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천한 궁녀의 신분이라도 온 백성의 주인,
궁궐의 절대자인 임금과 하룻밤이라도 같이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곧 큰 은혜(承恩)를 입는 것이었다.
특히 승은을 입은 후궁들은 정식으로 맞아들인 훌륭한 가문출신의 후궁들과 달리
일개 궁녀 신분에서 하룻밤만에 왕의 후궁으로 벼락 출세를 했다.
그러다 왕자나 공주를 낳는 날에는 일약 내명부의 직첩을 받아 종 4품 숙원(淑媛)이상의
그러다 왕자나 공주를 낳는 날에는 일약 내명부의 직첩을 받아 종 4품 숙원(淑媛)이상의
관직도 얻을 수 있었다.
더욱이 숙종대의 장희빈처럼 왕자가 후일 왕(경종)이 됨으로써 왕비의 지위를
누리기도 한 후궁도 있었다.
한때나마 승은을 입었더라도 10여명에 이르는 수 많은 후궁들 사이에서
왕의 총애를 받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한때나마 승은을 입었더라도 10여명에 이르는 수 많은 후궁들 사이에서
왕의 총애를 받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러다보니 왕의 침전을 바라보며 이제나 저제나 찾아주실까
촉각을 곤두세우며 눈물의 밤을 보내기 일쑤였다.
다행히 자녀라도 낳았으면 외로움은 덜어낼 수 있었지만 자녀마저 없으면
다행히 자녀라도 낳았으면 외로움은 덜어낼 수 있었지만 자녀마저 없으면
그 쓸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5∼600명에 이르는 궁녀들 중에서 선택된 것만을 위안삼을 수밖에 없는 게
이들의 슬픈 인생이었다.
왕이 살아있는 동안은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이 있었다.
왕이 살아있는 동안은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왕이 승하하고 나면 모든 것은 그저 한여름 밤의 꿈이었다.
이들이 시름을 잊고자 불교에 귀의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들이 시름을 잊고자 불교에 귀의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조선시대에는 도성내에 정업원이라는 여승방이 있었는데,
주로 양반가문의 과부들이 주로 기거했고 왕족이나 후궁들도 이곳을 찾아 스님이 되었다.
정업원은 원래 고려후기 개경에 창건된 절로 조선의 개국과 함께 한양으로 옮겨졌다.
조선 초기 정업원의 주지는 고려 공민왕의 후비 안씨였다.
정업원은 원래 고려후기 개경에 창건된 절로 조선의 개국과 함께 한양으로 옮겨졌다.
조선 초기 정업원의 주지는 고려 공민왕의 후비 안씨였다.
고려말의 대비였던 안씨는 이성계의 힘에 밀려 어쩔수 없이 공양왕이 물러나는데 협조한 뒤
머리를 깎고 정업원의 스님이 된 비극의 주인공이다.
안씨의 뒤를 이어서는 17살에 이복형인 이방원에게 살해된 의안대군 방석의 부인인
심씨가 주지를 맡았다.
이렇듯 정업원은 죽은 남편의 명복을 빌고 자신의 업을 닦고자 하는 과부들의 도량처였다.
이렇듯 정업원은 죽은 남편의 명복을 빌고 자신의 업을 닦고자 하는 과부들의 도량처였다.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는 물론 성종과 연산군의 후궁 등이
정업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조선의 정치이념은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였기에
그러나 조선의 정치이념은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였기에
정업원은 조선조 내내 유생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왕들은 선왕의 후궁들이 거처하는 곳이라 해서 땅과 노비를 지급하는 등
보호정책을 폈지만 적극적으로 보호할 수는 없었다.
이 때문에 정업원은 수차례에 걸쳐 철거와 재건을 반복하다가
결국 유생들의 거듭된 상소에 못이긴 선조에 의해 1612년 완전히 혁파되고
비구니들은 성밖으로 쫒겨나게 되었다.
한때의 승은은 달콤했지만 꽃같은 나이에 과부가 된 후궁들의 일생은
한때의 승은은 달콤했지만 꽃같은 나이에 과부가 된 후궁들의 일생은
어쩌면 범부의 인생보다 고달프고 쓸쓸한 비극적인 삶이었다. ..
그에 비해 정궁인 중전의 인생은 임금의 승하 뒤에도 대비, 대왕대비의 자리까지 오르면서
그에 비해 정궁인 중전의 인생은 임금의 승하 뒤에도 대비, 대왕대비의 자리까지 오르면서
최고의 권력을 자랑했으니 장희빈이 그토록 중전이 되고 싶어했던 것도 어떻게 생각하면
이해가 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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