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뱃재 털고 침 뱉은 물 맞으며 촬영했다”
등록 : 2013.08.13 20:04 수정 : 2013.08.14 14:23
지난달 3일 방영된 <한국방송>(KBS) 드라마 <칼과 꽃> 1회에서 보조출연자들이 비를 맞고 저잣거리를 걷는 장면.
방송화면 갈무리
[사회 쏙]
차별받는 드라마 보조출연자
“맞지 마세요! 더러운 물이에요!”
다급한 외침에 주연배우 ㅇ씨는 움찔했다.
지난 6월19일 <한국방송>(KBS) 사극 <칼과 꽃> 촬영이 한창이던 전남 완도.
왕족 역을 맡은 ㅇ씨가 저잣거리에서 돌계단을 타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데,
평민들은 비를 맞고 걸어다니는 장면을 촬영중이었다.
ㅇ씨의 어깨에 빗물이 떨어지는 찰나, 한 스태프가 급히 소리를 지른 것이다.
스태프들은 ‘더러운 물’ 대신 ㅇ씨의 어깨에 깨끗한 물을 뿌려 비에 맞은 듯 연출했다.
평민으로 분장한 채 비에 젖은 보조출연자 ㄱ씨는 허탈했다.
“인간적 모멸감을 느꼈어요.
배우 뒤에서 수많은 엑스트라들이 비 내리는 장면을 찍으며 흠뻑 젖어 있는데,
‘더러운 물’이라고 소리 지르니 기분이 어땠겠어요?”
지난 7월3일 방영된 <칼과 꽃> 1회에는 비 내리는 저잣거리 장면이 유독 많다.
모두 6월15~20일 완도에서 촬영된 것이다.
이때 동원된 보조출연자는 80여명.
이들 가운데 남성 2명과 여성 11명 등 13명은 마지막 촬영을 하루 앞두고 서울로 돌아와버렸다.
‘더러운 물’에 집단 항의한 것이다.
“촬영을 위해 임시로 콘크리트를 부어 막아놓은 계곡 물을 보조출연자들이 비 맞는 장면에서 썼습니다.
스태프들이 거기에 담뱃재를 털고 침도 뱉었는데….”
“배우들이 실내에 들어가고 보조출연자들이 뒤에서 비를 맞는 장면을 찍을 때
살수차와 연결된 호스를 (계곡물이 나오는 호스로) 바꿔 끼우는 것을 봤어요.
스태프들이 ‘엑스트라들만 찍을 때 내리는 비는 마시면 안 되고, 연기자 쪽 물은 괜찮다’고 말하는 것도 들었고요.
어깨에 떨어지는 물에선 확연히 냄새가 났어요.”
보조출연자 80여명 가운데 8명을 <한겨레> 취재진이 개별적으로 만나본 결과
비 내리는 장면에서 더러운 물이 사용됐다고 증언했다.
이 가운데 5명은 가려움증을 호소했다.
5명 중 3명은 피부과·이비인후과 등을 찾았고, 1명은 촬영장 숙소에서 지네에 물려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았다.
당시 서울로 돌아온 ㄴ씨는 발바닥부터 발등까지 무좀 같은 것이 하얗게 피어나 피부과를 찾았다.
의사는 곰팡이균이 생겼다고 했다.
ㄴ씨는 6만원을 들여 두차례 치료를 받았다. 그가 두차례 밤샘 촬영을 포함해 받은 5일치 출연료는 30만6000원.
하루는 새벽 2시까지 찍고 2시간 자고 4시에 일어나 촬영했고,
또 하루는 밤 11시께 촬영을 마치고 다음날 새벽 4시에 일어났다고 한다.
병원 치료를 받은 ㄷ씨는
“마지막 촬영을 하루 앞둔 19일 저녁 8시께 현장 식당 앞에서 엑스트라 10여명이 항의했고,
여성 제작진 한명과 엑스트라들을 담당하는 현장 반장이 ‘내일은 살수차를 뿌려주겠다.
도와 달라’며 사과했다”고 전했다.
지난 6월 ‘칼과 꽃’ 촬영장
“주인공에 살수차 물 뿌리더니 보조출연자들 악취나는 물세례”
나중에 피부병 걸려 생고생
제작사 “모두에게 살수차 물 뿌려”
엑스트라 박희석씨 죽음 뒤에도 처우개선 부족에 쓸쓸한 눈물
일부 보조출연자들은 자신들의 출연 여부를 결정하는 기획사나 방송국을 의식한 듯
물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꺼렸다.
ㄹ씨는 “물을 따로 썼다.
한 장면에서는 주연배우도 그 물을 맞기는 했다. 더는 말을 못 하겠다”며 입을 닫았다.
다리에 반점이 생겨 1주일간 피부과를 다닌 ㅁ씨는
“제작진이 사과했는데 더는 문제 삼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ㄹ씨는 이후 문계순 전국보조출연자노동조합 위원장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ㄹ씨는 문자메시지에서 “그렇지 않아도 요시찰 인물이라 주목받고 있는데,
비겁하지만 나도 공개적으론 몸이 사려집니다”라고 경계했다.
보조출연자들의 숙소도 열악했다.
ㅂ씨는 6월20일 새벽 4시께 잠에서 깨어났다. 손바닥만한 지네가 ㅂ씨의 오른쪽 쇄골 아래쪽을 물었다.
제작사가 마련한 완도의 숙소에선 지네와 노래기가 득실거렸다.
ㅂ씨는 완도 대성병원에서 ‘지네 및 유독성 노래기와의 접촉’ 진단이 내려져 응급치료를 받았다.
ㅂ씨는 지금도 두통과 복통으로 인천의 한 병원에 입원중이다. 지난달 16일엔 산업재해 인정도 받았다.
5일간 ‘비’를 맞은 이들에게는 한벌의 한복만 주어졌다.
보조출연자들은 매일 더러운 물에 젖은 한복을 지네 등이 나오는 숙소 바닥에 깔아뒀다
덜 마른 옷을 다시 입고 촬영에 들어갔다.
제작진은 보조출연자 13명이 마지막 촬영 전날 집단 이탈에 나선 뒤에야 다음날 새 한복을 지급했다.
보조출연자노조는 7월3일 드라마제작사 ㄹ사에 항의 공문을 보냈다.
“보조출연자에게는 계곡에 고여 있는 물을, 연기자에게는 살수차의 깨끗한 물로 살수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어이없음을 분개하였다.”
그러자 제작사는
“보조출연자들이 발진 및 가려움증을 호소하여 피부연고를 제공했으며 가려움은 짚신과 버선이 젖어
발생한 일로 보인다. 연기자와 보조출연자 모두에게 살수차에서 뽑은 물을 뿌렸다”고 주장했다.
한국방송과 보조출연자 기획사의 반응은 엇갈렸다.
<칼과 꽃>에 보조출연자들을 동원한 ㄱ사의 정아무개 본부장은
“사극 촬영을 하느라 당시 말이 돌아다니며 똥도 쌌기 때문에 계곡물이라도 오염될 가능성이 높았다.
일종의 황톳물이다. 그 물을 촬영 때 사용한 것은 맞지만 나중에 제작진이 사과했다.
다만 그 물을 (주연급) 연기자에게도 사용했다”고 해명했다.
정 본부장은 이후에 “더러운 물은 바닥과 건물에만 뿌린 것”이라고 말을 바꿨다.
이건준 한국방송 책임프로듀서(CP)는
“더러운 물을 사람에게 쓰지 않고, 바닥과 지붕에만 뿌렸다. 보조출연자들이 잘못 말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
<한국방송> 드라마 <각시탈> 촬영 중 사망한 보조출연자 박희석씨의 추모제가 지난해 9월24일 서울 여의도 태양기획 앞에서 열리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
지난해 4월 한국방송 드라마 <각시탈>의 보조출연자 박희석씨가 차량 전복 사고로 숨진 뒤
보조출연자들의 열악한 처우에 대한 문제제기가 꾸준히 이어졌지만, 현실은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드라마 <칼과 꽃> 촬영 현장은 차별적인 현실의 한 단면이다.
지난 6일 밤 10시30분.
<칼과 꽃> 경북 문경 촬영장에서 돌아온 보조출연자 5명은 한국방송 별관 주차장에 있는
보조출연자 대기실의 열쇠를 받기 위해 안내데스크를 방문했다. <한겨레> 취재진도 함께 있었다.
이 대기실은
박희석씨가 숨진 뒤, ‘보조출연자 처우 개선’ 차원에서 촬영과 촬영 사이 휴식하는 공간으로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보조출연자들은 열쇠를 줄 수 없다는 경비원과 입씨름을 벌여야 했다.
“대기실 문을 열기 위해선 보조출연자 기획사 반장의 주민등록증이 있어야 합니다.
아니면 반장이 이쪽으로 전화를 주든지요.”
“반장은 촬영장에 주로 있는데 그게 말이 됩니까. 반장과 통화만 되면 문을 열어주는 것이 확실해요?”
“반장과 통화가 되면 문을 열어 줄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어요.”
보조출연자들은 8시간이 넘는 촬영을 마치고 2시간이 걸려 한국방송에 왔지만
대기실에 들어가지 못한 채 별관 앞 나무의자에 앉아 담배만 피우다 돌아갔다.
보조출연자들의 노조 활동 또한 고소 등으로 압박을 받는다.
박희석씨를 파견했던 태양기획의 이아무개 대표는 문계순 보조출연자노조 위원장을
명예훼손 및 업무방해 혐의로 서울 영등포경찰서에 고소했다.
“지난해 9월부터 다섯달 동안 박희석씨 사망에 책임지라는 집회를 열 때 악의적인 현수막을 이용했다”는
이유에서다.
문 위원장은 지난달 28일 조사받았고, 박씨의 유가족도 참고인 조사를 받았다.
경찰 관계자는
“명예훼손은 기소 의견으로 송치될 가능성이 있지만 확정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태양기획 이 대표는
“집회로 누적 30억원의 매출 손실이 나고 개인적으로도 인격살인을 당해 고심 끝에 고소했다”고 말했다.
보조출연자들은 자신들의 출연 여부를 결정하는 기획사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일부 기획사 직원은 보조출연자들의 쥐꼬리만한 월급 중 일부를 상납받기도 한다.
태양기획의 한 직원은 보조출연자에게 정기적으로 상납을 받다 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기도 했다.
‘방송사-제작사-기획사’로 이어지는 먹이사슬의 밑바닥에서 신음하는 보조출연자들의 설움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박유리 기자 nopimuli@hani.co.kr
'사회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확정일자'받고도 7천만원 전세금 떼인 50대男 (0) | 2013.08.24 |
---|---|
"선풍기도 못 돌려" 그늘에 만든 '태양광 발전' (0) | 2013.08.16 |
피와 눈물 위에 세운 '황금의제국' (0) | 2013.08.11 |
환경장관이.. "낙동강 녹조, 예방조치 말고 놔둬라" (0) | 2013.08.09 |
<액티브> 숫자로 보는 지하철..승·하차 많은 전철역은? (0) | 2013.08.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