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탐방

탈춤의 역사

기산(箕山) 2014. 2. 26. 01:07

탈춤의 역사

 

1. 상고시대의 탈춤

 

원시적 종교의식에서는 탈과 춤이라는 이중의 주술에 의하여 초인간적 존재로 변모하려고 하며

종교적 감정과 정서를 표현하고 강조하는 방법으로 탈과 춤이, 보편적, 필수적으로 사용 되었다. 

극적요소로서의 탈보다는 신격화로서의 탈의 기능과 그에 수반되는 춤의 행위를 탈춤의 기원으 로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삼국지위지동이전의 기록에,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예의 무천,마한의 춘추제등

고대제의에서 "연일음주가무"하였다고 하며 현재 남아 있는 강릉의 관노놀이나하회별신굿 등의 유산에서,

또한 각종 탈놀이에서 보이는 무속적 요소에서 상고시대의 주술성을짐작할 수 있겠다.

 

 

2. 삼국시대의 탈춤

 

1). 고구려

평양 부근에 남아있는 고분군의 벽화 중에서 안악 제 3호분 동수묘 후실의, 무악도에 있는 외국출신으로

보이는 무용수는, 탈을 쓴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인데, 고려사악지 삼국속악조에는 고구려악 으로

[來遠城 (내원성)], [延陽 (연양)], [溟州 (명주)] 의 3종만 기재되어 잇으나 당시 중국을풍미하던

서역악(西域樂) 즉 악기 뿐 만 아니라 탈춤까지 섭취한 것으로 보인다.

서역악은 북주(557-580)대에 이르러 채용하였는데 6세기 후반부터 7세기 후반까지 고구려악의전성기라고 할 수 있겠다.

고구려악에 대해서 수서 음악지는 지서가와 가지서무가있음을 말하였고,

당의 십부기중 고려기에는 호선무와 광수무가 들어 있는데, 이러한 악무들은 서역계로 조선조에까지 이른다.

한편 일본 우방악, 즉 고마가꾸 24곡중 신도리소, 고도리소, 신쇼오꾸, 다이쇼오꾸 등 12곡은 탈춤으로 고구려악만은

아니지만 고구려악을 비롯한 삼국악( 三國樂 ) 추정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2). 백제

백제의 가악은 고려사악지에 선운사, 무등산, 방등산, 정읍, 지리산의 5종이 기재되어있고,

일본서기에는 서기 612년에 백제인 味摩之(미마지)가 오국에서 배운 기악을 일본에 전하였다 하는데,

기악에 사용된 7-8세기의 탈이 200여개나 일본에 남아 있다.

 

3). 신

신라악은 검무, 무예무, 처용무, 오기 등이며, 이중 무예무는 탈춤이 아니다.

 

㈎ 검무

이명, 황창무라고도 하는 검무는 처용무와 더불어 궁중에서 연희된  것으로,

신라 품일 장군의 아들인 관창이 전사한 것에서, 그 이름이 와전된 것이며,

"신라의 황창랑이라는 7세 소년이 검무를 빙자하여 백제왕을 죽이고 피살되었으므로

이를 슬피 여긴 신라인들이 그 모습을 탈로 본떠 쓰고 그의 춤을 흉내내어 추었다." 는 유래를 갖고 있다.

이후 이 춤은 탈이 없어지고, 칼도 무구화된 돌리는 칼을 쓰게 되었다.

 

㈏ 처용무

처용무는 궁중에서 잡귀를 쫓는 나례의 중심 의식무이며, 궁중의 연락무로, 외국사신의접대연에도 추어졌던

가면정재무이며, 왕조의 교체를 불구하고 신라로부터 조선조에까지 계승되었다.

그 유래에 관하여는 제 1과 [탈 이야기]에서 다루었으므로 자세한 설명은 생략 한다.

처음에는 독무였던 것이 뒤에 오방처용이라하여 다섯명이 추게 되었다.

 

㈐ 오기

오기란, 최치원의 절귀시 향악잡영오수에서 읊은 다섯가지의 놀이인 금환, 월전, 대면,  속독, 산예를 뜻한다.

금환은 곡예의 하나로 농환(공 여러개 던지기), 환검(칼 던지기), 도비환( 비수 여러개 던지기) 등에 해당하며

농환은 금칠한 공을 사용한다.

월전은 서역에서 전해진 탈춤의 일종인 듯  하고, 대면 역시 탈춤으로 구신을 쫓는 구나무의 일종이다.

속독은 타슈겐트와 사마르칸트 일대의 소그드 제국에서 전래한 건무의 일종으로,

최치원의 싯귀 중 "쑥대 머리 파란 얼굴" 의 표현을 보건대 귀면형의 색다른 탈을 쓴 것 같다.

산예는 사자춤이다.

 

 

4. 고려시대의 탈춤

 

㈎ 산대잡극

고려사예지에 태조 원년(918) 음력 11월에 신라의 유습을 부활하여 팔관회를 열었는데,

유등과 향등을 설치하고 다섯 길이 넘는 채봉을 설치하여 백희가무를 보였다.

그 내용은 [사선악부, 용봉상마거 선]인데, 용봉상마거선은 팔관회에서 연희된 산악잡희의 내용으로,

용놀이와 봉황무, 끼리놀이 등 동물로 분장한 탈춤과, 수레놀이, 뱃놀이 같은 것이다.

이색은 이 가무백희를 집약하여 읊은 시에서 [산대잡극]이라 부르고 있다.

 

㈏ 나희

가례인 연등회나 팔관회에는 채붕을 시설하고 가무백희를 놀았는데, 흉레인 나례에서도 채붕은없지만

가무백희를 놀았던 것이 이색의 시 [구나행]에 나타나 있다.

나례는 탈을 쓴 사람들이 창이나 방패를 들고 주문을 외며 귀신을 쫓는 동작을 행하는 행사로 일종의 탈놀이다.

이 외에도 고려조의 탈놀이는 호한잡희, 가면인잡희, 걸호희, 당인희등 다양한 것이 있다.

 

 

5. 조선시대의 탈춤

 

㈎ 산대 나희

조선시대에 들어 산대는 나례, 나휘, 산대나례, 산대잡희 등의 명칭으로 혼용되었고, 종류도 다양해졌으나

기본적으로는 고려의 산대잡극이나 나희와 큰 차가 없다.

여사때의 산대놀이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명 사신인 동월의 시 [ 조선부] 로

평양, 황주, 서울 광화문 등에서 본 산대 놀이는 불 삼키기, 만연어룡지희 같은 어룡의 탈춤, 무동타기, 줄타기, 답교 등

산악백희와 사자, 코끼리 등의 가상의 진열이다.

또한 성현의시 [ 관나시 ] 에는 채붕을 설치하고 울긋불긋한 옷을 입 은 무용수가 난무하는 모습이나

농환, 줄타기, 꼭두놀음, 솟대놀이 등을 읊고 있다.

 

㈏ 학연화대처용무합설

신라 이래의 처용무는 조선 말 순조조까지 역대 구나와 진연에서 추어 왔는데

성종때 이룩된 악학궤범에 보면 학연화대처용무설로서 일종의 가무극으로 종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학은 청학과 백학이, 혹은 백학 한쌍, 혹은 황학과 청학 등의 변형이 있고, 처용도 의상만 다섯 색이었으나

탈도 오방색을 쓰기도 하였다.

연에는 두 동녀가 들어 있어 학이 부리로 연을 쪼면 연꽃이 터지며 동녀가 나와  춤을 춘다.

 

 사자춤

조선시대의 사자춤은 신라 이래의 전통이 지방의 민속무로 남았다가 고종 24년에 궁중무로채택되었고,

비방관인의 잔치에는 일찍부터 추어졌다.

이외에도 조선시대의 탈춤으로는 풍두무라는 것이 있어, 왕이 직접 탈을 쓰고 놀았다고 하나 알 길이 없고,

민간의 남사당 또는 걸립패, 대광대패라고도 불리는 곡예인들이 추었던 꼭두각시놀음이나 탈놀음(덧뵈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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