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관

신라 김씨의 조상 김일제는 흉노족이었다

기산(箕山) 2014. 3. 20. 01:17

신라 김씨의 조상 김일제는 흉노족이었다

 

 

성헌식의 ‘대고구리’[고구려 강역<20>]…한사군 과연 존재했었나(8)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기사입력 2014-02-03 01:31:21

 

필자약력 

 

 ▲ 성헌식 역사 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2008년 하반기에 방영된 KBS 역사스페셜에서는

흉노 휴도왕의 태자였던 김일제(金日磾, B.C134~B.C86년)가 신라 김씨의 조상이라고 소개된 적이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근거하는 유물로는 1796년 경주에서 발견된 ‘문무대왕릉비’와

1954년 섬서성 서안에서 출토된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의 명문이 소개되었다.

문무왕비문에 따르면

“(문무왕의 조상은) 투후로 하늘에 제사지냄이 7대를 이어졌고 15대조인 성한왕이다.

(秺侯祭天之胤傳七葉...15代祖星漢王)”라고 밝히고 있으며,

또한 ‘대당고김씨부인묘명’은 이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어 한나라에서 투후(秺侯)라는 벼슬을 받았던 김일제가

신라 김씨의 조상임이 널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역사스페셜이 방영되자

많은 사람들은 흉노의 후손이 어떻게 한반도 신라 김씨의 조상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었고,

그나마 이를 긍정적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은 흉노족 김일제의 후손이 멀리 한반도 경주까지 왔다고

억지춘향 식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의구심과 해석은

신라를 한반도 경주에 놓고 보는 식민사학의 이론으로는 잘 이해가 안 되는 점이 많으나,

원래 초기 신라가 있던 산서성 남부에 놓고 해석하면 그 의문이 깨끗하게 풀린다.

 

 

▲ 높이 55cm 너비 95cm 두께 28cm의 파손된 문무왕능비. <사진=필자제공>


 

흉노는 조선대연방의 일부

 

대부분 사람들은 흉노와 조선을 별개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단군세기>에 따르면

“3대 가륵 단군 B.C 2177년 열양의 욕살 색정에게 명하여 약수(弱水)로 옮기게 하고 종신토록 갇혀 있도록 했다.

뒤에 이를 용서하시고 그 땅에 봉하니 그가 흉노의 조상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흉노는 조선의 제후로서

서로 밀접한 관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21세 소태단군 B.C 1289년 개사원의 욕살 고등이 많은 군대를 손에 넣고 서북(흉노)의 땅을 차지하고는

우현왕(右賢王)으로 임명해 줄 것을 청했다”라는 기록이 있고,

고등의 손자인 우현왕 색불루는 정변을 일으켜 조선의 22대 단군으로 등극하게 된다.

이와 같이 흉노는 곧 조선의 일부이며 한 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흉노는 중국사서에 조선이라는 나라를 대신해 기록되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진시황이 흉노를 침입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다는 것인데,

그 위치로 보아 감숙성에 있는 흉노라기보다는 당시 북부여의 남침을 견제하기 위한 장성일 가능성이 크다.


(장성 위치 참조)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2634

 

 


                                           ▲ 한나라 투후의 시조 김일제의 상. <이미지=필자제공>


 

또한 한 고조 유방을 평성의 백등산에서 포위한 주체도 흉노이고,

천하의 미인 왕소군이 흉노에게 바쳐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중국은 단군이 다스리던 조선과 북부여라는 나라이름 대신에 흉노, 동호, 예, 맥 등 종족명을

사서에 기록해 마치 이들이 조선이라는 나라와는 전혀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이 외 또 하나의 예가 바로 신라 김씨의 시조가 되는 김일제의 이야기이다.

 

김일제가 한나라로 가게 된 사연

 

한나라 무제의 처조카인 장수 곽거병은 18살 때 위청의 부장으로 흉노와의 전쟁에서 큰 전공을 세우고

21살 때인 B.C 121년 표기장군에 임명되어 다시 흉노와의 전쟁에 참전해 롱서(隴西)에서 흉노를 대파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리게 된다.

 

참고로 롱서는 진시황이 쌓은 진장성의 서쪽 기점으로 산서성 서남단 황하가 꺾이는 지점이다.

즉, 북부여의 남쪽 강역이었다.

 

 



▲ 신라 김씨의 조상 김일제의 묘비(아래 사진)와 한무제 묘역 곽거병묘 옆에 있는 김일제의 무덤.

<사진=필자제공>

 


이때 흉노 선우의 번왕(제후)였던 휴도왕(休屠王)과 혼사왕(渾邪王)이 계속 한나라에게 패배하자,

선우가 그들을 송환해 죄를 물으려 했다.

 

혼사왕은 목숨이 위험하다고 판단해 휴도왕에게 같이 한나라에 투항하자고 제의했다.

휴도왕이 이에 반대하자 혼사왕은 그를 살해하고는 혼자 투항하면서, 휴도왕의 부인과 두 아들을

한나라 장수 곽거병에게 포로로 넘겨주었다.

 

이렇게 피살된 휴도왕의 장남이 바로 신라 김씨의 조상이 되는 김일제로 그때 나이 14살이었다.

포로로 잡혀온 김일제는 처음에는 장안에 있는 마구간에서 말 키우는 노비로 있다가

일처리를 워낙 잘하다보니 한 무제의 눈에 띄어 마구간을 감독하는 마감(馬監)으로 임명되었으며,

이어 시중, 부마도위, 광록대부라는 벼슬에까지 오르게 된다.

 



▲ 감숙성 무위시에 있는 김일제의 석상(위 사진)과 안내문. <사진=필자제공>

 


김일제는 망하라가 한 무제를 암살하려는 것을 목전에서 격투 끝에 막아낸 공으로 거기장군이 되고,

무제는 일제에게 김(金)씨 성을 하사받았다.


김이란 금을 뜻하는데

김일제의 아버지 휴도왕이 금인(金人)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지냈기에 성을 김이라 했다고 한다.


이로써 김일제는 역사상 최초로 김씨 성을 가지게 되었다.

참고로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에는

“신라인이 소호금천씨의 후손이기 때문에 성을 김씨로 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김일제의 두 아들 중 한 명이 공주를 유혹하려하자, 김일제는 그 행동이 매우 불경하다고 생각해

자식을 죽이고는 한 무제에게 보고했다.

 

한 무제는 상심했지만 김일제의 충성심에 더욱 감동했고,

나중에 한 무제는 죽으면서 김일제 등 3명의 고명대신에게 어린 소제(昭帝)를 잘 보필해 달라는 유지를 남긴다.

즉, 김일제가 한나라 조정의 핵심권력에 들어간 것이었다.

 

한나라 소제는

김일제가 병들어 죽기 직전 그를 투후(秺侯)에 임명했으며 자손들로 하여금 그 관작을 세습토록 했다.

 

김일제의 무덤은 한 무제의 배장묘 가운데 하나인 곽거병의 묘 오른쪽에 있는데, 섬서성 흥평현(興平县)에 있다.

감숙성 무위시에는 김일제의 석상이 세워져 있으며 마신(馬神)이라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러한 김씨 집안의 내력이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 상세히 기록되어있다.

 

김씨 부인은 이구라는 당나라 사람의 후처로 들어가 장안에서 살다가 864년에 3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는데,

자신이 살던 섬서성 서안에서 발굴된 그녀의 묘비명에는 신라 김씨의 먼 조상이 소호금천의 후손으로

흉노 휴도왕의 태자인 김일제라고 밝히고 있다.

 


▲ 1954년 섬서성 서안에서 출토된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에는

김씨 집안의 내력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사진=필자제공>

 

“태상천자(太上天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내셨으니

이름하여 소호씨금천(少昊氏金天)이라 하는데, 이 분이 곧 우리가 받은 성씨(김씨)의 세조(世祖)이시다.

(중략)

먼 조상의 이름은 김일제로 흉노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에 투항하시어 무제(武帝) 아래에서 벼슬하시었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니 (무제가) 그를 발탁해 시중과 상시에 임명하고 투정후에 봉하시니

이후 7대에 걸쳐 벼슬하였고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경조군(서안)에 정착하게 되니 이는 사책에 기록되어 있다.

(중략)

한나라가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아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 피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은 요동(遼東)에 숨어살게 되었다."

 

<묘비명에 대한 해설은 다음 칼럼에 이어집니다>

 

 

 조선이 계승했다는 천년 기자조선은 허구다

 고구려 요서는 중국 중원 황하변 산서성 서남부

 천년 기자조선의 실체는 기씨 6제후의 130년
 북경 경유 만리장성, 명백한 ‘가짜 진시황 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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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 위만조선 찬양하는 한심한 동북아역사재단

 

성헌식의 ‘대고구리’[고구려 강역<8>]

매국 식민사학계 반도사관의 중심 ‘위만’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3-11-09 16:19:35

▲ 성헌식 역사 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우리 고대사의 뜨거운 감자인 위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여러 기록이 있다.


<북부여기> 2세 모수리 단군조에

“정미 원년(B.C194) 번조선 왕(기준)은 오랫동안 수유(須臾)에 있으면서 항상 많은 복을 심어 백성들이

매우 풍부하였다.
뒤에 떠돌이 도적떼(위만)에게 패하여 망한 뒤 바다로 들어가더니(入于海) 돌아오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위만이 공격하여 정권을 빼앗자 (기준은) 장수들과 그 좌우 궁인들과 海(해)로 가서 한의 땅(韓地)에 살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하였다.

그 후 왕계는 끊어졌지만 지금도 한 땅의 사람들은 그를 받들어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이 있다.

(衛滿所攻奪, 將其左右宮人走入海居韓地自稱韓王 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고 기록돼 있다.


<후한서 동이전>에는

“처음에 조선왕 기준이 위만에게 패해 남은 군사 수천 명을 데리고 海로 가서 마한을 공격해 깨고

자립해 한왕이 되었고 준 이후에 멸망해 마한인이 다시 진왕이 되었다.

(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滅絶馬韓人復自立爲辰王)”는

기록이 있다.



▲ 중국은 지명이동을 통한 역사왜곡으로 작았던 한나라 강역을 중국대륙 전역으로 확대시켰다(위 이미지).
중국이 그린 위만조선(아래 이미지 왼쪽) <이미지=필자제공>


 

요약 설명하자면

연나라에서 당시 국경인 패수(浿水)를 건너 번조선으로 망명한 위만이 쿠데타를 일으켜

기준 왕의 정권을 탈취하자,

위만에게 패한 기준은 추종자들과 함께 해(海)로 들어가 한(韓)의 땅으로 가서 韓(한)을 세우고

스스로 韓王(한왕)이 된다.

 

여기서의 패수를 북한의 청천강으로 인식하다보니,

海를 황해 바다로 해석하고 한의 땅을 한반도 남부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다보니 국사교과서에 삼한이 남한 땅에 그려지게 되는 것이다.



▲ 중국에 있는 패수를 잘못 설정하면 황하 북부에 있던 삼한이 한반도 남부로 들어온다.

<이미지=필자제공>



이 삼한(三韓) 중

마한(馬韓)이 백제로 발전하고, 진한(辰韓)이 신라로 발전하고, 변한(弁韓)이 가야로 발전한다는 것이

식민사학계의 반도사관 논리다.

 

그러나 기록의 ‘走入海’와 ‘入于海’라는 문구로 보아,

海는 바다가 아니라 해라는 지역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해주(海州), 해성(海城) 등과 같은 곳이다.

황해 바다로 들어가면 익사(溺死) 밖에 더 하겠는가!

 

또한 <삼국사기 신라본기> 시조 박혁거세 38년(B.C20) 2월 기록에 서라벌의 사자가 마한을 예방하니

그 왕이 꾸짖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예전에 중국 사람들 중 진(秦)나라의 난리에 시달려 동쪽으로 건너온 자가 많았는데,

대개 마한의 동쪽에 자리 잡아 진한과 더불어 섞여 살았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진나라는 함양을 도읍으로 하여 섬서성과 하남성까지만 지배했던 나라인데

그런 나라의 백성들이 어찌 한반도 남부까지 건너올 수 있으리오!

 

(참조 컬럼)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2634

 

위만에게 쫓겨난 기준이 도망간 곳이 바로 상당(上黨)으로 지금의 산서성 동남부에 있는 장치시의 장자현 일대다.

조선왕조 때 청주 한씨를 대표하는 인물인 한명회(韓明澮)의 군호가 상당군이었고,

현재 청주시에는 대한민국 청주 한씨의 본향인 상당구라는 지명도 있다.

물론 그곳은 한씨로 성을 바꾼 기준이 자리 잡았던 산서성 상당에서 가져다 심은 지명이다.

 

 

▲ 기준의 정착지인 산서성 동남부 상당은 본래 청주 한씨의 본향. <이미지=필자제공>



이후 위만은 당시 번조선의 상국이었던 북부여와 적대관계가 되어 독자정권이 된다.

 

<북부여기> 2세 모수리 단군조에

“무신 2년(B.C193) 단제께서 상장 연타발을 파견하여 평양에 성책을 설치하고 위만의 도적떼에 대비케 하였다.

이에 위만도 싫증을 느꼈는지 다시는 침범하지 않았다”는 기록과

3세 고해사 단군조에

“계축 42년(B.C128) 단제께서 몸소 기병과 보병 만 명을 이끌고 위만의 도둑떼를 남녀성에서 쳐부수고

관리를 두었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위만을 도적으로 규정했다.

 

<사기 조선열전>에서도

“조선왕 위만은 옛날 연나라 사람이다.

(중략)

점차 진·번조선과 만이(蠻夷) 및 옛 연과 제 땅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왕이 되었으며, 왕검에 도읍을 정하였다.

(중략)

요동태수는 위만을 외신(外臣)으로 삼을 것을 약속하였다.

(위만은) 국경 밖 만이를 지켜 변경을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여러 만이의 군장이 들어와 천자를 뵙고자 하면 막지 않도록 하니 천자도 이를 허락하였다.

이로써 위만은 군사의 위세와 많은 재물을 얻게 되었다.

그 주변의 소읍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과 임둔도 모두 와서 복속하여 사방 수천리가 되었다”고 기록했듯이

위만은 친조선(북부여)이라기보다는 친중국(한나라) 독자정권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위만을

기자조선을 무너뜨리고 위만조선을 세워 고조선의 정통성을 계승한 국가로 보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 아니겠는가!

 

대한민국의 사학계를 대표하는 ‘동북아역사재단’의 홈피에서 위만조선에 대해 어떻게 기술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아래를 읽노라면 마치 중국인 위만의 대변인 같은 기술이라 아니할 수 없어,

차라리 ‘중국역사재단’으로 간판을 바꾸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인용-시작)

“<삼국유사>에서는 고조선에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을 포함시켰으나,

현재 우리 학계에서는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이외에 ‘위만조선’까지 포함시키고 있다.

 

(중략)

연나라 출신의 위만이 고조선의 정권을 찬탈한 사건에 대해서도

우리 학계에서는 고조선의 지배층 일부가 교체되었음을 의미할 뿐, 국가의 정체성에는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위만의 왕위 찬탈 이후에도 ‘조선’이라는 국호는 그대로 유지되었고

정권의 고위직에 조선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상당수 포진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위만조선 역시 고조선의 일부에 포함되어야 한다.

 

위만조선은

위만을 중심으로 한 소수의 중국 망명 집단과 다수의 토착집단의 결합에 의해 세워진 나라였기에,

처음부터 고조선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고 나중에는 중국 망명인 출신들 또한

고조선인으로서 완전히 토착화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정권을 빼앗긴 준왕은 뱃길로 서해안 일대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한왕이 되었다.

위만조선은 한나라와의 교역과 중개를 통해 실력을 배양시켰고,

이렇게 하여 축적된 군사력과 경제적 능력으로 임둔과 진번 같은 소국들을 복속시켜

점차 강국으로 부상하였다.

 

위만조선의 성장은

당시 북방의 강자인 흉노와 대치 국면에 놓여져 있던 한나라로 하여금 불안감을 야기시켰고,

결국 기원전 109년 두 나라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당시 한나라는 5만여 명에 달하는 대군을 동원하여 위만조선을 공격하였는데,

위만조선의 군사력은 한나라가 근 1년이 지나서야 그것도 내분을 유도하여 겨우 승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얼마나 강성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인용-끝)

 

▲ 이미지=필자제공


이렇듯 대한민국 식민사학계가 위만조선을 찬양하는 이유는,

일제가 조선의 영원한 식민지배를 위해 단군을 신화화하고 조선의 역사를 말살하면서

이민족이 식민지배했던 역사를 확대·해석하면서부터다.

 

일본은

“조선의 역사는 이민족이 지배했던 위만조선과 한사군으로부터 시작하는 식민지배(노예)의 역사이므로,

지금의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로 자신들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려 했던 것이다.

 

그렇게 말살된 식민지배의 역사가 광복 68주년이 지나도록 안 바뀌는 이유는,

일제치하 ‘조선사편수회’에서 이마니시 류(今西龍)의 수하가 되어 우리역사를 도살하던 이병도의 후학들이

현재 강단을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제가 만들어준 거짓의 역사로 온갖 기득권을 누리면서 국민들을 우민(愚民)으로 만들고

민족혼을 말살하고 있는 중이다.

 

식민사학계는 <환단고기 북부여기>가 번조선의 정권을 찬탈한 도적으로 규정한 위만을

‘위만조선’이라 일컬으며 고조선의 정통성을 계승한 나라라고 하고 있다.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제가 조작한 위만조선과 한사군 역사의 허구가 공론화되고 국민들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이 나라의 미래가 활짝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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