렸다.

이는 새로운 근대문명에 대한 관심과 수요를 촉발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유배'시켜 버린 셈이다.

 

이미 일본은

하멜이 제주도에 표류하기 반 세기전(1603년 에도시대)부터 서양, 특히 네덜란드로부터 수입한

과학지식을 '난학(蘭學)'이라는 하나의 학문영역으로 정립하고, 

근대 국가 형성의 결정적 계기를 삼은 것과 비교할 때 큰 아쉬움이 남지 않을 수 없다.

 

하멜 일행의 조선 표류는 17세기 조선 사회는 물론,

이후 한국 근대사의 최대 사건으로 기록됐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 못했던 것은, 일제 식민지 시대를 산 조선인들에겐 큰 불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