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관

"통석의 염" 사과한 日王.. 우익 반대로 방한 꿈 못이뤄

기산(箕山) 2019. 4. 1. 03:20

https://news.v.daum.net/v/20190331190402920


"통석의 염" 사과한 日王.. 우익 반대로 방한 꿈 못이뤄


                                                                           김청중 입력 2019.03.31. 19:04 수정 2019.03.31. 23:18


아키히토, 30일 헌정사상 첫 생전 퇴위.. 1일 새 연호 발표 /

"日 왕가 백제 혈통" 발언 열도 충격 /

보수 매체들 일제히 보도 침묵 /

선조들은 조선 강제병합에 앞장 /

어릴적 태평양전쟁 직접 경험 /

재위기간 야스쿠니 참배 안 해 /

교전국 美·中 등 50여개국 방문 /

노태우·DJ 방일 때 과거사 사과 /

1988년 왕세자 때 방한 논의 / 퇴위 후엔 상왕으로 여생 보내





"저 자신으로서는 간무천왕(桓武天皇)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武寧王)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紀)에 쓰여 있는 것에 한국과의 연(緣)을 느끼고 있습니다.

무령왕은 일본과의 관계가 깊고, 그 시기 일본에 오경박사(五經博士)가 대대로 초청됐습니다.

또 무령왕의 아들 성명왕(聖明王·성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아키히토(明仁·86) 일왕이 2001년 12월 역대 일왕으로서는 처음으로

일왕가의 혈통이 백제계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진솔하게 인정하면서

한·일 양국은 큰 충격에 빠졌다.


일왕은 당시 68세 생일(12월23일)을 닷새 앞두고 12월18일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를 공동 개최하는 한·일 관계에 대한 질문을 받자

과거 한국에서 전래한 다양한 문화·기술이 일본의 발전에 기여했음을 강조하면서

백제 혈통 발언을 했다.


일왕 발언은 당시 일본 전국지 가운데에서는 아사히신문과 도쿄신문 정도만 보도하고

다른 매체는 침묵으로 일관할 정도로 보수층을 중심으로 일본 사회의 쇼크는 컸다.





아키히토 일왕이 4월30일 일본 헌정사상 처음으로 생전 퇴위하고

5월1일 나루히토(德仁·59) 왕세자가 즉위한다.


4월1일 오전에는 나루히토 왕세자의 재위 기간 사용될 새 연호(年號)가

발표될 예정이다.


연호 공표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접고 새로운 장을 연다는 의미를 갖는다.



벚꽃놀이를 즐기는 일왕 부부. 아키히토 일왕(왼쪽)과 미치코 왕비가 지난 27일 교토의 국립공원인 교토교엔에서 헤이세이(아키히토 일왕의 연호) 시대 마지막 벚꽃놀이를 즐기고 있다. 교토=AFP연합뉴스

벚꽃놀이를 즐기는 일왕 부부.

아키히토 일왕(왼쪽)과 미치코 왕비가 지난 27일 교토의 국립공원인 교토교엔에서

헤이세이(아키히토 일왕의 연호) 시대 마지막 벚꽃놀이를 즐기고 있다.

교토=AFP연합뉴스



◆ 한국과의 연(緣) 강조… 우익은 불만


일왕은

왕세자 시절부터 한국과의 우호적 관계 설정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무산되기는 했으나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대회를 즈음해 한국 방문이 추진되기도 했다.


31일 우리 외교부가 공개한 외교문서에 따르면

1988년에도 한·일 간에 아키히토 왕세자의 방한 문제를 논의했다.


일왕은

1989년 1월 즉위 후 1990년 5월 당시 방일한 노태우 대통령을 만났을 때는

과거사와 관련해

"우리나라(일본)에 의해 초래된 불행했던 시기에 귀국(한국) 국민이 겪었던

고통을 생각하고 본인은 통석(痛惜)의 염(念)을 금할 수 없다"고 사과했다.


1997년 김대중 대통령이 방일했을 때도

"우리나라(일본)가 한반도의 여러분께 크나큰 고통을 안겨준 시대가 있었다.

그것에 대한 깊은 슬픔은 항상 본인 기억에 남아 있다"고 말했다.


일왕을 보는 우리의 시선은 복잡하다.


이는 메이지(明治)-다이쇼(大正)-쇼와(昭和)로 이어지는 일왕의 선조가

한국 강제병합과 무력지배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부친인 쇼와(히로히토·裕仁) 일왕 재위 기간(1926∼1989) 한국민은

무수한 인명과 재산을 희생당했다.


한국에서 과거사에 대한 일왕 사죄론이 나오는 배경이기도 하다.


2012년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일왕이) 한국을 방문하고 싶으면 독립운동하다가 돌아가신 분들을 찾아가서

진심으로 사과하면 좋겠다"고 말했고,

문희상 국회의장도 최근 일왕을

'전범의 아들'로 표현하면서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일왕 사죄론을

거론하기도 했다.





분명한 점은 현 일왕이 부친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1989년 1월 즉위 후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靖國)신사를 한 번도 참배하지 않았다.


2005년 6월 미국령 사이판 방문 당시에는

태평양전쟁 때 숨진 1100여명의 한국인을 기리는 한국인희생자추념평화기원탑을

예고 없이 방문했다.


이는 보수우익이 주도하는 일본 정치권과 다른 모습이다.


지난해에는 야스쿠니신사의 수장인 궁사(宮司·신사에서 제사 등의 업무를 담당)가

"천황이 즉위한 뒤 한 번도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지 않았다.

야스쿠니신사를 망치려 하고 있다"고 말한 것이 알려져 파문이 확산하자 사퇴했다.


그동안 일본인뿐만 아니라 전체 전쟁 희생자를 추모하는 평화 행보를 보여온

일왕에 대한 우익 내부의 불만을 보여준다.


일왕의 평화 행보에도 한국 국내에서 제기되는 일왕 역할론처럼

공공연한 외부 압력이 들어가면 일본 우익이 악용하고 일반 일본 국민의 반감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이 고민스러운 지점이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은

"일왕 스스로 제국주의시대와 전쟁을 반성하고 있는데 '상징 천황제'를 넘어서는

정치적 역할을 요구할 경우 우익이 평화 이미지를 구축해온 일왕을 견제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 태평양전쟁 참상 직접 경험


아키히토 일왕은

일본 군국주의가 정점으로 치닫던 1933년 12월23일 도쿄의 왕궁(일본 명칭 황거)에서

히로히토 일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평양전쟁 전세가 기울어지던 1944년 11세의 나이로 도치기현 닛코(日光)로

피란하기도 했다.


일왕 스스로 전쟁의 참상을 경험했다는 점이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등

전후 세대가 주도하고 있는 일본 정치권과의 차이다.


일왕은 2013년 팔순을 앞두고 가진 기자회견에서도

생애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초등학교 학생 시절 겪은 전쟁을 꼽았다.


일왕은

"(전쟁으로 인해) 다양한 꿈을 갖고 살던 많은 사람이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은 것을

생각하면 정말 참담할 따름"이라고 회상했다.


1946년 10월∼1950년 12월에는

"서양의 사상과 습관을 배우라"는 부친 지시에 따라 미국인 가정교사에게서

교육받기도 했다.


1952년 왕세자에 책봉된 후에는

전쟁 책임으로 대외 활동이 부자연스러운 부친을 대신해 왕실 외교의 전면에 나섰다.





26세가 된 1959년 한 살 아래인 현 미치코(美智子·85) 왕비와 결혼해

나루히토 왕세자 등 2남1녀를 뒀다.


미치코 왕비는 메이지 시대 이래 최초의 평민 출신 왕세자빈이었다.


일왕은 왕비에 대해

"천황 자리에 있는 것은 고독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나는 결혼으로

내가 소중히 하는 것을 함께 소중히 여겨주는 배우자를 얻었다.

황후가 항상 내 입장을 존중하면서 곁에 있어 줘 평안을 느꼈다"고

애틋한 정을 표시했다.


재위 기간 전쟁 당시 교전 상대였던 미국, 영국, 중국은 물론

점령지역이었던 필리핀, 싱가포르 등 총 50여개국을 방문했다.


방한은 미묘한 양국 관계 탓에 실현되지 못했다.


한국 여권 관계자는

"일왕 본인은 방한을 희망하고 있으나 우익이 반대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1992년 10월 중국 방문은

톈안먼(天安門) 사태 이후 국제사회의 봉쇄를 뚫기 위한 중국의 수세적 입장

덕에 성사됐다.


어류학자로서 일본어류학회에 논문 28편을 발표하기도 했다.


2016년 생전 퇴위 계획이 일본 매체에 일제히 보도됐으며, 2017년 12월

생전 퇴위를 공식 발표했다.


일왕은 4월30일 퇴위 후에는 상왕(上王·일본 명칭 상황)으로 여생을 보낼 예정이다.



도쿄=김청중 특파원 c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