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악산이 울어야 할까? 웃어야 할까?
대장군 이성계, 왕위에 오르다
외세에 멸하고 외세를 빌어 통일할 것이다
송악산은 개경의 상징이며 고려의 혼(魂)이다.
송악산은 민족의 영산(靈山) 백두산과 맞닿아 있다.
백두대간을 따라 내려오던 백두산의 정기가 마식령산맥을 넘으며 성거산과 정분을 나누다
천마산을 낳고 오관산을 품어 송악을 낳았기 때문이다.
일찍이 외세를 빌리지 않고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은 민족적 자부심이 대단했다.
신라처럼 외세를 빌리지 않고 한반도를 통일했기 때문이다.
‘새나라’의 도읍지를 물색하던 왕건은 송악산에 주목했다.
견훤과 궁예, 신검 등 일세를 풍미했던 영웅호걸들과 자웅을 겨뤄 패권을 장악한
왕건의 주 활동 무대는 임강(臨江) 이남이었다.
새로운 도읍지는 임강 이남 일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개경을 낙점했다.
고려의 서운관(書雲觀)이 간직한 비기(秘記)에 ‘건목득자(建木得子)’ 설(說)과 함께
임강 이남에 수도를 정하는 왕조는 외세에 멸하고 외세에 의하여 통일 된다는
설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흉설(凶說)을 피하기 위하여 선택한 곳이 개경이다.
충신은 두 임금을 모시지 않는다 하지만 송악산은 두 왕조를 맞이하게 되었다.
왕건의 염려처럼 외세에 의하여 새 왕조를 맞이하지 않았다는 것을
행운으로 생각해야 할까?
치욕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아무튼 송악산은 두 왕조를 맞이하게 되었다.
백성들의 갈채 없는 군주
1393년 7월17일. 새 왕조가 탄생했다.
고려의 대장군 이성계가 신생국 왕으로 변신하는 날이다.
부패한 고려를 뒤엎은 이성계가 수창궁에서 임금으로 즉위했다.
후세의 사가들은 이 나라를 ‘조선’이라 부르지만 이 순간 국명이 유보된 신생국이었다.
5백년 도읍지 개경이 술렁거렸다.
새 왕조를 축하하고 환호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대부분의 개경인들은 냉담했다.
오히려 혁명에 희생된 최영장군과 정몽주를 흠모하는 정서였다.
한마디로 백성들의 갈채 없는 왕조가 출범한 것이다.
태조 왕건이 송악산 아래 도읍을 정하고 도읍지로서 시혜를 많이 받아서 일까?
개경인 들의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던 최영장군과 정몽주가 희생된대 대한 정신적인 공항일까?
개경인 들의 시선은 싸늘했다.
패망한 고려 마지막 임금의 눈물
즉위식이 있기 닷새 전.
시중(侍中) 배극렴(裵克廉)이 왕대비를 찾아가 공양왕을 폐 할 것이니 허락해 달라고 요구했다.
거부할 힘이 없는 왕대비로부터 윤허를 받아낸 배극렴은 지체 없이 시행하라고 명했다.
명을 받든 남은(南誾)과 정희계(鄭熙啓)가 북천동 시좌궁(時坐宮)에 연금돼있던
공양왕을 찾아가 교지를 선포하니 부복하여 받들었다.
“내가 본디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나를 강제로 왕으로 세웠소.
내가 성품이 불민(不敏)하여 사기(事機)를 알지 못하니
어찌 신하의 심정을 거스린 일이 없겠습니까?”
흐느끼다 멈추고 끊어졌다 이어지며 말을 미쳐 다 마치지 못한 공양왕은 눈물을 흘리며 통곡했다.
전국새(傳國璽)를 받아든 남은 일행은 대비전으로 향하고 공양왕은 유배 길에 올랐다.
이것이 태조 왕건이 창건하여 찬란한 불교문화의 꽃을 피웠던 고려왕조 마지막 임금의 모습이다.
권력을 쫓아가는 해바라기들의 축제
즉위 하루 전. 16일에는 전야제가 열렸다.
배극렴(裵克廉)을 필두로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김사형(金士衡), 이제(李濟),
이화(李和), 정희계(鄭熙啓), 이지란(李之蘭), 남은(南誾), 장사길(張思吉), 정총(鄭摠),
김인찬(金仁贊), 조인옥(趙仁沃), 남재(南在), 조박(趙璞), 오몽을(吳蒙乙), 정탁(鄭擢),
윤호(尹虎), 이민도(李敏道), 조견(趙狷), 박포(朴苞), 조영규(趙英珪), 조반(趙胖),
조온(趙溫), 조기(趙琦), 홍길민(洪吉旼), 유경(劉敬), 정용수(鄭龍壽), 정담(鄭湛),
안경공(安景恭), 김균(金稛), 유원정(柳爰廷), 이직(李稷), 이근(李懃), 오사충(吳思忠),
이서(李舒), 조영무(趙英茂), 이백유(李伯由), 이부(李敷), 김노(金輅), 손흥종(孫興宗),
심효생(沈孝生), 고여(高呂), 장지화(張至和), 함부림(咸傅霖), 한상경(韓尙敬),
황거정(黃居正), 임언충(任彦忠), 장사정(張思靖), 민여익(閔汝翼) 등
대소신료(大小臣僚)와 한량(閑良), 기로(耆老) 등이
국새(國璽)를 받들고 태조의 저택(邸宅)에 몰려갔다.
개경에는 동서로 관통하는 도로가 있다.
속칭 동대문으로 불리는 숭인문에서 서대문격인 선의문에 이르는 길이다.
또한 송악산에서 회빈문으로 종단하는 도로가 있다.
그 십자로 왼쪽에 있는 것이 수창궁이다.
수창궁에서 선죽교를 건너 숭인문 쪽으로 가면 이성계의 집이 있다.
훗날 목청전이라 부르게 된 숭교리 사저다.
국새를 받든 일행이 저택 어귀에 나아가니 사람들로 골목에 꽉 메워 있었다.
개경 사람들이 다 나온 듯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당시 개경은 4820호의 주택에 인구는 8370명 군졸이 1000여명 주둔하고 있었으니
유동인구를 포함하면 1만 명 정도의 도읍지였다.
태조 이성계의 즉위를 질시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반기는 백성들도 많았다.
어느 시대 어느 혁명을 막론하고 찬성하는 이가 있는 가하면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도 새 왕조를 반기는 무리가 있었으니 기층민이었다.
왕위에 어서 빨리 오르시오
가진 것 없어 있는 자에게 수탈당하고 배운 것 없어 고관 나리들에게 기죽어 지내던
백성들은 대환영이었다.
새 세상에 대한 기대감이 이들을 고무시켰다.
토지는 사찰과 고관대작들이 소유하고 자신들은 노예나 다름없는 소작농이었으니
이들의 소망은 한 평이라도 자신의 땅을 갖는 것이었다.
배극렴이하 문무백관이 엎드려 간청하였다.
“군정(軍政)과 국정(國政)의 사무는 지극히 번거롭고 지극히 중대하므로 하루라도
통솔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니 마땅히 왕위에 올라서 신(神)과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소서.”
이성계는 거절했다. 통과의례였다.
이성계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부복하여 재차 간청했다.
이성계는 사양했다. 절차의례였으리라.
“예로부터 제왕(帝王)의 일어남은 천명(天命)이 있지 않으면 되지 않는다.
나는 실로 덕(德)이 없는 사람인데 어찌 감히 이를 감당하겠는가?”
따르는 무장들과 고려 조정의 녹을 먹던 문신들이 둘러싸고 물러가지 않았다.
대소 신료(大小臣僚)와 한량(閑良), 기로(耆老) 등이 왕위에 오르기를 간절히 권고하니
이날에 이르러 이성계가 마지못하여 수창궁(壽昌宮)으로 거둥하게 되었다.
“내가 수상(首相)이 되어서도 항상 직책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는데
어찌 오늘날 이 일을 볼 것이라 생각했겠는가?
경(卿)들은 마땅히 각자가 마음과 힘을 합하여 덕(德)이 적은 사람을 보좌하라.”
이성계의 왕위 수락이다. 즉위식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등극한 이성계는 고려 왕조의 중앙과 지방의 대소 신료(大小臣僚)들에게
예전대로 정무(政務)를 보도록 명령했다.
즉위식을 마친 이성계는 궁에서 유숙하지 않고 사저로 돌아왔다.
수창궁에서 숭교리로 돌아오는 길에는 선죽교가 있다.
그 선죽교에 정몽주의 피가 채 마르지 않아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이성계는 궁궐이 정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집무는 수창궁에서 봤지만 궁에서 유숙하지 않았다. 군주가 궁궐을 비워두고 출퇴근하는 꼴이었다. 집무를 마치고 사저에 돌아와 잠자리에 든 이성계 품으로 부인 강씨가 파고들었다. 강씨의 눈에서 두 줄기의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성계라는 인간 하나만 믿고 함길도를 비롯한 두메산골 야전군 막사를 전전하며 키워왔던 꿈이 현실이 된 것에 대한 감격의 눈물이었다. 귀뜸해 주었던 내용이다. 정도전과 강씨 사이에는 빈번하게 사람이 오가기 시작했다. 전처소생 자식들로부터 배척과 따돌림을 당했던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더욱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머지 한 가지도 들어 주실 거죠?” 방석에게 세자를 돌리라는 얘기를 듣는 순간, 이성계는 뒷통수를 얻어맞은 듯 했다. 정신이 아찔했다. 막내에게 세자라니 이거 보통일이 아니었다. 하늘이 진동하고 땅이 뒤집히는 것만 같았다. 방우를 비롯한 장성한 아들들과 방원의 날카로운 눈빛이 가슴에 꽃이는 것만 같았다. 이제 강씨의 입에서 세자 방석이라는 말이 튀어나온 이상 강씨의 욕망을 꺾느냐? 끌려가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품속에 안겨 있던 강씨가 눈을 치뜨며 이성계를 바라보았다. 처녀시절부터 섬섬옥수(纖纖玉手)라 개경바닥에서 소문이 자자하던 아가씨였다. 반면 이성계의 제1부인 한씨는 여러 자식 낳아 기르고 노복들과 함께 과전을 지키며 농사짓다 보니 손이 미웠다. 예쁜 손에 반했는지 모른다. 그 고운 손으로 이성계의 가슴을 후비며 파고들었다. 강씨는 이성계와 21살 차이가 나는 젊은 부인이었다. 이방우는 진안군(鎭安君), 이방과는 영안군(永安君), 이방의는 익안군(益安君), 이방간은 회안군(懷安君), 이방원은 정안군(靖安君), 서자(庶子) 이방번은 무안군(撫安君), 방석은 의안군(宜安君)에 봉했다. 책봉식을 마친 이성계가 방원을 불렀다. 이 애비가 왕이 된 것을 선조님께 고하고 오너라.” 아직 아버지가 자신에게 애정을 갖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보권이 정도전에 넘어가고 서모 강씨가 왕비에 오른 것이 씁쓸했다. 특히 정보권이 정도전에게 넘어간 이후 서모 강씨의 사람들이 빈번하게 내왕한다는 것이 방원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방원은 비밀리에 사설 정보팀을 가동하고 있었다. 방원이 꽂아둔 안테나에 이상 징후가 포착되었다. 정도전 주변에 벌서부터 사람들이 몰려들고 왕비로 책봉된 서모 강씨와 정도전이 긴밀하게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처리하기 위하여 모사를 꾸미고 있다는 첩보가 접수되었으나 그 ‘모종’이 무엇인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이것이 바로 고급 정보를 주무르기 시작한 정도전과 하급 정보가 모아지는 방원과의 권력의 함수 관계였다. 세자로 세우려 한다는 정보가 접수되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또 하나의 첩보에 의하면 세자 책봉은 아버지가 왕으로 즉위한 1주년이 되는 내년에 있을 것이라는 첩보였다. 어쩌면 정도전 진영에서 방원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흘린 역정보일 수 도 있다. 이성계 가문은 원래 전주가 본향이다. 전주를 떠난 4대조 할아버지 이안사가 삼척을 거쳐 함흥에 정착하면서 무골 집안으로 성장했다. 방원은 함흥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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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를 놀라게 한 부인 강씨의 부탁
[태종 이방원] 고급 정보와 하급 정보
“전하! 장군님을 전하라 부르니까 너무 어색합니다.”
“나도 듣기가 매우 거북하오.”
“전하를 전하라 부르지 않고 예전처럼 장군님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편 할대로 하시구려.”
“장군님! 장군님께서 정말 상감마마가 된 것이 맞습니까?”
“이르다 뿐이오.”
“도무지 믿어지지 않습니다.”
“나두 믿어지지 않지만 현실이라오. 내일이면 당신에게도 왕비마마라 부를 것이오.”
당신이 왕인데 못 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내일이면 자신의 제2부인 강씨를 현비로 봉했음을 공표하는 날이다.
“아니, 그 말씀이 정말입니까? 꿈인지 생시인지 도무지 믿어지지 않습니다.”
처음 듣는 것처럼 깜작 놀라며 내숭을 떨었지만 어제 정도전이 사람을 보내어
“정말이라오. 이제 당신도 왕비라오.”
“어머머머, 당신은 너무 멋져, 이제 한 가지 소원은 성취시켜 주셨는데
“당신이 왕비가 되었는데 또 소원이 있단 말이오?”
“저만의 소원이 아니라 당신과 나 우리의 소원이랍니다.”
“그게 무어요? 어서 말해 보구려.”
“방석이를 세자로 세워주실꺼죠?”
“...”
부인 강씨가 야망이 있고 욕심이 많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위로 형들이 줄줄이 있는데 서자(庶子) 방석에게 세자라니 당치도 않은 말이었다.
“방석이에게 세자란 말이오?”
“그렇지 않구서요. 당신이 왕이고 내가 왕비라면 방석이가 세자가 되는 것이 안 될 것도 없잖아요?”
“으으음.”
이성계는 괴로운 한 숨을 내쉬었다.
“아이 몰라요. 당신이 왕인데 못할 일이 없잖아요. 당신만 믿겠어요.”
강씨는 얼굴은 별로였지만 손이 예뻤다.
개경진입을 노리던 청년장교 이성계가 권문세족 가문의 강씨가 탐이 났지만
부인 강씨를 현비(顯妃)로 책봉하는 날 여러 아들들도 군(君)으로 책봉했다.
“네가 동북면에 다녀와야겠구나.”
“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이건 명이 아니라 네가 정안공(靖安公)이 된 것을 조상님께 배례하고
“네, 알아 모시겠습니다.”
위로 형들이 줄줄이 있는데도 자신을 찍어서 동북면에 다녀오라는 것으로 봐서
A급 정보에 휘둘리는 B급 정보
공식적인 정보창구는 정도전으로 일원화 되었지만 방원이 안테나를 다 거둔 것은 아니었다.
그중에서 특이 사항은 자신이 없는 사이에 정도전과 강비가 ‘모종’의 일을 전격적으로
미확인 정보에 의하면 자신을 동북면에 보내놓고 서모의 아들 방번이나 방석을
그렇다고 아버지의 명을 어기고 동북면에 다녀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기사는 문화면에 연재하고 있습니다.
2007-02-22 12:17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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