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관

예종 시대 최대의 옥사 남이의 역모사건

기산(箕山) 2011. 10. 7. 04:26
                                                                                                         山寺愛人 2009.06.09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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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기간이 14개월밖에 안 된 예종 대에도 대대적인 숙정 작업이 있었다.

이 숙정 작업은 한명회, 신숙주 등의 승정원 원상 세력이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등장한 신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남이, 강순의 역모 사건'으로 불린 이 사건으로 약 30명의 무인 관료가 죽고

그 가솔들이 노비로 전락했다.

 

이 사건의 주모자로 알려진 남이는

태종의 넷째 딸 정선공주의 아들로서 무과를 통해 등용된 인물이다.


그는 세조 시대 최대의 위기를 몰고 온 이시애의 난(1467년)을 평정한 공으로

적개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이어서 건주야인을 토벌한 전공으로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공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하였고, 병권의 수장 병조판서에 올랐다.


하지만 1468년 세조가 죽자 그는 한명회, 신숙주 등의 노골적인 견제를 받기 시작했다.

그들이 강희맹, 한계희 등의 훈구 대신들의 입을 통해

남이가 병조판서를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비판하자, 예종은 그를 병조판서에서 해임하고

겸사복장직에 임명했다.


예종은 원래 남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무예에 뛰어나고 성격이 강직할 뿐 아니라 세조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던 그에 비하면,

예종은 유약하고 정사 처리에도 능하지 않았으며 세조의 신뢰도 두텁지 않았다.


예종은 그 때문에 촌수로 당숙뻘이나 되는 남이를 시기하고 질투했다.

그래서 훈구 대신들이 그를 비판하고 나오자 즉시 병조판서직에서 해임시켜버렸던 것이다.


남이가 병조판서에서 겸사복장직으로 물러났을 때 하늘에 혜성이 나타났다.

남이는 이 광경을 보면서

'혜성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몰아내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징조'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당시 병조참지로 있던 유자광이 이 말을 엿듣고

예종에게 남이가 역모를 꾀하려 한다고 고변해 그를 역신으로 몰아버린 것이다.


유자광은 서얼 출신으로 남이와 마찬가지로 이시애의 난에서 공을 세워 등용된 인물로

모사에 능하고 계략에 뛰어난 자였다.

그래서 자신과 함께 공을 세운 남이가 세조의 사랑을 더 많이 받는 것을 시기하고 있다가

마침 남이가 병조에서 밀려나자 그를 완전히 제거해버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유자광의 모함으로 졸지에 역모자로 전락한 남이는 즉시 의금부로 잡혀가 문초를 받았다.

이 때 증인으로 나온 유자광은

남이가 '혜성의 출현은 신왕조가 나타날 징조로서 이 때를 이용하여

왕이 창덕궁으로 옮기는 시간을 기다려 거사하겠다'는 말을 했다고 진술했다.


유자광은 또

남이의 측근인 순장 민서도 남이의 집에서 북방 야인들에 대한 방어 계획을 논의할 때,

'요즘 같은 천별은 반드시 간신이 일어날 징조이니 자신이 먼저 고변당할까 봐 두렵다'고 말하며

'그 간신은 한명회'라 했다고 덧붙여 진술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남이 측근들에 대한 문초는 강해질 수에 없었는데

이 과정에서 당시 남이와 함께 겸사복장으로 있던 문효량이 역모를 시인했다.

문효량은 여진 출신 장수로 남이와 함께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인물이었다.


문효량은

'언젠가 남이의 침소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 때 남이는 하늘의 변화를 기화로

간신들이 모란할 징조가 엿보이므로 자신과 함께 이들을 몰아내 나라에 은혜를 갚자는 제의를 했으며,

그리고 이 거사에 영의정 강순도 뜻을 함께 하고 있으니 왕이 산릉에 갈 때 도중에

두목격인 한명회 등을 제거한 다음 영순군과 구성군을 몰아내고 자신이 왕이 되겠다고 했다'고 진술했다.


문효량의 이 진술은 남이로 하여금 역모를 시인하게 만들었다.

버텨봐야 문초만 더 당할 처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이는 역모 관련 내용을 모두 인정했고, 영의정 강순 역시 시인했다.


이 사건에 관련된 자는

남이를 위시하여 강순, 조경치, 변영수, 변자의, 문효량, 고복로, 오치권, 박자하 등으로 모두 처형되었다.

또한 조경치의 장인인 김개가 관직에서 물러났고, 그들의 측근 30여 명도 함께 죽였다.


그리고 이 밖의 가솔들과 친분 관계가 있는 자들은 공신녹권이 몰수당하고

종으로 전락시키거나 변방에서 종군하게 하였다.

남이의 기질과 경력으로 볼 때 이 때의 역모 사건이 완전히 조작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세조의 총애를 받고 있었고 27세의 나이로 병조판서에까지 오른 그가

예종이 즉위한 뒤 얼마 되지 않아 병조판서에서 밀려나자 울분이 컸을 것이다.

더구나 남이가 무인이었고 역모 사건 발각 당시에 가까이 지내던 영의정 강순을 비롯한

모든 인물들이 무인이었던 점을 고려할 때 한명회, 노사신 등의 훈구 대신들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역모 사건으로 인식되었지만,

그 이후 일부 야사에서는 유자광의 모함으로 날조된 옥사라고 규정하고

남이를 젊은 나이에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은 영웅적 인물로 기술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남이의 옥을 날조 사건으로 기록한 대표적인 책은 <연려실기술>인데,

여기에서는 유자광의 계략에 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임진왜란 이후에 일부 야사에서 남이를 비극적 영웅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은

조선 중기의 무오사화, 갑자사화의 책임이 유자광에게 있다고 보는 시각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권선징악적인 가치관이 강한 조선 사학도들은 유자광을 참사를 획책하는

극악무도한 간신배로 인식하고 있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남이의 역모'는 단지 그 간신배 유자광의 날조극이라고 믿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남이는 순조 때 그의 후손 우의정 남공철의 상소에 의해 신원되었다.


현재 남이와 관련된 설화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이 설화들은 그의 출생, 결혼, 입공, 죽음 등의 단계로 나누어져 있으며,

이 4단계는 모두 원혼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이를테면 남이가 귀신을 내쫓음으로써 다 죽어가던 낭자가 살아남았다는 등

대개는 그의 신통력에 대한 이야기다.


이 때문에 민간과 무속에서는 남이 장군신을 믿는 신앙이 형성돼 지금도 전승되고 있다.

이는 용맹을 떨쳤던 남이의 위용으로 귀신을 내쫓을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하고 있다.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지은이 : 박영규, 들녁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