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관

한 맺힌 덕수궁

기산(箕山) 2009. 6. 24.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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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은 조선왕조의 역사 속에서 제왕들의 거친 숨결이 머물렀던 곳이다.
궁궐 안 곳곳에는 선조와 광해군, 고종과 순종 등 온몸으로 국난을 겪었던,
주로 실패한 임금들의 원(怨)과 한(恨)이 서려 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선조가 의주까지 피란갔다가
서울로 돌아와 머물게 된 곳이 덕수궁이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타버려서 거처할 왕궁이 없자
왕족인 월산대군 집을 행궁으로 삼아 살게 됐다.
선조는 1608년 행궁의 침전에서 승하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궁의 이름은 없었다.
이후 영조는 임금의 몸으로 황망하게 피란갔다 돌아온 선조를 회상하면서
행궁에서 사배례(四拜禮)를 행하며 한을 달랬다.

그곳에 정식으로 왕궁의 이름이 붙여진 건 광해군 때였다.
선조의 뒤를 이어 행궁에서 즉위한 광해군은 1611년 그곳을 경운궁이라 이름 붙였다.
병조판서 이항복을 시켜 궁의 담장을 두르고 궁궐로서의 면모를 가다듬은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광해군이 계모 인목대비를 유폐한 곳도, 이후 능양군(인조)을 받드는 서인의 반정군에 쫓겨난
광해군이 인목대비에 의해 문책을 당했던 치욕의 현장도 덕수궁이었다.

실록에 보면 인조는 선조가 머물던 즉조당과 석어당 두 곳만 남기고
나머지 경운궁의 가옥과 대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경운궁을 아주 떠난다.
이로써 경운궁은 조선왕조의 임금들이 공식적으로 머물며
국정업무를 보던 궁궐로서의 기능을 300년 가까이 마감했다.

그런 경운궁이 다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은
일제의 한반도 침략이 극을 달하던 1895년의 일이었다.
그해 가을 경복궁에서 명성황후가 일제의 자객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세자(순종)와 함께 러시아공사관으로 급히 피신했다.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1년이 넘게 아관에서 머물던 고종은 1897년 경운궁으로 돌아왔고
그해 가을 국호를 ‘대한’으로 정한 뒤 황제 즉위식을 치렀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한 태황제 고종에게 아들 순종은 덕수(德壽)라는 궁호를 올린다.
덕수는 왕위를 물려준 ‘선왕의 덕과 장수를 기린다’는 뜻이다.
앞선 시대 정종에게 양위하고 물러났던 태조가 받은 명칭이기도 하다.
덕수궁이란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된 건 이때부터였다.
고종은 1904년 화재 이후 1906년 중화전을 재건하면서
동쪽의 대안문을 대한문으로 이름을 고치고 궁의 정문으로 삼게 했다.
나라를 빼앗긴 고종 임금은 1919년 경운궁 함녕전에서 눈을 감았다.

선조가 승하한 지 400년, 고종이 눈을 감은 지 9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