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노래
타이틀이 거창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원자폭탄으로 도시 하나를 순식간에 박살내버리거나
멀쩡한 강바닥을 파내서 생태계를 초토화시키는 정도쯤이나 되야 세상을 바꿨다고
얘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설득할 생각은 없다.
다만, 노래가 세상을 바꾸는 방식은 투표의 작동원리와 비슷하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을 뿐이다.
한 장의 투표권이 공동의 지향과 만남으로써 세상을 (좋게든 나쁘게든) 바꾸는 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하나의 노래는 대중의 정서와 호응함으로써 한 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규정하는 이정표로 우뚝 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세상을 바꾼 노래'들을 주목했다.
당초 1900년대 초반부터 시작하여 20세기 전체를 아우르는 기획으로 준비했으나,
여러 가지 현실적인 여건의 제약으로 여기서는 1970년 이후 발표된 노래들을
시대순으로 소개하기로 했다는 점도 밝혀둔다.
더불어, 여기에 미처 소개하지 못하는 노래들은 언젠가 다른 방식으로
독자 여러분을 찾을 것이라는 약속도 함께 드린다.
샌드 페블즈 '나 어떡해' (1975)
가요계의 공백을 메운 캠퍼스밴드 전성시대의 서막
지금까지 이 코너를 계속 봐온 독자들이라면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말을 발견했을 것이다.
바로 '대마초 파동'과 '가요정화운동'이다.
이 말들이 지금까지의 글들에 거의 모두 등장했다는 건 그만큼 큰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일 것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1970년대 대중음악계에 가장 크고 강력한 영향을 끼친 건,
음악인이 아니라 이 나라의 대통령이었고 이 나라의 어처구니없는 정책이었다.
그 어처구니없는 정책은 1970년대 중후반의 대중음악계를 공백으로 만들어놓았다.
남아있는 음악인은 몇 없었고, 그나마 발표되는 노래들은 심의에 의해 난도질되기 일쑤였다.
그런 상황에서 1977년 처음 열린 대학가요제는
정부와 대중음악계 모두의 필요에 만들어진 행사였다.
정부의 입장에서는 대학생들의 건강한 이미지를 이용해 대중들의 관심을 돌릴 필요가 있었고,
대중음악계의 입장에서는 공백 안에 집어넣을 새로운 얼굴들이 필요했다.
대학가요제는 그렇게 '관제행사'라는 오명 속에서
실제로 젊고 재능 있는 음악인들을 배출해낸 희비극의 현장이 되었다.
1977년 9월, 정동에 있던 문화체육관에서 대중들의 관심을 모으며 첫 대학가요제가 열렸다.
그날의 주인공은 샌드 페블즈(Sand Pebbles)였다.
샌드 페블즈는 1970년 처음 결성돼 이수만(2기)과 산울림의 김창훈(5기) 같은 음악인을 배출해낸
서울대학교 농대의 캠퍼스 밴드였다.
김창훈은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후배인 6기 샌드 페블즈에게 대학가요제 참여를 권유한 이도,
또 대상 수상곡인 '나 어떡해'를 만들어준 이도 김창훈이었다.
(김창훈 역시 형 김창완과 함께 '문 좀 열어줘'로 참여했지만 졸업생이었던 김창완의 신분 때문에,
혹은 '문 좀 열어줘'를 이해하지 못한 심사위원들 때문에 떨어졌다는 뒷얘기가 있다).
대학가요제라는 행사 자체도 그랬지만, 샌드 페블즈의 대상 수상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각 대학마다 하나씩은 있었던 캠퍼스 밴드의 존재를 대중들에게 처음 알린 의미가 가장 컸다.
그 전까지 대중들이 알고 있던 그룹사운드는 야간업소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프로페셔널한 집단이었다.
그렇기에 캠퍼스 밴드들은
대중들이 알고 있던 그룹사운드의 능숙한 연주력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미숙했고
지극히 아마추어적이었다.
가요제가 배출한 최고의 스타 밴드 송골매가 음악생활 내내 가졌던 연주력에 대한 열등감이
이를 잘 증명해준다.
하지만 샌드 페블즈라는 캠퍼스 밴드에겐 아마추어리즘이 주는 풋풋함과 순수함이 있었고
대학생 특유의 건강함이 있었다.
거기에 김창훈이 만들어준 곡 자체의 매력이 있었다.
첫 행사에 김창훈 같은 뛰어난 음악인의 노래가 제출되고 또 대상까지 받게 된 건 '신의 한 수'였다.
대학가요제와 샌드 페블즈, 그리고 '나 어떡해'는 대회 다음날부터
대중들의 입과 귀에서 계속해서 오르내렸다.
이 놀라운 반응은 이후 일반 대학생들뿐 아니라
각 대학의 캠퍼스 밴드들이 각 가요제에 앞다퉈 참여하게끔 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이듬해 항공대학교 밴드인 활주로로 해변가요제에 참여하며 음악인의 길을 걷게 되는
배철수의 이 증언은 그래서 중요하다.
샌드 페블즈는 의도치 않게 캠퍼스 밴드 출신들의 그룹사운드 전성시대를 열게 하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더 넓게는 각 대학에 있던 재능 있는 청년들을 가요제 무대로 이끌었다.
한번 뒤집어진 청년문화의 또 다른 시작이었던 셈이다.
가요제를 통해 등장한 음악인들의 이름과 노래들을 일일이 거론하진 않겠다.
그들은, 그리고 그 노래들은 그렇게 대중가요계의 공백을 하나둘 메워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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