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 알아서 탈출하라"…獨 유람선의 비극
2014-05-20 11:00
CBS노컷뉴스 임기상 선임기자
[임기상의 역사산책 30]
선장 4명은 구조되고 부녀자와 아이들만 '떼죽음'
◈ 구스틀로프호, 고텐하텐항을 출발해 마지막 항해를 떠나다
2차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1월 30일.
1만여 명의 피난민과 군인들을 싣고 독일 수송선 '구스틀로프호'는 고텐하텐항(오늘날의 폴란드 그다니아)에서 출발했다.
목적지는 아직 독일군이 장악하고 있는 북해 연변에 있는 독일 본토의 킬 항구였다.
정원이 2,200명이었던 이 배에는 동프러시아에서 소련군을 피해 도망쳐온 피난민 4,424명과 잠수함 훈련부대원 918명,
승무원 173명, 해군 여성보조근무원 373명, 부상병 162명 등 모두 6,050명이 탄 것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2~3,000명의 피난민들이 저지선을 뚫고 배에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에 대략 1만여 명이 탔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 가운데 4,500명이 젖먹이나 어린이였다.
선실은 물론이고 갑판. 수영장. 복도. 짐칸 등 어디나 피난민들이 자리를 꽉 채웠다.
선실에는 잃어버린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확성기 소리와 아기들의 울음소리가 뒤섞여 어수선하기만 했다.
나찌의 계급협조주의 철학에 따라 선실 등급을 없앤 '독일의 타이타닉' 구스틀로프호.
(사진=장백출판사 제공)
◈ 소련 잠수함 S13, 어둠 속에서 구스틀로프호를 발견하다
구스틀로프호는 북해의 포머른 해안으로부터 12해리 간격을 두고 항해하고 있었다.
어처구니 없게 지그재그 운행도 안 하고 어둠 속에서 위치표시등을 켠 채 어뢰정 뢰베호 단 한 척의
호위만 받고 있었다.
가까운 해역에서 소련 잠수함 S13의 수석 사관이 멀리서 비치는 위치표시등을 발견했다.
보고를 받은 알렉산더 마리네스코 선장은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우리 조국을 침공해 황폐화시킨 저 <파시스트의 개>를 작살내버려라"
S-13 잠수함의 선장 알렉산더 마리네스코.
이 배에 이어 독일 항해선 게네랄 폰 슈토이벤호까지 침몰시켜 영웅 호칭을 받는다.
선원들은 어뢰 4발을 발사할 준비를 마쳤다.
이들은 항구를 떠나기 전에
첫번째 어뢰에는 <어머니 나라를 위하여> 라고 썼고, 두번째는 <스탈린을 위하여>,
제3과 제4 어뢰에는 <소비에트 민족을 위하여>, <레닌그라드를 위하여>라는 헌사가 씌어졌다.
잠수함은 2시간 동안 구스틀로프호를 따라다니다 왼쪽 뱃전 쪽으로 접근해 600m 거리에서 어뢰 4발을 발사했다.
이 중 3발이 배를 강타했다.
이 때가 독일 시각으로 밤 9시 4분이었다.
◈ 아비규환으로 변한 구스틀로프호…선장과 선원들부터 탈출하다
첫번째 어뢰는 뱃머리 쪽의 일반선원실을 파괴했다.
거기서 자던 선원들은 빠져나올 수 없었다. 바닷물이 못 들어오도록 격벽을 자동으로 차단했기 때문이다.
두번째 어뢰는 갑판에 있는 풀장 아래에서 터졌다.
그 곳을 숙소로 삼았던 여성 해군 보조원 373명 중 두세 명만 살아남았다.
마지막 어뢰는 배 한가운데 있는 기관실에 적중했다.
배의 엔진이나 내부 조명, 기계 설비들이 일시에 멈춰버렸다.
200m 길이에 8층 건물 높이의 배 안에서 공포의 혼란이 일었다.
배는 1시간만에 바다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선장 4명과 선원들부터 자기 목숨을 구하는데 급급했다.
이들과 젊은 남자들이 부랴부랴 보트를 내려 사라져버렸고, 부녀자와 아이들은 내팽개겨졌다.
바다에 뛰어든 사람들은 대기 온도 영하 18도의 추위와 영하 2~3도의 낮은 수온을 견디지 못하고
30분안에 목숨을 잃었다.
4,500명에 달하는 아기와 어린이들 대부분 살아남지 못했다.
차가운 북해에 빠져 죽은 아기와 어린이들
"여자와 아이들부터 보트 안으로"라는 원칙도 지켜지지 않았고, 그저 "각자 알아서 탈출하라"는 말만 돌았다.
인근에 있는 배들이 몰려와 구조 작업을 벌였지만 1만여 명 가운데 1,200명만 살아남았다.
1,523명의 인명피해가 난 타이타닉호 참사보다 5배가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 비극의 '구스틀로프호', 어떻게 해서 태어났나?
1933년 정권을 장악한 나찌스는 모든 노동조합을 해체하고 '독일노동전선'이란 어용 노동단체를 만들었다.
나찌스는 민심을 얻기 위해 전 국민에게 국민차 폭스바겐을 보급하고, 집마다 라디오를 나눠주고,
노동자를 위한 유람선 사업을 벌였다.
이를 위해 2,200개의 객실을 갖춘 배수량 25,500톤의 초대형 여객선 건조를 서둘렀다.
떠들석하게 열린 진수식.
히틀러가 직접 참석한 가운데 당시
독일 국가 '호르스트 베셀 Horst Wessel'과
'독일이여 하나가 되라 Deutschland über Alles'가
연주되었다.
이 배의 이름은 원래 '아돌프 히틀러'호로 명명할 예정이었으나,
막판에 히틀러의 지시로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로 바뀌었다.
유태인 청년에게 암살당한 스위스 나찌스 지도자의 이름을 딴 것이다.
드디어 1937년 5월 5일 함부르크 부두에서 진수식이 열렸다.
진수식에서 독일노동전선의 책임자 로버트 라이가 연설을 했다.
"총통께서 저에게 이렇게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대는 독일의 노동자들이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조처하라.
그래야만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고,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배에는 1등급이니 2등급이니 하는 등급 구분이 없었다.
노동자들은 싼 비용으로 수영장과 수많은 객실을 갖춘 호화유람선을 타고 노르웨이나 지중해 등
휴양지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빌헬름 구스틀로프 호의 실내 사진.
수영장과 운동시설까지 갖췄다.
놀랍게도 노동자나 부유층이 이 자리를 함께 착석할 수 있었다.
전쟁이 터지자 구스틀로프호는 독일 해군에 징발되어 한동안 비무장 병원선으로 활동했다.
다음해에는 병사나 해군 수병들을 위한 잠수함 전단의 지원함으로 바뀌었다.
이때 정식 군용함이 되면서 국제법상 어뢰로 때려도 되는 목표물이 되었다.
◈ 잊혀진 '구스틀로프호'의 기억을 작가 귄터 그라스가 되살려내다
구스틀로프호의 비극을 다룬 논픽션 소설을 발표해 다시 세상으로 끄집어낸
독일의 노벨상 수상 작가 귄터 그라스. (사진=장백출판사 제공)
구스틀로프호의 참사는 역사상 최악의 해난 재난이었는데도 독일인 누구도 입 밖에 대지 않았다.
일단 정당한 군사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전쟁의 가해자 독일의 침묵이다.
독일의 집권세력은 전쟁의 발발과 살상, 파괴를 책임진다는 취지에서 구스틀로프 사건을 거론하지 않았다.
그 인명 피해에 비해 독일이 저지른 악행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뜻밖에 독일의 양심으로 알려진 작가 귄터 그라스가 이 사건을 정면으로 파헤친 소설
<게걸음으로 가다>를 발표하면서 금기가 깨졌다.
그가 참극이 발생한 후 57년만에 이 책을 발간한 것은 독일사회에 다시 일고 있는 신나찌운동 때문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독일인의 피해를 거론하기에 앞서 그 피해가 어떠한 맥락과 과정에서 일어났는가를 정확히 보라"고 주장했다.
구스틀로프호가 침몰한 해역 인근에 세워진 대형 추모 십자가.
(사진=장백출판사 제공)
서로 가해자니 피해자니 주장하지 말고 서로가 걸어온 길과 처지를 고려하고,
극단주의가 아니라 '게걸음' 같은 좌고우면이 필요하다는 제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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