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관

담배의 역사와 전투...

기산(箕山) 2006. 6. 22. 21:13

실로 무섭고도 진저리치던 전쟁이었습니다.

무려 30년을 치루고도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인 것입니다.

 

이는 바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산물에 대한 나의 독립

투쟁이자 해방운동인 셈입니다.


우선 영국이 인도를 거점으로 중국대륙에 들어오는데

프랑스와 독일, 미국과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이 1백여년에

동양침탈을 한 것처럼 요놈이 우리나라에 진출한 역사는

참으로 깁니다.


심지어 마약을 중국대륙에 팔아먹으려다 전쟁까지

일으킨 것을 보면 요놈이 서구에서 들어온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강산이 세 번이나 변할 시간이 흐를 정도 계속된

지겨운 전쟁이 이제 끝날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물론 요놈을 가까이 했을 때 나의 육체쾌락이 도를 넘어

육체고통으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놈은 '동전의 양면'처럼 쾌락과 고통이라는 두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기 때문에 더욱 떨쳐버리지 못했습니다.

 

자연 부화뇌동과 영합, 육체해방을 위한 투쟁이 반복됐습니다.

그러니 설령 30년 싸움이 내게 승리로 끝나더라도 요놈에 대한

나의 부역 여부를 거론한다면 특별히 할 말이 없을

정도로 한 때 그를 몹시 좋아했습니다.

 

그것이 먼저 나의 참회이자, 고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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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찰거머리처럼 지겨운 놈과의 만남은 30년 전인 10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놈은 민족의 애환이 담긴 노래 '아리랑'이니 '희망', 또는

한민족의 보편적 정서를 가장 잘 담은 시인, 김소월의 대표시

'금잔디'라는 그럴 듯한 모습으로 다가왔고 점잖은 성인 남자의

상징인 양 다가왔기 때문에 사춘기를 막 지난 저에게는 일종의

경외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담배를 배우던 시절을 많이 팔리던 담배>

 

 

요놈을 멋쟁이 젊은 남자가 가까이 하며 뽀얗게 연기를 날리는

모습에 반해 결혼을 했다는 여자까지 나올 정도입니다.

 

'어떤 때(?)=어른 몰래 놈과 가까이 할 때' 기억으론 박하향기가

가득한 놈은 '금관'인가 '수정'인가로 접근했고, 이 밖에 '청자'나

'백자'처럼 고려나 조선시대 유명한 자기의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때론 국보 1호인 남대문과 성웅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물리치기 위한

 우국충정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시름하던 한산도나 거북선,

그리고 신탄진과 한라산이라는 지명으로도 다가왔습니다.


더욱이 은하수처럼 밤하늘에 반짝이며 마음을 설레게 하던 모습이나

도라지나 파인 트리(소나무), 장미 등의 멋진 모습으로 나타났으니

10대 후반 쉽게 매료됐던 것은 어쩌면 당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나온 ‘거북선’과 70년대 대표 브랜드였던 ‘새마을’은 최초

30원이었다가 88년 없어질 당시 40원이었습니다.

 

970년대는 애국심 고취와 국민통합 목적으로 군사정부 의지가

상당히 담배에 반영됐습니다.

74년 충무공을 매개로 민족의식과 애국심 고취를 목적으로

‘거북선’이 나왔습니다.

200원으로 적지 않은 가격에도 인기가 높았습니다.

 

1980년대는 ‘솔’ 전성시대인데 500원으로 88 올림픽을 앞두고 발매된

‘88라이트’(600원)와 함께 80년대를 풍미했으며 90년대는 ‘디스’가

 바톤을 이어받았습니다.

 

74년 ‘거북선’은 처음 나오면서 200원이었고 자장면은 150원이었는데

 항시 최고급 담배와 자장면 가격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제 기억으론 이 놈들이 모습을 달리할 때마다 먼저 나온

놈은 질이 떨어져 자연스레 은퇴하고, 뒤에 나온 놈의 가격대만

 높아졌습니다.

 

그래서 요놈을 만드는 기관이 수입을 높이려 할 때마다 이름을

달리하는 새로운 놈이 나오고 오래된 놈은 질이 떨어져 자연스레

찾는 사람이 없어 퇴장하게 된다는 비판까지 받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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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놈에 빠지게 된 것은 나의 개인적 요인도 있었습니다.

 

시골 촌놈이 고교 시절 한양으로 유학을 갔으나 서울생활 부적응과

여러 원인으로 제 때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고 소위 필수과정(?)이라던

 재수를 하게 된 것입니다.

 

살랑거리던 봄바람이 지나가고 지겨운 여름이 왔습니다.

 

짜여진 고교시절과는 달리 시간적 여유가 많아 참으로 권태롭고

짜증나는 시절이었습니다.

 

학원과 삼청동 주변 정독도서관을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삼청공원과 국무총리 공관 등 높은 나리(?) 들이 근무하는 각종

기관도 이 때 구경했습니다.


청와대도 지척에 있으니 한마디로 촌놈 출세한 것입니다.

요런 때 요 놈이 자연스레 나와 가까이 한 것입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20개를 한꺼번에 파는 가게 외에도 버스

승강장 주변에는 쥐포와 껌 등 잡화와 함께 한 두 개를 파는

노점상도 있었습니다.

 

아마 기억에는 1백원에 서너 개를 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를 한 '개피"라고 하지 않고 한 '까치'라고 하지요.

 

1백원 동전을 내고 "세 까치만 주세요"라고 하면 갑 속에서

세 개를 꺼내 주는 식이었습니다.

 

요놈을 가지고 공원 숲 속이나 화장실, 또는 도서관 으슥한 곳에서

 피는 맛이란 안 피워본 사람은 알 수 없는 죽이는 맛이지요.

 

당시에는 '명승'이 즐겨 피던 담배였지요.

 

약간 길이가 짧은 요놈은 전국각지 관광명소 사진까지 인쇄한

포장지에 넣어 산뜻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 때는 아직 젊어서인지 그렇게 그놈이 피해가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냄새도 별로 나지 않았습니다.

 

그럭저럭 대학시절과 사회에 나와 30년이 흐를 때까지 요놈을

항상 품에 품고 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중간에 무수하게 놈을 떨쳐버리려고 노력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놈을 샀다가 가위로 자르는 사진을 보고 손으로 자른 다음

화장실에 버린 숫자만해도 무수합니다.

 

변기에 버린 물량만 합쳐도 어지간한 소매상은 충분히 운영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연말이면 폭탄주에 마음껏 요놈을 물고 피우며 "내년에는 절대로

너를 가까이 하지 않으리라" 결심을 다진 것이 무릇 30년입니다.

 

코미디언의 황제, 이주일 선생이 폐암인가로 병상에 누워

"제발 시청자 여러분은 저와 같이 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끊으십시요"

라고 호소했을 때도 결국 놈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30년 전이면 아마 1975년 전후에 요넘을 가까이 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러던 것이 5년 전부터 몸에서 반응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입과 몸에서 냄새가 나는 것은 물론이고, 이까지 쉽게 상했습니다.

 

마누라는 "그렇게 입에서 냄새가 나는데 어떻게 사람을 만나고

다니냐?"며 불쾌해 했습니다.

 

사람을 많이 만나는 직업상 어쩔 수 없이 양복 안주머니에

자그마한 치약과 함께 칫솔을 넣고 다녔습니다.

 

식사나 음주 후에 반드시 칫솔질을 했으나 냄새가 없어지기는

그 때 뿐이었습니다.

 

수십 분이 지나면 마찬가지였습니다.

 

하기야 하루에 20번에서 10번 가량 요놈을 가까이 하니

가슴속이 성할 리가 없지요.

 

겉에서 볼 수가 없어서 그렇지 아마 재떨이 이상 시커멓게

썩었을 것입니다.

 

오죽하면 "당신의 폐가 재떨이입니까?"라는 폐 속에 시커먼

재떨이를 그려 놓은 그림을 화장실에서 보고 그 놈들을 통째로

분질러 변기에 버리기까지 했겠습니까?

 

운전 중에 유리창에 왼 손을 걸쳐놓고 요놈을 가까이

하다가 불티가 튀어 어디로 갔는지 뜨겁기만 하고 사고를 날

뻔한 경험도 했지요.

 

양복은 성한 것이 없이 여기저기 구멍이 나고...........ㅎㅎㅎ

 

그러더니 요놈을 계속 가까이 하니 3-4년 전부터  가슴 부위가

바늘로 톡톡 쏘듯이 하더군요.

 

물론 그놈 때문이라는 것은 직감적으로 알았지만 크게

아픈 것은 아니었으므로 여전히 그놈은 내 호주머니 주요 자리를

 차지했지요.

 

그러던 것이 점차 심해지더니 잠을 자다 호흡이 가빠지거나

가슴 오른 쪽에 쇠뭉치가 들어있는 듯 답답한 증상이 밤에는

물론 낮에도 계속 됐습니다.

 

아무래도 여기저기 자료를 찾아 봤더니 산소를 공급하고

이산화탄소를 배출한 폐 부위가 그놈 때문에 막힌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10 가치에서 다섯 가치로 줄이고,

이제 6월 들어서는 하루 한 대도 피우지 않는 상황이 됐지요.

 

선열들이 피땀을 받쳐 나라를 지킨 것을 기념하고자 만든

현충일과 6.25가 있는 6월을 맞아 고놈에게서 완전 벗어나 독립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완전 고놈에게서 해방된 것은 아닙니다.

 

8.15 해방이라면 아마 7월말쯤에 있다고 여겨집니다.

 

뭔가 해방될 듯한 느낌을 지울 수는 없지만 아직 일본 천황의

항복선언은 없었기 때문에 아무 것도 모르는 지경이라고나

할까요.

 

하여간 무려 30년 만에 고놈을 완전 멀리하고 스스로 독립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랬더니 마치 노예가 해방시켜 주어도 혼자 살 길이 막막하니

오히려 주인을 찾아가 "노예로 더 일할 수 있게 해달라"는 말을

했다는 것처럼 쉽지만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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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놈들은 다른 아닌 '담배(tobacco)'라는 요물입니다.

 

담배잎을 말려 가공처리해 얻는 물건으로 궐련이라고 한답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했을 때,

그는 원주민들이 오늘날과 똑같은 방식으로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담배에 약효가 있다고 믿었는데,

이때문에 담배가 유럽으로 전해져 들어갔고 이로써 전세계

곳곳으로 퍼지게 되었으며, 재배지역도 크게 늘었답니다.

 

프랑스는 1556년, 포르투갈은 1558년, 스페인 1559년, 영국은

1565년부터 담배를 심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 대사로 리스본에 주재하던 장 니코는 프랑스 왕비이자

섭정자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에게 담배씨를 보냈는데, 그의

이름을 따 담배의 속명(屬名)이 지어졌답니다.

 

식민지 개척자들은 유럽에서 대량으로 만들어진 상품들과

담배를 주요한 상품으로 교환하게 되었습니다.

담배생산량이 많아지고 미국 전지역으로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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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는 담배가 1618년(광해군 10) 일본을 거쳐 들어왔거나,

중국 북경을 내왕하던 상인들에 의하여 도입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 재래종 품종명이 일본에서 도입된 것은

 남초(南草)·왜초(倭草)라 하고, 베이징이나 그리스도 교인에

 의해 도입된 것은 서초(西草)라 부른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전래된 담배는 1921년까지는 자유경작을 하다가

그뒤에 전매제도로 바뀌게 되었답니다.

 

담배가 도입된 이후 1970년대 후반까지 그 생산은 계속

증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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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 담배를 tobacco(터배코)라 하는데, 가까운 일본도

"다바코"(タバコ)라고 합니다.

 

어원은 서인도 제도 "트리니다드"(Trinidad)도 북동부 섬

"타바고"(Tabago)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산토 도밍고

토인이 흡연에 사용하는 담뱃대를 "토바코"라 한 데서

온 것이라는 설이 있고, 또 한편 멕시코 원주민 토어(土語)에서

 왔다는 말도 있습니다.


 담배에 관한 우리 나라 최초의 기록은 인조실록에 나온답니다.

거기에 "담배는 서기 1616∼1617년에 바다를 건너 들어와

이를 복용하는 자가 간혹 있었으나 성행하진 않더니,

1621∼1622년에 이르러서는 복용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쓰여있답니다.


 지봉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오늘날 쓰이는 "담배"비슷한

 말이 나온답니다.

 

"담바고는 남령초라 하는데 근년에 일본에서 온 것이다"라는

대목이 그것입니다.

 

그 밖에도 인조 때의 명신이자, 우리 나라 담배 시조라 할 수

있는 계곡 장유(谿谷 張維)의 谿谷漫筆에 "담배 피우는 법은

일본에서 온 것이니, 일본 사람은 이를 "담박괴"(淡泊塊)라

한다고 기록됐답니다.

 

윤기진(尹起晉)의 大東紀年에는 장유(張維)가 피우기 시작했다

는 말과 함께 "痰破塊"(담파괴)라는 표기가 나온답니다.


 그 이후, 앞의 민요에서 보이는 "담바구" 같은 표기도 보이니,

"토바코"가 일본의 "다바코"를 거치고 그것이 우리 나라로 건너

오는 사이 "담바구"같은 것으로 와전되어 "담배"로 된 것이라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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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담배의 역사는 차지하고라도 담배는 해악 못지 않게

끊기 어려운 마력도 있습니다.

 

고민이 있거나 일이 잘 안 풀릴 때, 혹은 술 한잔 걸쳤을 때 피는

담배 한 모금은 한 마디로 기막힙니다.

 

쑥~ 빨아들인 담배 한 모금을 크게 내품으면 온갖 고민과 시름을

다 떨쳐 버린 듯한 후련함도 느낍니다.

 

또한 힘든 일을 하거나 군대 시절 훈련을 마치고 너도나도

담배를 피울 때 혼자서 피우지 않을 재간이 있는 사람 별로 많지

 않지요.

 

그래서 군시절 대표적인 담배인 '화랑'에 얽힌 일화도

적지 않고, 군인의 사기를 복돋우기 위해 만든 군가에도

담배 내용이 적지 않습니다.

 

우선 <전우>의 2절은 이렇게 진행됩니다.


한 가치 담배도 나눠 피우고
기쁜 일 굳은 일 다 함께 겪는
우리는 전우애로 굳게 뭉쳐진
책임을 다하는 방패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우>라는 군가를 올립니다.

오랫만에 함께 들어 봅시다.

담배가 무척이나 생각나게 하는 노래입니다.

 

 

 

. 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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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다

 

"화랑담배 연기속에 사라진 전우야"로 잘 알려진 군가도 있습니다.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전투는 3일만에 수도 서울을 뺏기고

남으로 남으로 후퇴를 거듭하는 동안 어느덧 전선은 경남과 부산만

 남기고 북한의 수중에 떨어지는 상황으로 변했지요.

 

이 때 낙동강 전투를 배경으로 시작되는 노래 '전우야 잘자라'에

나오는 가사가 바로 이 구절이지요.

직후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해 북으로 북으로 진격했고

중공군 개입으로 다시 후퇴하다

 

낙동강 전투를 소재로 52년에 발표했는데 이후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노래라고 알려졌습니다.


낙동강아 잘있거라
우리는 돌진한다 ... 라는
군가를 부르며 맨몸으로 적의 탱크에 산화하던 그 날도...

 

아마 내가 담배로부터 해방을 선언하고

거의 독립 직전 상황에 와 있는 지금 같은 느낌으로 노래를

부르지 않았을까요?

 

 


<낙동강 전투와 폭격 사진>

 

전우야 잘자라
작사 작곡: 유호, 박시춘

1)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떨어져간 전우야 잘 자라........................

2) 우거진 수풀을 헤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추풍령아 잘 있거라 우리는 돌진한다
   달빛 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전우야 잘자라 / 현인

 

유 호 작사, 박 시춘 작곡으로 전세는 바뀌어 북진에 북진을 거듭하던 1952年에 발표되어 전후방 가릴 것 없이 애창되었던 노래입니다.

 

장병들의 심정을 노래한 <전선야곡>과 더불어 군가가 아닌 군가로서 싸우는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아 준 노래로 한때 군에서는 병영생활의 사기진작에 가장 효과적인 노래들을 여론조사한 결과 <전우야 잘 자라>가 최고의 노래로 뽑혀 군의 사기진작에 큰 공헌을 하였음을 증명한 노래였습니다.


 

<화랑 담배의 여러 모습>

 

 

수많은 마을이 전소되고
엄청난 사람이 자유를 위해 죽어간 사실을 기억하며 그 노래도 함께 올립니다.

 


첨부파일

 

양현경 -전우야 잘자라[국가보훈처_양현경팬카페2].mp3 (3383kb)

[ 파일받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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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인씨 노래는 찾는대로 올리겠습니다만 이 노래를 들으니 담배 생각도 납니다.

 

그러나 이제 몸에서 거부하니 안되겠지요............ㅎㅎㅎ

 

하여간 6월들어 피운 담배는 22일까지 10가치도 안되니

완전 요놈으로부터 해방된 셈입니다.

 

금연에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30년간 하루 20가치를 피웠다면

30년 곱하기 365 곱하기 20 하면 21만9000 가치가 맞는지요....

 

수학적 재능이 부족하야......

 

하여간 사람의 폐의 정화능력도 대단합니다.

 

담배 열 가치만 재떨이에 비벼 꺼놔도 대단한데 무려 22만 개비를

피우고도.........

 

내 가슴에 진짜로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그처럼 혹사해 놓고 요즈음 공기가 나쁘니 매연이 어떻느니 했으니............

 

호국의 달, 6월을 맞아 순국선열에 마음을 다시 한 번 잡아 봅니다.

당신들이 남긴 조국애처럼 훨씬 다부진 의지를 갖고

기어코 담배로부터 독립을 하겠노라고 말입니다.

 

일제 36년에 육박하는 담배 30년 해방의 감격을

이렇게 소리쳐 부릅니다.

 

담배로부터 독립 만세!


                                       글쓴이 : 구름나그네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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