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탐방

한국 사교춤의 역사 / 단석산

기산(箕山) 2008. 5. 25. 21:17

한국의 사교춤은 ?

 

사교춤은 불륜과 퇴폐주부의 탈선의 장이 된다하여 성문법도없다.


성문법[成文法]이란?  문자로 표현되고 문서의 형식을 갖춘 법을 말하며,
제도상 입법권을 가진 자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그 내용이 문서로 작성되어 일정한 형식과 절차를 거쳐서 공포된 법을 말한다.

 

800여만 명이 즐기는 한국의 사교춤에 법조문 조차 없으니 실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러다보니 사교춤에 대한 법적인 문제가 생기면 구 시대적인 판례법에 준하고
있는실정이면서도 사교춤의 규제는 무리할 정도로 엄격하게 다루고있다.
하지만 엄격한 규제와 핍박 속에서도 사교춤인구는 계속늘어만 가고 있으니
정부의 하루빨리 건전한 국민댄스로 양성화 시키는 대책이 시급하다. 

 

한국 사교춤의 역사

 

우리나라의 댄스도입은 구한말 고종때 러시아공사 부인으로 부터 왈츠를 배우게 된것이

최초며 이 시기 명성황후는 외국문화를 받아드리면서 사대부가들과 잦은 댄스파티를 열며

정치적인 입지를 �혀나가는 게기가 되기도 했다

 

조선총독부 시절 상류층과 젊은 유학생들이 외국에서 배운 댄스를 즐기기 시작했는데

멋진 신사양복을 입고 카페에서 춤을 추는것을 제일로여겼다
하지만 일제 식민지 통치하에 사교춤은 정치적,집단적 결속력을 다진다는 우려 때문에

일본인들이 아니고서는 무조건 탄압을 하게되었는데,

우리나라의 역대정권(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권까지

사교춤에 대한 성문법 조차 만들지 못하고 이제까지 내려져 오고 있는것이다

 

1860년 한국,중국,일본의 국가에서는 사교춤을 귀족,상류층 사람들의 개인및 사교와
정치적으로 이용되기 시작했던게 사교춤의 근본이며 본격적인 사교장으로 음주가무를
겸한

캬바레가 생겨난 것은 1880년 프랑스에서 였고 1900 년대에는독일에서도 문을 열었다

 

1945년까지는 상류층과 유학생들만 의 전유물이었고 일반인들의 사교댄스는 탄압을
받으면서도 이어져오며 8,15 광복을 맞게되며 미군들에 의한 서방의 댄스문화가
일반인들 에게까지 도 불어 닥친다

 

6.25 전쟁중,후 에도 사교춤은 계속되었지만 미국정부와 우리정부는 사교춤을( 정치적,

집단적 결속력을 다진다는 우려 때문에) 금지시켜 놓고 상류층, 고위층, 군장성들은 특권마냥

댄스를 즐겼다
즉, 특권층은 즐기면서도 일반서민들은 사교춤을 즐길수 없게 인,허가를 내주지 않는 잘못된

댄스제도였던 것이다

 

1950년 상류와 특권층들만의 사교춤을 서민들도 좁은공간에서 숨어서도 출수 있게

스텝을 좁은 삼각스텝으로 바꿔 몇가지의 단조로운 방식으로 출수 있는 우리들만의

한국사교춤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삼각춤은 70년대까지 이어지며 반복동작으로 노련하다 보니 작은보폭의

쿵난,짝난,짤짤이(짤짤이란? 제자리서서 몸을떠는 난춤)가 생겨나기시작한다 

 

1954년 정비석(작가)의 소설 자유부인이 신문에 연재되면서 사교춤에 대한 찬반 양론과 

작품성 보다는 불륜의 온상 퇴페의시초 라는 인상을 주며 말로만 듣던 특권층의 사교춤이

뭣인가를? 전국민이 알게되는 계기가 되었다

 

1955년 70여명의 상류층, 장성부인들과 댄스를 즐긴 일명 제비족 사건이라는

(해병대대위)박인수 사건이 터지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춤에 대한 카바레 제비족이란 단어로

재판을받은 박인수 사건은 "법은순결한 정조만을 보호한다" 라는점으로 무죄가 선고된

유명한 사건으로 뜻이있는곳에 길이있고 손벽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진리를 깨우쳐준

사건이기도 했다

 

1956년 정비석의 자유부인 소설이 영화(교수부인과 제자간의 춤바람) 로 제작되어 방영되면서

전국민이 댄스문화의 충격속으로 빠져들게되며

 

1957년  최초로 장충체육관 에서 제 1회  댄스 스포츠 경기대회를 열었지만 국민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말았다

 

1959년 박인수 사건과 고위층 차관부인 안순애 제비족 간통사건이 노출되며 사교춤은

사회여론에 몰리기 시작하며 유교적사상과 불륜이라는 이름아래 국민적 탄압을 받게 되면서

서민들의 건전댄스인 차차차와 우리가 너무나도 잘아는 헤~이맘보 라는 춤과 트위스트 춤이

온나라를 휩쓸게 된다 
 

1960년대 까지는 사교춤을 밝은곳과 환한 조명아래서 추었으며 주로 상류층 사람들만의

전유물인냥 서민들의 허름한 복장은 사교장 입구에서 부터 출입조차 불허되던 때 였다

 

1961년 박정희 군사정권은 사교춤을 새마을 정신과 혁명정신에 위배되며 분륜과 퇴페,

가정주부의 탈선과 가정파괴의 원인을 유발하는 범죄행위로 간주하며 사교춤을 대한뉴스에

연일보도하며 무자비할 정도로 처벌하면서도 여전히 상류층과 고위층들은 댄스파티를 즐기는

양면성을 보여 주면서도 사교춤의 법은 만들지 않았다

 

이때부터 우리나라의 사교춤은 본격적으로 변질되기 시작한다
원래 사교춤은 4/4박자,4박스텝으로서 2박자가 추가된 6박자는 필요한 부분에서만 6박자를

잠시 사용하게 되어있는데 변질된 우리나라 사교춤만이 6박자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넓고 밝은 곳에서 격렬하게,4/4박자의 음악에맞춰 4박자 스텝으로 빠른 율동을 가미하여 

추어야 할 사교춤을 범죄인처럼 숨어서 작은 골방 같은곳에서 추어야하니 정식 4박자의 

빠른춤이 2박이 추가되어 조용하고 느린 6박자가 되어버린 것인데 이렇게 기형적으로 변해버린

한국의 사교춤은 우리만의 한국사교춤이 되어버렸으므로 우리나라 춤만이 국제댄스에 나갈

수가 없으며 또한 외국에 나가서는 출 수가 없는 것이다.

 

자연히 스텝의보폭이 작게변해가며 몸의 율동또한 제대로 나올수가없고,

불안한 마음으로 짧은 시간에 간단히 빨리빨리 배울려고 모든춤의 스텝과 동작을 축소시키다

보니  4박의 지터벅(일본식발음인 지루박)이 2박이 추가되어 느린 6박으로 변하고

트로트도 지터벅으로, 부르스도 느린 지터벅으로 탱고 음악에도 지터벅으로 추는 국적불명의

우리만의 춤이 만들어지게 된것이다

 

1969년 5개년 경제개발이 성공하면서 여유가생긴 사람들이 그동안 안방에서만 숨어서 배우고

추던 사람들이 카바레로 모여들기 시작하자  이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정부는 전국의

제비족들에게 경종을 울려주기위해 소위 7공자 사건을 만들어내는데,

정보기관의 고위공직자 차관부인과 춤을 췄다는 이유로 경찰은 불법 댄스교습소를 급습

국민들에게 겁을주기위해 춤을추던 남자 7 명을 무작위로 골라 제비족이라 칭하여 구류를 살게한

참말로 웃지못할 일어나며 이 사건으로 인하여 카바레+춤바람+제비족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기에

급급했다

 

1970년대 해외 취업붐이 일었을때 취업근로자 부인들의 탈선장소가 카바레 라는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며 84년도 경기도 성남시에서는 해외취업 부인들의
정절교육을 시키는 마루밑에서 낮잠자던 개도 웃을 짖을 시키는 시절을 뒤로하며

 

1972년 일자지루박 스텝이 개발되면서 삼각 지루박스텝이 자취를 감추게된다
20여년 추어온 삼각스텝이 일자 지루박스텝으로 바뀌는건 불과 3년뿐이 안걸렸으며
혼란과 국민들의 어려운 경제사정에 사교춤은 더욱탄압을 받고 지하로 뭍혀 들어가게된다

 

1980년 대부터 동네주민들의 건강운동을 위해 노인정 이라는 이름이 생기면서 사교춤을 

출수있는곳이 생겨나는데 역시 퇴페풍조,불륜,불법이라하여 춤추는 사람들을 모조리 연행,

전경버스에 실려 경찰서에서 조서를 받는 수모를 겪었다

 

1985년 일자지루박이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하며 결혼을 앞둔 처녀들도 시집가기 전에
배워놓아야 한다는 유행이 있었으며 군에서도 동료들 끼리 많이 배우던 시절이었다

 

1991년 6월 국제표준무도의 댄스스포츠가 합법적으로 인정되었지만 정부와 문화센터나

지방자치단체의 홍보에 비해 인기가 없는것은 사교춤처럼 대중적이지를 못하고

오랜 연습시간이 필요함과 파트너없이는 출수없고 아무곳에서나 출수가 없다는것 때문에

외면을 당하는 것인데, 많은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은것은 가정이 있는사람들끼리

파트너를 해야 하는일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1990년대 부터 소규모 무도장 이라는 간판이 속속 걸리면서 영업을 하기 시작했지만
역시 정부의 탄압은 여전했으므로 춤추는 사람들은 항상 불안한 마음으로 춤을 춰야했다.

즐거운 마음으로 즐겨야할 춤을 춤을추는 도중에도 음악이 끊기거나 사람이 뛰어만가도

깜짝 놀라며 도망부터 갈려는 생각을 하게된 실로 어처구니 없는 시절이었다

 

1990년 중반부터 동네마다 체육교실 이라는게 생기면서 노소가 사교춤을 추게 되었는데 

역시 탄압의 고리는 늦춰지지를 않고 단속은 여전했으므로 댄스인들의 불만이 서서히 고조되기

시작하며 대망의 서기 2000년을 맞이하게 된다 

 

2000년으로 접어들면서 밤의카바레 춤문화가 낮의 콜라텍 문화로 바뀌어 간다
어둡고 은밀한 밤의 카바레 손님들이 밝은 대낮의 콜라텍으로 이동하기 시작하는것은

사교춤을 공개적이면서 대중적인 춤으로 변해가는 싯점이기도 했다.

 
콜라텍은 카바레+무도장+노인정+체육시설에서 추고있는 한국의 사교춤을 한곳으로
집중시키는 역할을 하게됨과 동시에 전국 수백만의 댄스인들이 콜라텍으로 몰려들게 되는데

그 원인은  저렴한 비용과 교통이 편한 위치에 생겨나고 있기때문인데,

역시정부는 불법, 타락이라는 명칭아래 법이라는 잦대를 들이대며 규제와 탄압을 하자
댄스인들은 성문법도 없는 한국사교춤에 정식 법원에 도전장을 내게된다

 

2001년 11월 9일 (콜라텍에서 사교춤 출수있다고 판결)
콜라텍을 무허가,(무신고) 무도장 영업에 해당한다는 검사의 공소제기는 무죄로 판결났다.


콜라텍에서 추는 사교춤은 체육법상 국제표준무도(볼륨댄스,스포츠댄스)라 볼수 없기 때문에

무허가 무도장 영업 행위로 볼수없다고 판결한것은 콜라텍이 주간에 국민생활 체육장소로

인정 사교춤을 출수있게 법적 규제는 풀어놓고도, 구시대적인 옹색한 발상으로 여성들의 탈선을

막기위함이라며 콜라텍시설의 건축법상을 들먹이며 규제의 뿌리는 늦추지 않고있는데

그와 같은 생각으로 800만 댄스인들의 취미와 오락 운동을 규제하기에는 우리 한국사교춤이

너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다.

 

남녀가 같이 모여하는 운동과 오락이 불륜과 탈선의 장이 된다면 정부는 골프, 수영, 등산, 헬스,

관광, 동창회, 카페모임 모두가 남녀가 모이게 되므로 모두 규제해야 할 것이다.

 

또한 사교춤의 교습은 법적요건이 갖추어진 학원에서 해야한다고 정해놓고
학원에서 사교춤을 배운사람들을 탄압, 멸시하며 추어야 할 장소를 규제하는
원칙자체가 무시되고 있는 한국사교춤의 실태이므로 한국사교춤이 양성화 될려면

더이상 이 문제를 구시대적인정부와 일개 업주들에게 맡길게 아니라 우리 국민모두가 앞장서

권리찾기에 나서며 분명히 풀어야 할 큰 과제가 아니라 할수 없다... 

 

 단석산 08.05.24 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