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관

성삼문과 신숙주

기산(箕山) 2006. 6. 19. 11:47
 
                   성삼문과 신숙주 누가 충신인가.

 

요즘 우리 한국적 가치,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남다른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러한 한국적 가치의 표본을 들라고 한다면 단연 선비와 그 정신을 드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선비정신을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지만 근대주의적 인상에서 평가한다면 보수적이고 봉건적인 소양을 철저히 견지한 지배계급 생산의 저수지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좀더 한국적 가치를 생각하는 사람에게 선비정신은 부정과 불의에 대해서 자신의 목숨도 아까와 하지 않고 살신성인, 멸사봉공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무엇이 진정한 충성이고, 무엇이 진정한 선비정신일까.

선비정신하면 역시 세조 때 죽임을 당한 사육신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사실 그들의 죽음을 살펴보면, 유학자라서 저절로 체득한 절개보다는 정의와 명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우리 민족의 전통 속에서 바라볼 필요를 느낀다.

<성삼문>
<신숙주>
<계백 장군>
<신숭겸 장군>

역사 속에서 유학자만이 절의와 명분을 소중하게 본 것은 아니었다. 백제의 계백 장군이 그랬고, 화랑 관창이 그랬으며 도이장가의 주인공 신숭겸 장군도 그랬다. 바꿔 말해 민족의 정서와 절의가 연결되지 못하고 그저 ‘성리학자=선비’라는 등식으로 그 뜻을 논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역사의 충신으로서 사육신을 대표하는 성삼문과 변절자로 낙인찍힌 신숙주 중에서 누가 더 충신일까? 많은 사람들은 ‘충신(忠臣)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기에 성삼문을 더 충신이라고 한다.

또 한편으로 죽음으로 나라의 발전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고, 정의가 바로서지 않는다면 살아서 정의를 세우고, 국가발전을 도모하는 일이 바로 충(忠)일 수 있다는 해석도 있다.

누가 더 충신인가?

<세종대왕>

성삼문과 신숙주는 한 때 친한 동무였고 둘 다 세종시절 집현전 학사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갔으며 세종의 총애를 함께 받았으며, 한글 창제에도 크게 기여했다. 두 사람은 1442년 요동에 유배되어 있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을 열세번이나 찾아가서 직접 우리나라 말의 음가를 교정 받고 돌아오는 등 매사에 협력했다.

두 사람은 세종 말년에 명의 사신을 접대 했는데 신숙주는 통역을 하고 성삼문은 시를 지어 상대했다. 이때 명나라 사신이 두 사람에게 감동하여 의형제를 맺었다고 한다.


<한명회>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세조의 왕위 찬탈로 인해 금이 갔다. 1453년 수양대군(세조)은 한명회와 권람의 도움을 받아 쿠데타(계유정란)를 일으키고 김종서, 황보인 등 권신들을 제거한 다음 단종을 협박하여 마침내 1455년 왕위를 빼앗았다.

당시 성삼문은 아이러니하게도 세조가 등극하는 날 예방승지로서 옥쇄를 수양에게 전달해야만 했다. 이에 격분한 친구 박팽년이 경회루에 몸을 던지려하자 애써 만류한 다음 차근차근 단종 복위운동을 벌여나갔다.


1456년 성삼문은 거사 일을 명나라 사신 환영잔치 날로 정했다. 다행히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이 유응부와 함께 당시 무장호위(별운검)를 맡게 되면서 거사는 무르익었지만 이들 별운검이 환영식장에 들어오지 못하고 결국 거사는 실패했다.

<세조>

모진 고문 속에서도 성삼문은 지조를 지키며 끝내 세조를 전하라고 부르지 않았다. 능지처참을 당해 찢기고 잘린 그의 시체가 저잣거리에 전시된 것은 또 다른 역쿠데타를 막겠다는 세조의 의지였지만 결과적으로 세조의 정치력에 대한 커다란 국민적 실망을 가져왔다.

오죽했으면 속리산 소나무를 정이품까지 하사하면서 자신의 왕권이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상징조작을 하려고 했을까. 당시 소나무는 왕권의 상징이었다.



반대로 신숙주는 세조가 “당 태종에게는 위징이 있고, 나에게는 숙주가 있다”고 할 정도로 총애를 받았다. 신숙주와 수양대군의 인연은 수양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서장관으로 동행한 것이 기화였으며, 이미 집현전 시절 그의 유창한 중국어 실력 때문에 수양이 쿠데타를 위해 중국을 입막음할 때도 큰 힘을 발휘했다.

<김종서의 육진 개척 >

사실 계유정란은 세종에게 사대외교를 견제하고 자주적 외교를 간언한 김종서 등 자주파에 대한 친명 집단의 반역이고 쿠데타였다. 명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통하여 권력 찬탈을 용의주도하게 준비한 일등공신이 바로 신숙주였다.

 

노련한 외교가 신숙주가 왜 그러한 반민족적 거사의 주역인 세조를 도왔을까? 그것은 바로 수양대군이 대세를 읽는 현실주의자이자 냉철한 현실 분석력을 소유한 사람이었다고 믿는 것 때문이었다. 즉, 수양이 그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신숙주가 수양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성삼문이 불사이군을 말할 때 신숙주는 명나라와 소원해지는 현실에서 조선을 구제하는 것이 진정한 충성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절대 왕권의 안정=국민 생활의 안정’이라는 의식으로 무장함으로써 충신은 불사이군이라는 단하나의 자기 최면만으로 죽음을 쉽게 여기는 그런 절의나 충성과는 분명한 선을 그은 것이다.

나중에 성종이 즉위한 뒤 세조의 조카 구성군이 왕위 찬탈 기도를 하였을 때는 오히려 그를 제거함으로써 왕권의 안정을 도모했다. 결국 세조의 왕위찬탈을 지원한 것은 나쁘게 보면 자신의 영달을 위해 간에 붙고 쓸개에 붙고 한 것이지만, 크게 보면 양반 귀족이 자신의 독점적 권력을 이용하여 무차별적으로 백성을 수탈하는 것 보단 일인에 의한 만인에 대한 수탈이 보다 기동력 있는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본 결과이다.

우리는 과연 무엇이 진정한 충성인지 고민해 본다. 신숙주처럼 강인하게 살아남아 조선의 발전을 도모한 신하도 또 다른 충신일 수 있다. 그것은 나라의 주인이 비록 임금이지만 백성의 삶도 중요했고, 국가의 운명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에게 존재하지 않는 오직 하나의 명분만으로 선비정신이라 치켜세우거나 하나의 이론만을 정의의 잣대라고 보는 태도는 어쩌면 외고집을 절의라고 오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뜨거운 열정만큼이나 냉철한 것도 절의이며 충성인 것이다.

어쩌면 오늘날 학원 민주화라는 거대한 담론에 경도된 채 그 하나의 명분을 위하여 수많은 날밤을 소모하는 것을 보는데 이것은 진정한 민주화 노력이라고 보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구석구석 학교 구성원의 삶의 황폐함을 망각하는 것이며 그것을 결코 진정한 민주화라고 보기 어렵다.

재주가 있는 사람이 효율적으로 그 뜻을 펼치고 재주가 없는 사람도 함께 배려되는 학교 그리고 나만의 세상을 독점하지 않고 함께 세상의 어려움을 헤쳐가려는 길을 고민하는 학교, 그것이 21세기적인 학원 민주화인 것이다.

우리는 참으로 복잡한 현대 사회에 산다. 하나의 명분에 모든 것을 투입하는 그런 열정보다는 현실을 하나하나 집으면서 최선을 찾지 못하더라도 차선을 찾고 고민하는 것. 그런 모습도 또 다른 충성일 수 있다. 그것을 아는 것이 바로 청년학생들의 절의 정신일 것이다.

역사는 큰 강에 물 한 방울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작은 방울이 모여 큰 강을 만들어 낸다는 믿음의 학문이다.

글 : 김인호 교수
사진 출처: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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