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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욕으로 점철된 조선 왕실 여성의 삶 엿보다

기산(箕山) 2015. 7. 17. 01:23

영욕으로 점철된 조선 왕실 여성의 삶 엿보다

 

국립고궁박물관 8월 30일까지…‘오백년 역사… 왕비·후궁’ 특별전

 

 

                                                   세계일보 | 강구열 기자 | 입력 2015.07.16. 21:51 | 수정 2015.07.16. 21:52

 

 

적의는 왕비와 왕세자빈의 궁중 대례복으로 국가의 큰 제사나 혼례 때 입었던 옷이다.

1919년 만든 순종비 순정효황후의 적의에는 5가지 색깔로 화려하게 꾸민 꿩무늬 148쌍이 새겨져 있다.

적의를 입을 때 갖추는 머리 모양을 '대수'(大首)라 한다.

 

1922년 촬영된 사진 속 영친왕비는

백옥봉황꽂이, 봉황꽂이, 백옥나비 떨잠, 댕기 등으로 대수를 화려하게 꾸몄다.

 

적의와 대수는 왕실 여인들이 누린 화려한 삶의 일단을 보여준다.

그들은 그만 한 정치적·경제적 권위를 누리기도 했다.

 

 

 

 

빛이 강한 만큼 그림자도 짙었다.

자의든 타의든 권력 투쟁에 휘말려 남편과 부모를 잃었고 목숨을 빼앗기기도 했다.

누군가는 그들이 남긴 글을 보고 '피눈물의 기록'이란 감상평을 남기기도 했다.

 

국립고궁박물관이 다음달 30일까지 개최하는 '오백년 역사를 지켜온

조선의 왕비와 후궁' 특별전에 출 품된 유물들이 증언하는 왕실 여성의 삶은 복잡하다.

 

 

신정왕후의 탄생 60주년 기념 잔치를 그린 미국 LA카운티미술관 소장의 '무진진찬도병'은

국내에서 처음 전시되는 작품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 비극적 삶이 빚어낸 3대 궁중문

 

"늙은 소는 힘을 다한 지 이미 여러 해/

목이 찢기고 가죽은 뚫려 단지 잠만 자고 싶구나/

…/

주인은 무엇이 괴로워 또 채찍을 가하는가."

인목왕후가 쓴 명나라 장면의 '노우시'(老牛詩) 중 일부다.

 

선조의 계비(繼妃·임금이 다시 장가를 가서 맞은 왕비)로 국모 자리에 올랐으나

광해군 즉위 후 서궁에 유폐됐던 그녀는 10살도 안 된 아들 영창대군의 죽음까지

맥없이 지켜봐야 했던 비운의 여인이다.

 

삶이 힘겨운 늙은 소와 닦달하는 주인에게서 자신과 광해군을 보았을지 모른다.

 

'계축일기'는 인목왕후의 폐비사건이 시작된 1613년(계축년)을 기점으로 당시의 권력 투쟁,

인목왕후의 유폐 등의 비극을 인목왕후의 관점에서 서술했다.

 

특별전에는 계축일기의 다른 판본인 '서궁일기'가 전시돼 있다.



서궁일기'는 인목왕후의 비극을 담은 '계축일기'의 이본(異本)이다.

서궁에 유폐되고 아들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인목왕후의 불행한 삶은

왕실 여성이 감내해야 했던 짙은 그림자를 증언한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인현왕후의 어보는 왕비의 위세를 보여주기에 충분한 당당함을 지녔다.

1694년 인현왕후가 복위된 뒤 어보는 제작됐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어보가 드러내는 위세와는 거리가 있었다.

왕비 자리에서 쫓겨났다 제자리를 찾기까지 그녀가 걸었던 가시밭길은

'민중전행장록'('인현왕후전'의 필사본)에 기록되어 있다.

 

37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인현왕후 폐위를 반대하다 고문받고 죽은 박태보의

 이야기도 담고 있다.

'읍혈록'(泣血錄)은 혜경궁홍씨가 쓴 '한중록'의 이본(異本)에 붙은 제목이다.

이본 제목은 독자나 필사자가 자신이 느낀 감상을 제목으로 붙인 경우가 있어 다양하다.

 

한중록은 남편인 사도세자가 부왕(父王) 영조 손에 죽임을 당하고,

친정 가족들이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당한 사연을 혜경궁 홍씨가 직접 서술한 책이다.

 

읍혈록은 한중록을 피눈물의 기록으로 이해한 누군가가 붙인 제목인 셈이다.

왕실 여성의 비극을 담은 계축일기와 인현왕후전, 한중록이 3대 궁중문학으로 꼽히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로 읽힌다.

 

 

남편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굶어죽는 모습을 지켜본

혜경궁홍씨의 삶 또한 고난의 연속이었다.

사진은 홍씨가 지은 한시.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 왕의 어미였으나 왕비가 되지 못한 여인들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궁궐에서 일하는 여자종인 무수리였다.

영조가 지존 자리에 오르고도 신분 콤플렉스에 시달린 이유다.

 

영조는 자신의 약점인 어머니를 사랑했다.

재위 20년인 1744년

최씨 신주를 모신 사당을 '육상묘'로 정했고, 1753년에는 격을 올려 '육상궁'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왕의 어머니였으나 왕비는 아니었던 여인들의 신주는 종묘에 봉안되지 못하고,

따로 지은 사당에 모셨다.

 

'경우궁'(순조의 어머니 수빈 박씨), '대빈궁'(경종의 어머니 희빈 장씨) 등 7개의 사당이 있었다.

원래 각기 다른 곳에 조성되었으나 합사와 분리를 반복하다 1929년 모두 한곳에 모여

현재의 '칠궁'(七宮)을 이루게 됐다.

 

 

왕비는 아니었으나 왕의 친어머니였던 후궁들을 위해 따로 사당을 지어 혼을 기렸다.

사진은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를 모신 육상궁 내부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궁원식례'는 영조가 육상궁에서 행하는 여러 의식을 국가 전례로 정착시키기 위해 만든 책이다.

'毓祥宮'(육상궁)이란 명문을 새긴 은제 주전자는 의례를 행할 때 썼던 주전자다.

 

순조는 경우궁을 짓고 신주를 모신 과정을 기록한 '현사궁별묘영건도감의궤'를 제작하도록 했다.

경우궁의 정당(正堂)과 건물배치도, 감실 등을 채색 그림으로 표시하고 사당을 짓는 데 사용된 물목과 비용,

담당자 명단을 기록했다.

경우궁 일대를 그린 '경우궁도'도 출품돼 관람객들과 만난다.

특별전에 출품된 미국 LA카운티미술관 소장의 '무진진찬도병'(戊辰進饌圖屛)은

국내에서 처음 공개되는 작품이다.

신정왕후 탄생 60주년 기념 잔치를 그린 작품이다.

 

문정왕후가 발원해 제작된 '오백나한도'(五百羅漢圖)도 만나기 쉽지 않은 유물이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