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한국가수 한류의 시발점... '라이프'지에 소개된 "김 시스터스"
아시아 최초의 빌보드에 오른 가수가 바로 한국의 걸그룹인 김 씨스터즈 입니다.
김 씨스터즈가 부른 '찰리 브라운'은 미국 곡이지만 자기 스타일대로 영어로 불러서
62년도에 빌보드 메인챠트 6위까지 올랐습니다.
김 씨스터즈는 50년대 말에 결성된 3자매로 이루어진 10대의 천재 여성그룹으로서,
아이들 그룹의 성격으로 만들어진 그룹인데 공식적으로 세계 최초의 여성 아이들이라는 소릴듣는
미국의 모타운 레이블 소속으로서 다이애나 로스가 이끌었던 3인조 흑인 여성그룹인 슈프림즈 보다도
오히려 한국의 걸그룹인 김 씨스터즈가 더 먼저 탄생했습니다.
우리나라가 작고 힘이 없다보니 그걸 인정못받고 아티스트로 인정받는 아이러니함이 발생하는군요 ㅎㅎ
아무튼 김 씨스터즈는 10대의 어린 나이임에도 멤버 각자가 피아노, 키타, 실로폰, 드럼, 하모니카,
탬버린, 섹소폰 등 무려 28가지의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뛰어난 가창력과 무대매너로
한국뿐 아니라 미국에 도전해서 왕성한 활동을 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대단히 자랑스러운
아시아 역사상 최고의 전설적인 걸그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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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전 미국에 불어온 한류
- 라이프 지에 소개된 김 시스터스 -
50년 전의 한국, 참 가난하고 살기가 힘들었다.
같은 동족인 북한에게 호되게 당한 침략전쟁은 신생 대한민국을 제대로 걷기도 힘든 중병환자를
만들어 놓았다.
그때 한국 사회를 한 단어를 표현하자면 암울, 좌절, 무기력, 열등의식 등이었다.
국제사회에서도 한국은 그저 전쟁, 빈곤, 고아, 혼란의 단어부터 연상되는 후진국중의
후진국으로 보고 있었다.
1957년, 닐리리 열창 - 어쩐지 어머니 이난영 여사를 연상케 하는 한국적인 정서의 섬세하고 여성적인 창법을 쓴다.
1959년, 이 어둡고 우울한 한국에서 홀연 날아온 세 마리의 참새 같은 어린 자매들이 미국 사회를 뒤 흔들었다.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고 이 난영 여사와 납북된 작곡가 김 해송씨의 사이에서 태어난 숙자, 애자와
이난영 여사의 오빠 딸인 민자, 세 자매들로 구성된 김 씨스터스다.
맏이 숙자가 17살, 동생 애자가 15살, 민자가 17살인 모두 성인도 안된 틴에이저들이었다.
남편이자 집안의 기둥이던 작곡가 김해송이 납북되자
이난영은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예능에 재능을 보이는 딸들을 엄격하게 교육시켰다.
원래는 맏딸 영자가 리더였으나 키가 너무 커서 이난영 오빠의 딸인 민자를 대신 합류시켰다.
김 씨스터즈는 1953년 국내 무대에 데뷔했다. 그러나 곧 주한 미군 무대로 자리를 넓혀갔다.
김 씨스터즈는 미군 무대에서도 최고 인기 가수가 되었다.
국내 무대와 미군 무대를 넘나들며 정상의 인기를 누리던 이 자매들의 유망성을 미국 라스베가스 연예계의
한 매니저가 알아보고 미국으로 초청했다.
1959년 1월 9일 이들 어린 자매들은 가족과 떨어져서 사흘이나 걸려서 미국에 도착했다.
그들의 활약은 라스베가스의 호텔들에서였지만 큰 반향을 일으켰다.
동양의 가난한 나라에서 날아온 자매들이 단순히 노래만 잘하는 수준이었다면
그저 라스베가스 업소들을 전전하다가 몇년 뒤 한국으로 돌아오는 코스를 밟았을 것이다.
그러나 김 시스터스들이 내놓은 재능은 그저 가창력 하나만이 아니었다.
춤도 잘 추었고, 28개나 되는 수많은 악기들을 다룰 줄 알았다.
더구나 이들 재능과 이국적인 동양의 매력을 교묘히 컴비네이션 시켜서 분위기를 휘어 잡는
비상한 엔터테이너적 재주도 있었다.
여기에 연습으로 하루를 다 보내는 성실한 자세도 밑받침 되었다.
김 시스터즈는 자기들의 다양한 재주로서 한 시간 정도의 공연을 간단히 소화할 줄 알았다.
라스베가스에서 싹이 튼 이들의 인기는 전 미국에 전파되었다.
미국 순회 공연도 자주 했으며 여러 TV에도 출연했었다.
김시스터스의 인기는 미국의 최고 인기 주말 쇼 프로그램인 에드 서리반 쇼에 무려 22번이나 출연하게 했다.
권위 있은 '라이프' 잡지는 김 시스터스를 크게 소개하기도 했다.
이들이 부른 '찰리 브라운'이 빌보드 인기 차트에 오르는가 하면
보브 호프의 월남전 위문단에 멤버로 참여하여 미군들을 즐겁게 하기도 하였다.
김 시스터의 대활약은 전쟁과 가난으로만 알려진 한국의 이미지를 비약적으로 향상 시켰을 뿐더러
암담했던 한국민들에게 기쁨과 자신감을 주었다.
매스컴이 발달되지 않아 지금 김연아의 보도처럼 열광적인 센세이션은 없었으니
신문마다 이들 자매의 활동을 보도했었다. 전국민의 열성적인 성원이 이들을 뒷받침했다.
김 시스터스의 인기에 힘입어 여러 한국인 가수들이 미국에 진출하였다.
윤복희[코리아 키튼즈]나 김치 켓츠나 패티 김과 김 시스터스 남동생들로 구성된 김 보이스가
줄을 이어 미국에 데뷔했다.
김 시스터스야 말로 한류의 원조이다.
더구나 50년이나 지났지만 그 긴 세월동안 이렇게 어린 나이에 미국 무대에 등장해서
이 정도의 큰 사랑을 받은 한류 스타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이들은 80년대까지 활동을 했었다. 70년도부터 한국에도 가끔 와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자매들 모두 세월이 흘러 지금은 70을 바라보는 춘추가 되었다.
막내 동생 애자씨는 1987년 폐암에 걸려 세상을 떠났으나 언니 숙자씨는 미국에,
민자씨는 남편을 따라 헝가리에 생존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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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곡은 영어로 불렀지만 중간에 한국말로 코믹하게 부르는 부분도 있습니다 ㅎㅎ
아무튼 미국곡이 원곡이지만 아시아 가수 최초로 그것도 10대의 어린 걸그룹이
빌보드 싱글챠트에 오른 가수가 한국 가수인게 그 사실이 대단한겁니다.
그것도 팝적인 세련된 음악으로 말입니다.
곡세션에 섹소폰 연주랑, 드럼 키타 전부다 그 모든걸 저 분들이 직접 연주하고 부른겁니다.
나이가 겨우 17살 내외인 어리디 어린 소녀들인데도 저 시원스런 보컬과 탁트인 발성,
본토 흑인가수 저리가라할 정도의 그루브.
그리고 절묘한 하모니, 등등 한마디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의 대단한 실력입니다.
그 당시 동양의 어린 십대소녀들이 저런 실력을 보였다는건 역시 한국인만의 위대한 음악적 능력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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