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관

DMZ 대성동초등학교 원어민 영어교사 니콜이 본 ‘남과 북’

기산(箕山) 2010. 6. 4. 04:39

DMZ 대성동초등학교 원어민 영어교사 니콜이 본 ‘남과 북’

                                                                                               국민일보 | 입력 2010.06.03 18:08

 

"백수 면하러 왔더니… 이런, 북한이 코앞이네"

"티처(teacher), 패스(pass)." "미(me), 미(me)." "히어(here)!"

공중에서 영어 단어들이 아이들 웃음소리와 부딪쳤다.

지난달 27일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대성동초등학교 운동장.

영어로 공놀이 수업을 하던 원어민 영어교사 니콜 버트란드(24·여)가

오랜만에 말갛게 갠 북쪽 하늘을 바라봤다.

멀리 깃발 하나가 오후 햇살 아래 펄럭였다.

위아래 파란 줄과 빨간 사각형, 그 속에 선명한 붉은 별. 북한 인공기다.

 

 

대성동초등학교는 비무장지대(DMZ)에 있는 유일한 학교다.

북쪽으로 400m쯤 걸으면 군사분계선.

그곳에서 다시 400m 더 가면 북한의 최남단 민간인 거주지 기정동이 나온다.

개성까지 11.5㎞. 뉴스로만 듣던 북한, 지구상 가장 고립된 나라가 정말 코앞이다.

니콜은

"학교 운동장에선 북한 깃발과 아파트도 볼 수 있다.

지금 여기 있다는 것, 이렇게 북한 가까이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

이 모든 게 초현실적(surreal)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며 웃었다.

해군 천안함 침몰(3월 26일), 정부 조사결과 발표(5월 20일), 대북제재 선언(5월 24일),

북한 반박(5월 28일), 국방부의 재반박(5월 30일). 두 달여간 한반도 정세는 요동쳤다.

버락 오바마, 후진타오 같은 각국 지도자 이름이 보복폭격, 조준사격 같은 전쟁용어와 뒤섞여

수상하게 떠돌았다.

지난 4월 초 그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천진하게 걸어 들어온 아가씨가 있다.

대성동 마을 미국인 영어교사 니콜이다.

그는 북한도, 남한도 잘 알지 못한다고 했다.

중학교 때 한국계 친구 집에서 먹었던 김치의 맛,

의정부에서 영어교사로 일하는 고향 친구,

대학 때 북한 관련 다큐멘터리 몇 편을 본 희미한 기억.

남·북한과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다.

니콜은 파주시 문산읍 아파트에 살며 스쿨버스를 타고 DMZ로 출퇴근한다.

태평양을 건널 때 꽤 고민했다.

DMZ에 가는 건 그보다 큰 결단이 필요했다.

그건 하나의 세계를 건너가는 일이었다. 그를 지난달 28일 문산에서 만났다.

DMZ로 가는 길

5월 24일 니콜의 출근길.

통일대교 앞 '통일의 관문'을 통과한 스쿨버스는 DMZ 검문소에서 멈춰 섰다.

무장군인이 올라탔다. 표정이 삼엄했다. 탐지기로 버스 바닥을 훑었다.

폭탄을 찾는다고 했다.

 

천안함 침몰 사건 배후로 북한이 공식 지목된 지 나흘째.

검문소에는 군인이 눈에 띄게 늘었다.

교무실에서 교사들은 삼삼오오 수근댔다.

'무슨 얘길 하는 걸까. 수업 준비? 날씨 얘기?'

한국어를 모르는 니콜은 알 길이 없었다.

알 수 없다는 느낌.

그게 공포와 비슷하다는 걸 DMZ에 와서 깨달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도통 모르겠어요. 영어로 말이 통하는 사람이 한둘,

그것도 어려운 얘기는 잘 안되니까.

통역해주는 교사가 '군인도 많고 여긴 안전하다'고 걱정 말래요.

괜찮다고는 하는데…. 한국 사람도 긴장한 거 같아요.

움츠러든 기색이 역력해요. 침착하려 애쓰는 거 같기도 하고."

니콜의 첫 DMZ 출근일은 천안함 사건 와중인 4월 7일이었다.

첫날 출입증이 없던 니콜은 검문소마다 차에서 내려 무장병사 호위를 받았다.

3일 만에 출입증 두 장을 받았다.

노란색과 초록색. 들고날 때 필요한 출입증 색이 달랐다.

대성동에서 학교 밖 나들이는 허락되지 않았다.

거주민은 52가구 200여명.

이들을 빼면 한국인 교사도 학교 담을 넘을 수 없다고 했다.

한번은 아이들이 던진 공이 학교 밖으로 '이탈'했다.

'또르르' 3∼4m 굴러간 공은 정문 밖 도로 위에 멈춰 섰다.

고작 몇 발짝이었지만 학교 밖에 나간 건 그게 처음이었다.

좌우를 살피고 공을 집었다. 가슴이 콩닥댔다.

운동장에는 가끔 트랙터와 군용트럭도 보였다.

들에 일 나가는 농부의 트랙터 뒤에 자동소총을 멘 군인들이 트럭에 실려 따라갔다.

소설 제목 '전쟁과 평화' 마냥 농부는 무장군인과 짝지어 다녔다.

그게 대성동이다.

군인은 농부의 작업을 엄호했다.

북한은 생각보다 가까웠다.

"DMZ에 오기 전에는 남과 북 사이에 물리적 경계 같은 게 있을 거라고 예상했어요.

직접 보니 벽은 없더군요.

강, 들, 나무 이런 것 너머 북한 땅을 보면서 생각했죠.

'와우, 저기가 바로 북한이야.' 그건 흥분되면서도 동시에 으스스한 경험이었어요."

며칠 전에는 미국에 있는 친구와 국제전화로 농담을 주고받았다.

"친구한테 '망원경으로 (북한 사람들이) 나를 지켜보는 거 아닐까?

납치되면 어떻게 하지?' 그랬어요.

생각해봤는데 나는 유나 리, 로라 링(미국 커런트TV 소속 여기자들로

지난해 중국과 북한 접경지역에서 취재 도중 북한에 체포됐다가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방북 후 풀려났다) 같은 유명 기자도 아니잖아요.

북에 납치되면 미스터 클린턴이 구하러 와줄지 모르겠네요."(웃음)

세계가 평평한 이유

한국에 오기 전 니콜은 내내 실업자였다.

2008년 5월 위스콘신대학 졸업 후 4개월간 보험회사에서 일했다.

주(州) 경계를 넘어 이사하느라 사표를 냈다.

그해 가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다.

미국 경기는 곤두박질쳤다. 실직 기간은 길어졌다.

경기도 원어민 영어교사 초청프로그램(게픽·GEPIK)을 알게 된 건 그 무렵이다.

처음에는 파주 시내 학교라고 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원어민 교사 브론윈과 통화한 뒤 근무지가 DMZ라는 걸 알게 됐다.

니콜은 브론윈 후임이다.

덜컥 겁이 났다.

"인터넷에서 대성동 위치를 찾아보고 '이런, (북한에서) 너무 가깝잖아' 그랬어요.

그래서 다른 지역을 찾아봤죠. DMZ에는 진짜 가고 싶지 않았거든요.

근데 자리가 없더군요. 오래 일이 없었거든요. 그때는 직장이 정말 절박했어요."(웃음)

어렵게 맘을 먹었는데 이번엔 천안함 사건이 발생했다.

다시 초조해졌다. 자료를 뒤적였다.

항공기 납치, 민간인 유괴, 판문점 도끼살해사건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위험은 실재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북한보다 더 겁나는 게 있었다.

백수 생활이다.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어쨌든 1953년 종전 후 큰일이 벌어진 적은 없었잖아요.

아∼ 판문점 도끼살해사건요? 그건 민간인을 타깃으로 한 게 아니잖아요(웃음).

그래서 가자, 이렇게 된 거죠. 결국 비행기를 탔어요."

한국에 와선 조사결과를 기다렸다.

내심 북한이 범인으로 지목되지 않길 바랐다.

남북대치로 DMZ 근무가 더 살벌해질 것 같았다.

상황은 희망과 반대로 갔다.

그래도 DMZ에서 시간이 헛되이 간 건 아니다. 체류기간만큼 마음은 편안해졌다.

조만간 대성동초등학교 전교생 30명은 판문점으로 현장학습을 떠난다.

'이런 위험한 때에 어린 애들을 판문점에 데려간다고?'

처음엔 납득이 되지 않던 일이 곧 이해가 됐다.

생각보다 한국인은 느긋했다.

60년 세월이 남북대치에도 룰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대성동초등학교가 얼마나 특별한 곳인지도 알게 됐다.

DMZ의 유일한 학교, 그곳의 유일한 외국인 교사, 그게 니콜 자신이었다.

"그제야 알겠더군요. 이게 얼마나 대단한 경험인지.

제 고향인 위스콘신주 치페와폴스가 인구 1만3000명 정도의 소도시거든요.

거기서 태어나고 자란 내가 이렇게 멀리 와서 아이들을 가르치다니요.

대단한 특권이잖아요.

'야, 이건 진짜 일생일대의 기회구나' 생각하게 됐어요.

이 기회를 잡은 게 너무 기뻐요, 포기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파주=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

 

'인생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수천안 무용  (0) 2010.07.26
유약겸하(柔弱謙下)  (0) 2010.07.16
남자는 정력 여자는...  (0) 2010.05.07
명심보감  (0) 2010.04.13
나이가 들면...  (0) 2010.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