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조선도 단군왕검 계승.. 기록 찾았다
고려·조선도 단군왕검 계승.. 기록 찾았다.
YTN 2014.10.03.
[앵커]
우리 역사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나옵니다.
그런데 최근 고려와 조선이 고조선을 계승하고
단군 왕검을 시조로 여겼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습니다.
보도에 양훼영 기자입니다.
[기자]
강화도 마니산 정상에 있는 참성단.
단군에게 제사를 지냈던 곳으로 여겨지는 곳입니다.
참성단의 동남쪽, 옛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제궁터가 나옵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제기와 재물을 준비했던 곳으로, 고려 시대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제궁터 북쪽에 있는 큰 바위에 한문으로 쓰인 글귀가 발견됐습니다.
이번에 발견된 글귀는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는 내용으로, 모두 4줄로 이뤄져 있습니다.
4줄의 글귀 중 명확히 보이는 글자는 총 4자.
세계 신실입니다.
신을 위한 공간에서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인터뷰:하상섭, 강화문화원 항토사연구위원]
"이런 문자 발견으로 인해 고조선 역사의 실체가 제대로 드러나서 고조선 역사는
신화가 아니라는 것을..."
고려에 이어 유교를 국교로 삼았던 조선도 단군을 우리 시조로 생각했다는 기록이 발견됐습니다.
승정원일기 영조 8년 1월 11일 자.
단군을 우리의 천황이라 말하고, 그 사당을 수리하라고 명을 내린 기록이 있습니다.
[인터뷰:복기대, 인하대 융합고고학과 교수]
"(고조선은) 모든 사람이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자는 이념과 목표가 있어
(역사에서) 중요한 거죠."
홍익인간을 이념으로 우리 민족의 하늘을 연 단군왕검.
천 년의 시간을 지나 고려와 조선까지 그 이념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YTN science 양훼영입니다.
마니산 참성단
천제암궁지(天祭庵宮址) - 천제암궁(天祭庵宮)의 터
출처 - http://media.daum.net/digital/others/newsview?newsid=20141003230105128
위 말은 영조임금의 발언으로 "단군은 우리의 천황(天皇)이시니 그 사당을 항상 잘 수리, 보수하라.
나도 예의를 다하여야 하니, 가까운 신하인 승지가 가서 직접 제사를 올려라." 하는 내용이라 하겠습니다.
(사실 천황(天皇)이라는 말도 고대부터 우리나라에서 쓰던 말인데
나중에 일본이 베껴다 쓰게 되었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영조임금이 직접 단군사당에서 천제를 올리면
중국과의 외교관계가 험악해졌을 겁니다.
중국권력이 보기에 그것은 중국이 천자(황제)국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의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국가의 안위를 위해서는 조선임금이 직접 단군사당에서 제를 지내는 것은 어려웠을 겁니다.
중국의 보복을 우려해서 말이죠.
그리고 위에 나오는 천제암궁지(天祭庵宮址)는
그에 대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천제암궁지(天祭庵宮址)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문산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재궁(齋宮) 터. - 인천광역시기념물 제24호.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서 단군 시조에 제사를 올릴 때 필요한 여러 가지 물품과 제기,
그리고 제물을 준비하던 건물로 지금 이 곳에는 석축 3단을 올려 본 터를 닦았던 자취와 우물, 금표 등이 남아 있다.
이 건물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의 문신 목은(牧隱)이색(李穡)의 시를 목판에 기록한 시판(詩板)이 있었다고 하며
조선시대에 들어 태종 임금도 왕위에 오르기 전 이곳에 들러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 터는 고려시대부터 존속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에도 명종이 당시 홍문관에 봉직하던 율곡(栗谷) 이이(李珥)로 하여금
참성단 제사에 글을 지어 올리도록 하였으며 이와 같은 단군제례는 조선시대 말기까지 지속되다가
1883년(고종 20)에 폐지되고 여기에 있던 불상은 강화도 전등사로 옮겨졌다.
(이상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설명)
위의 내용들에서 알수 있는 것이
고려시대, 조선시대에도 국가적 차원에서 마니산 참성단에서 단군왕검께 천제(天祭)를 지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참성단을 다른 말로 천제암(天祭庵)이라 불렀으며 참성단에서 천제 지내는 것을 준비하는 건물을
천제암궁(天祭庵宮)으로 부를 정도로 궁(宮)으로 부를 정도로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이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리고 [YTN 사이언스]에서 [민족의 뿌리, 상고사를 말하다.]라는 방송을 한 적이 있는데요.
(방송보기 - https://www.youtube.com/watch?v=r8HEaL6C-yo )
영조임금이 신하들에게 [고려사]을 가지고 들어오라고 하고 있죠. [승정원일기]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승정원일기]에 보면 이 후에 다음과 같은 귀절이 나옵니다. 上曰 下番讀檀君篇 命勳讀之 "(영조)임금이 (고려사의) 단군편(檀君篇)을 읽으라 명하니 (신하) 이명훈이 그것을 읽었다." (승정원일기 원문 보는 곳.) 위에서 임금과 신하가 함께 공부하는 자리에서 "단군은 우리나라의 태고적 임금"이라 이야기하고 있죠. 그런데 지금 전해지는 [고려사]에는 [단군편(檀君篇)]이 없는데 어떻게 영조임금과 그 신하들이 보는 고려사에는 단군편이 있었을까요. 조선 개국후 처음 만들어진 고려사에는 단군편이 있었는데 세조 ~ 성종 때 고려사에서 단군편을 빼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전해지는 [고려사]는 세조 이후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단군편]을 빼버린 것이고 원래는 단군편이 고려사에 있었으며 영조와 그 신하들은 단군편이 있는 [원래의 고려사] 책을 보고 있는 것이고 그런데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비위를 건들지 않기 위해서 단군편을 뺀 고려사를 내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단군왕검 건국시기가 중국 요임금과 같은 시기이기 때문에 당시 천자(황제)국임을 내세우던 중국으로서는 "한국이 중국과 고대 건국시기가 같다."고 용납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러므로 중국권력의 눈치를 보느라, 대외적으로는 [단군편]을 뺀 고려사를 내세우고 조선 왕실과 조정 내부에서는 [단군편]이 있는 원래의 고려사를 본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오랜 세월 중국권력이 그들의 '중화제일주의'에 큰 위협이 되는 단군조선에 대한 기록을 없애려 압박을 해왔으며 후에 일제도 마찬가지로 단군조선에 비하면 그들의 고대사가 너무 짧고 초라하므로 '단군조선 지우기'에 극심한 공작을 했죠. 일제가 삼국유사는 없애지 않고 놔둔 것은 삼국유사에 '곰이 사람이 되었다'는 식으로 오해받을 수 있게 기록되어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곰이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곰을 상징동물로 하는 부족'이 선진문명인이 되어간 것을 기록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프로야구팀 중에 '곰을 상징동물로 하는' 팀, 베어스가 있는 것처럼 말이죠. 이 부분은 영조임금이 신하에게 "신라, 백제에서 단군왕검께 제사지낸 달을 알아오라." 했고 신라, 백제에서 1년에 2번, 2월과 8월에 제사지냈다는 것을 보고받은 내용인데요. 고구려에서 단군왕검께 제사지낸 데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라, 백제에서 제사지낸 달을 알아오라 했겠죠. 음력 2월이면 대개 양력 3월, 4월이니 농사가 시작되는 시기이고 음력 8월은 대개 양력 9월, 10월이니 추수하는 시기죠. 농사가 시작될 때 농사 잘되게 해주십사 제사지내고 추수할 때 감사의 마음으로 제사지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음력 8월은 [한가위(추석)]라 봐야겠죠.
그런데 왜 [삼국사기]에 이러한 내용이 나오지 않는가 하면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이 사대주의자였고 중국권력의 눈치를 많이 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삼국사기에 고조선과 단군왕검 관련 기록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역사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北 "조선시대 무술교본 '무예도보통지'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 (0) | 2016.07.08 |
---|---|
나사, 카자흐스탄 거대 지상화 위성사진 공개..8천년 전 것 추정 (0) | 2016.07.01 |
크리스마스 트리, 한국에서 유래됐다? (0) | 2016.05.09 |
1951년 겨울, 한반도에 크리스마스는 없었다 (0) | 2015.12.24 |
고교 교사 "내가 국정교과서 집필진" 문자메시지 파장 (0) | 2015.1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