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관

신사임당...

기산(箕山) 2007. 11. 21. 16:15

                                                                                 2007년 11월 20일 (화) 10:24   위클리조선

                          신사임당을 둘러싼 오해와 진실




신사임당의 ‘초충도(草蟲圖)’ (photo 조선일보 DB)

2009년 상반기에 새로 나올 5만원권 화폐의 도안 인물에 신사임당이 선정됐다. 신사임당은 사실 남성이 원하는 여성상이다. 우리에게 각인된 그녀의 아이콘은 ‘현모양처’이기 때문이다. 이에 여성의 미래를 재의미화하려는 여성계의 반대와 다양한 이해(利害)에 기초한 지지의 목소리가 서로 충돌해왔다. 반대와 지지의 주장들은 기본적으로 ‘현모양처’로서의 신사임당이라는 이미지에 충실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반납하고 남편과 자식에게 온 인생을 거는 모델을 현모양처라고 한다면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신사임당은 없었다. ‘된다’ ‘안 된다’의 주장이 생산적으로 전개되기 위해서는 실재한 신사임당의 ‘진실’에 주목하고 그 삶의 의미들을 새롭게 읽어내는 일이 먼저 필요하다.

 

결혼 후 20년간 친정에서 살아

역사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간 전통시대 대부분의 여성과는 달리 신사임당은 생몰연대가 확실하다는 점에서 일단 고무적이다. 그녀는 1504년 10월 29일(연산군10년)에 강릉에서 태어나 1551년(명종 6년) 서울에서 4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서울 사람인 아버지 신명화(申命和)와 강릉 사람인 어머니 용인 이씨의 둘째 딸로 태어난 그녀는 1522년 서울 사람 이원수와 결혼하여 4남3녀를 낳았다. 결혼 후 주로 친정 강릉에서 살았던 그녀는 1541년 38세가 되던 해에 서울 시집으로 거처를 옮겨왔다. 본격적인 시집 생활은 생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10년 남짓한 셈이다. 조선의 대학자이자 정치가인 율곡이 그녀의 셋째 아들이고, 16세기 또 하나의 여성 예술가 매창(梅窓)은 그녀의 맏딸이다. 그리고 막내 아들 우(瑀)가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 그림과 글씨, 거문고에 능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 외의 자녀들은 평범한 자질을 갖추었고 평범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임당이 태어나고 율곡이 태어난 강릉은 사임당 어머니인 용인 이씨의 외가가 터잡은 곳이었다. 즉 어머니 용인 이씨는 외가인 최씨 집안에서 외조부모의 양육을 받으며 자랐고, 신명화와 결혼한 후에도 그곳에서 계속 살았다. 집안에 중요한 일이 생길 때마다 신명화가 강릉으로 내려오는 방식이었다. 율곡이 쓴 ‘이씨감천기’에는 장모의 상을 보러 강릉으로 온 신명화가 병을 얻자 그의 부인 이씨가 정성을 다해 간병해 하늘을 감동시킨 이야기가 실려 있다. 여기서 남편의 쾌유를 비는 기도를 드리기 위해 이씨가 달려간 곳은 그녀의 외증조부 무덤이었다. 친정이나 처가의 출입을 제한했던 ‘출가외인’의 담론으로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최씨의 딸인 용인 이씨, 용인 이씨의 딸인 사임당 신씨, 신씨의 아들 이이로 이어지면서 양육과 부양을 주고받던 이들의 관계는 조선의 건국과 함께 국가 이데올로기로 채택된 신(新)유학의 이념과는 거리가 있다.

신유학에 의하면 혼인한 부부의 거처는 남편 쪽이어야 하고, 한번 시집간 딸의 친정 출입은 예의 엄격한 통제를 받아야 했다. 자녀는 공간을 함께 하는 부친 쪽의 친족으로만 혈연적 유대감과 친밀감을 나누었다. 처족이나 외족과는 자연스럽게 멀어지는데, 이러한 친밀성의 구조는 복상(服喪)제도나 상피(相避)제도 같은 데 그대로 반영되었다. 즉 처족이나 외족은 엄밀한 의미에서 가족의 범주에 들지 않았다. 물론 신사임당이 살던 16세기는 신유학의 이념이 아직 대중화되지 않은 시기이다. 그럼에도 혼인한 딸이 친정에 머무는 것은 특별한 경우에 한해서였던 것 같다. 율곡이 쓴 ‘선비행장’에 의하면 사임당의 친정 어머니는 사위 이원수에게 “내가 딸이 많은데 다른 딸은 시집을 가도 서운하질 않으나 자네 처만은 내 곁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네”라고 하였다. 사임당은 길지 않았던 시집 생활 동안에도 늘 강릉에 홀로 남은 어머니를 그리워하였다. “밤마다 달을 보며 비나니, 생전에 다시 뵙게 해주소서”라는 시가 전한다.

 

자의식 강하고 자기관리 철저

중요한 사실은 사임당 신씨에 관해 율곡 당시에는 별로 이야기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소개된 율곡의 가족사는 그가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었고, 아버지의 첩으로부터 시달림을 당해 집을 나가 산사(山寺)를 전전하다가 오랜 기간이 지나서야 돌아왔다는 내용이다. 이런 사실로 인해 율곡은 유학자로서의 정체성을 문제 삼는 정쟁에 휘말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부친에게 변함없는 존경을 보냈고, 부친 사후에는 ‘나쁜’ 서모를 극진히 예우함으로써 서모를 교화시키기도 했다. 사임당에 관한 이야기는 율곡이 세상을 떠난 지 100년 남짓한 세월이 흐른 후 노론이 집권하면서 서서히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노론의 영수 송시열은 학문 일체를 주자(朱子)를 근간으로 하면서, 동유(東儒)로는 이이를 제일로 삼았다. 사임당의 난초 그림에 송시열이 발문을 썼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듯한데, 글의 취지는 자연과 혼연일체가 된 그림에서 “부인의 어머니됨과 선생의 아들됨이 실로 근원과 줄기로 서로 이어져 있음”을 확인하고자 했다.

그로부터 또 100여년 후에 나온 ‘연려실기술’에서는 “부인은 성품이 곧고 조용하며 강직하고 방정하며 문장에 능했고, 또 그림에도 해박했다. 규문법도가 심히 엄하였고, 움직일 때에는 여칙(女則)에 맞게 했으니 공(율곡)의 학문은 태교에서 얻은 것이 많았다”고 하여 사임당을 아들 율곡과 본격적으로 연관시키고 있다.

이이의 인물됨과 나라에 바친 공로는 재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1584년(선조 17년) 이이의 죽음은 온 나라를 슬픔에 빠뜨렸다. 이때 작성된 ‘이이졸기’에 의하면 “타고난 기품이 매우 고상한 데다가 수양을 잘하여 더욱 높은 경지에 나아갔다. 어떤 사람이든 어떤 상황이든 한결같이 정성되고 신실하게 대하였으며, 은총과 사랑을 받거나 오해나 미움을 받거나 털끝만큼도 개의치 않았으므로 어리석거나 지혜있는 자를 막론하고 마음으로 그에게 귀의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하였다. 이런 아들의 어머니가 바로 신사임당이다. 그러나 율곡이 쓴 ‘선비행장’이나 다른 자료들에 의하면 그녀가 자녀교육에 유난히 특별했다는 인상을 받을 수 없다. 다만 자기 세계에 충실했고 자기 관리에 철저했으며 강한 자의식을 가진, 남달리 성숙한 인품의 여성임을 짐작할 수 있다. 어머니의 이런 태도가 자식에게 본보기가 되었을 수는 있지만 자기를 포기하면서 자식에 몰두했다고 볼 수 없다. 율곡이라는 ‘결과물’을 통해 볼 때, 사임당의 어머니 역할은 훌륭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그녀가 양처였던가에 대해서는 쉽게 수긍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사임당이 남편에게 “내가 죽은 후에도 다시 장가들지 마세요”라고 했다든가, 첩을 들이려는 남편을 자신의 해박한 지식과 논리로 완패시킨 사례가 기록으로 전해온다. 또한 그녀는 남편과의 갈등으로 가정에 불화가 생기자 마음의 평정을 찾기 위해 금강산으로 들어가 불법을 닦으며 수행했다고 한다. 이러한 예를 볼 때 사임당은 여필종부(女必從夫)라는 규범적 전통 여성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여성활동 어렵던 시대에 자기영역 만들어

사임당이 현모양처로서 ‘확고’한 자리를 굳힌 것은 1960년대 국가가 주도하고 이은상에 의해 재구성된 민족문화 창달 프로젝트와 맞물리는 지점에서이다. 전통은 현실을 정당화하기 위한 일종의 방편으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다. 즉 ‘의도된 전제’ 또는 ‘합의된 지식’이 무엇인가에 따라 전통시대의 인물은 얼마든지 각색되고 왜곡될 수 있다.

조선시대에 신사임당이 ‘공식적’으로 평가된 것은 예술가로서이다. 사임당이 남긴 그림은 초충도(草蟲圖) 22점, 포도 3점, 화조(花鳥) 2점, 화조어죽(花鳥魚竹) 4점, 매화 14점, 자수초충도 8점 등이다. 그리고 그녀의 풍부한 감수성을 담은 몇 편의 시조가 전한다. 당시의 기준에서 볼 때 그녀는 뛰어난 작품을 남긴 작가였고, 게다가 율곡의 어머니라는 사실은 그녀의 예술정신을 더욱 값지게 한 것이다. 어머니와 아내의 자격만으로는 그녀의 존재가 드러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가족생활 외의 활동이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던 중세기의 한국에서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노력으로 자기표현의 영역을 만들어간 여성이었다.


/ 이숙인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교수·동양철학

[ 기사제공 ]  위클리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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