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관

[국가상징거리 보면 그 나라가 보인다]

기산(箕山) 2011. 4. 24. 17:02

[국가상징거리 보면 그 나라가 보인다]

광화문광장엔 '대한민국'이 없다

 

                                                                  조선일보 | 조성관 주간조선 편집위원

                                                                  입력 2011.04.24 11:31 | 수정 2011.04.24 16:37

 

서울 광화문광장의 분수가 다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시원하게 솟구치는 물줄기만 보고 있어도 가슴이 상쾌해진다.

2009년 8월에 탄생한 광화문광장은 국가상징거리의 출발점이자 중심이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국가상징거리는 광화문에서 한강까지 7㎞ 구간.

이 중 광화문광장은 서울시장 오세훈의 작품이다.

국가상징거리의 핵심은 광화문광장에서 시청 앞 서울광장에 이르는 구간이다.

광화문광장에 대한 비판이 3년째 끊이지 않고 있다.

 

"광화문광장의 정체성이 의문시된다"

"광화문광장에서 대한민국은 완전 실종되었다"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무엇을 보여주려고 하나?" 등이 비판의 주된 흐름이다.

 

광화문광장은 무엇 때문에 이런 비판을 듣게 되는 것일까.

광화문광장에서 빠져 있는 것은 무엇일까.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트라팔가 광장까지


영미식 국제 질서를 만들어낸 영국 수도 런던으로 가보자.

런던의 국가상징거리는 웨스트민스터 사원 옆길에서 시작해 트라팔가 광장에 이르는

약 1㎞ 정도의 길이다.

이 거리가 화이트홀(white hall)이다.

영국의 국가상징거리는 트라팔가 광장에서 완성된다.

한때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했던 영국의 국가상징거리를 걸어보자.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주로 왕족의 유해가 묻혀 있는 성스러운 공간.

그 옆에는 팔리아멘트 광장이 있다.
팔리아멘트 광장에는 영국사에서 중요한 인물의 동상이 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동상이 윈스턴 처칠 총리다.

프록코트를 걸친 채 지팡이를 짚고 있다. 노년의 처칠 그대로다.

처칠 동상의 진수는 뒤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굽은 허리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처칠의 시선은 국회의사당을 향한다.

처칠 동상을 뒤로 하고 트라팔가 광장을 향해 걸어간다.

도로 양옆에는 재무부, 외교부, 다우닝가, 국방부, 해군성, 트라팔가 극장이 몰려 있다.

다우닝가(街) 10번지는 영국 총리의 관저.

다우닝가로 들어가는 입구는 언제나 철문으로 잠겨 있다.

총리가 드나들 때만 이 철문이 열린다.

화이트홀 거리의 중앙 분리대에는 두 개의 기념비가 있다.

다우닝가 못 미쳐, 즉 외무성 앞에 있는 기념비는 세노탑(cenotaph)이다.

영국을 위해 희생한 사람 중 유해를 외국에서 영국으로 봉환하지 못한 이들을 기리는 탑이다.

두 번째 기념비는 다우닝가 입구를 지나 정부 청사 앞에 있다.

2차 세계대전 여성 기념비(Monument to the Women of World War 2).

영국 총리는 관저를 드나들 때 반드시 두 탑 중 하나를 볼 수밖에 없다.

런던 시민들은 국가적 경사가 있을 때 화이트홀 거리에 운집한다.

물론 최종 목적지는 트라팔가 광장이다.

1945년 5월 7일 그날도 그랬다. 독일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날이다.

2차대전 승전일에 런던 시민들은 화이트홀에 몰려들어

"빅토리(승리)"를 외치고 영국 국가를 부르며 트라팔가 광장까지 행진했다.

트라팔가 광장.

섬나라 영국은 두 번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트라팔가(trafalgar)는 이베리아반도 끝에 있는 곶.

 

1805년 넬슨 제독은 함대를 이끌고 트라팔가 곶에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의 연합함대와 건곤일척의 해전(海戰)을 벌였다.

넬슨은 세계 해전사에 길이 빛나는 승리를 거뒀고 기함(旗艦)에서 영웅적인 최후를 맞았다.

트라팔가 해전의 승리가 없었다면 대영제국 건설은 꿈도 꾸지 못했다.

영국 정부는 1830년대에 트라팔가 광장을 조성했다.

중심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넬슨 동상을 얹어 놓았다.

넬슨 제독은 화이트홀 거리를 응시하는 모습이다.

대영제국은 2차 세계대전을 끝으로 해체되었지만 영국은 여전히 영연방을 이끌고 있다.

제국주의 시절 영국의 식민지로 있었던,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나라들이 영국을 중심으로 뭉친다.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영연방 체육대회가 대표적이다.

팔리아멘트 광장에 있는 처칠은 나치 독일의 히틀러에 당당히 맞서 영국을 구한 2차대전의 영웅이고,

트라팔가 광장의 넬슨은 나폴레옹으로부터 영국을 지켜낸 바다의 영웅이다.

영국의 오늘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미국, '내셔널몰' & 펜실베이니아 애비뉴

미국의 수도 워싱턴DC로 시선을 옮겨 보자. 워싱턴의 상징거리는 두 개이다.

두 개의 상징거리는 모두 국회의사당에서 출발한다.

하나는 국회의사당에서 링컨기념관에 이르는 '내셔널몰'이고,

다른 하나는 의사당에서 백악관에 이르는 펜실베이니아 애비뉴이다.

국회의사당에서 링컨기념관에 이르는 넓은 길로 접어들어가 보자.

웅대한 공공건물이 여유있는 간격으로 늘어서 있다.

항공우주박물관, 허시혼미술관, 자연사박물관, 예술산업관, 아메리카역사박물관,

홀로코스트기념박물관이다.

20세기 세계제국을 이끌어온 미국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방문객의 옷깃을 여미게 하는 공간은 건국 대통령 조지 워싱턴을 기리기 위해 세운

워싱턴기념탑(Washington Monument).

고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를 본떠 만들었다.

높이는 168m. 워싱턴기념탑 위에는 기다란 직사각형 연못이 있다.

회상의 연못(Reflecting pool)이다.

왜 회상을 요구할까.

연못 왼쪽, 그러니까 백악관이 있는 쪽에는 베트남전 전몰자 위령비가 조성되어 있다.

연못 오른쪽에는 한국전쟁 전몰자 위령공원이 있다.

우중에 판초를 입고 행군하는 미군들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이곳에 오면 국가는 왜 협회와 다른지가 오감으로 느껴진다.

또 애국심은 어떻게 생성되는지 깨닫게 된다.

링컨기념관은 내셔널몰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

계단을 올라 링컨기념관 입구에서 내려다보면 연못과 워싱턴기념탑이 보인다.

링컨기념관은 규모와 위치로 인해 보는 이로 하여금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1922년에 세워진 링컨기념관은 당대 미국 최고의 건축가, 조각가, 화가가 공동으로 참여했다.

미국인이 16대 대통령 링컨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이 기념관에 녹아들었다.

 

링컨은 자동차, 지폐 등에 이름과 얼굴을 빌려주고 있다.

미국인은 하루도 링컨을 만나지 않고 살 수 없다는 말은 이래서 나왔다.

링컨기념관 뒤편은 포토맥강.

이 강변에는 제퍼슨기념관, 루스벨트기념관, 케네디센터 등이 위치했다.

다른 하나는 펜실베이니아 애비뉴.

이 길은 국회의사당에서 출발해 1600번지의 백악관까지 이어진다.

미국 대통령이 때로 큰 기념일에 걷기도 하는 길이다.

이 구간에는 다른 나라의 상징거리와 마찬가지로

국립미술관, 노동부, FBI(연방수사국), 법무부, 상무부 등 주요 공공기관이 들어서 있다.

펜실베이니아 애비뉴 한복판에 국가기록원(NARA)을 두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점이 많다.

미국이 기록문화를 얼마나 중시하는지를 보여준다.

국가기록원 길 건너에는 미해군 기념공원이 보인다.

미해군, 해병대, 해경, 그리고 상선 선원을 기리는 공간이다.

이 기념공원에서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조형물은 '고독한 선원(The Lone Sailor)' 동상.

 

배에서 막 육지에 내린 선원.

고대하던 뭍을 밟았으나 어디로 가야할지를 모르는 표정이 물씬 배어나온다.

바다를 무대로 생애를 보낸 사람들은 누구나 여기서 위로를 받게 된다.

법무부 옆에 있는 '역사적 장소(Historic Site)'는 1865년 포드극장이 있던 곳이다.

링컨 대통령을 아는 사람이라면

'1865년 포드극장'이란 말에 금방 어떤 일이 일어난 장소인지를 상상할 수 있다.

대통령 링컨은 1865년 4월 14일 포드극장에서 연극을 관람하다 남부 지지자의 총을 맞고 사망했다.

펜실베이니아 애비뉴에서 미국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은 자유광장(Freedom Plaza).

웨스턴광장이라고도 불리는 이 공간은 마틴 루터 킹 목사를 기리기 위해 조성됐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나에게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로 세계를 감동시킨 흑인인권 운동가.

 

그는 1963년 8월 28일 연설원고를 광장에서 가까운 윌라드호텔에서 작성했다.

현재 자유광장은 이름처럼 정치 집회장소로 유명하다.

댄 브라운의 밀리언셀러 소설 '잃어버린 심벌'에서 이 공간이 묘사된다.

프랑스, 개선문에서 콩코르드 광장까지

프랑스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는 국가상징거리로 가장 자주 언급된다.

서울에 국가상징거리 조성을 추진하는 정부 당국도 샹젤리제 거리를 연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표적인 구간은 개선문에서 콩코르드 광장에 이르는 샹젤리제 거리.

먼저 개선문과 그 주변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개선문 둘레는 샤를 드골 광장이 조성되어 있고, 샤를 드골의 동상이 서 있다.

샤를 드골은 개선문 앞에서 1945년 파리 해방을 선언했다.

1차대전 승전 퍼레이드가 개선문을 지났고, 빅토르 위고의 시신이 이 문을 지났다.

개선문 바닥에는 1차대전 참전 무명용사들의 무덤이 조성되었다.

개선문에서는 12개의 도로가 방사형으로 뻗어나간다.

12개 도로의 이름은 전쟁을 지휘한 장군들의 이름을 붙였다.

샹젤리제 거리와 콩코르드 광장이 만나기 직전에 작은 광장인 클레망소 광장이 있다.

클레망소는 '프랑스의 호랑이'라고 불렸던 정치인 겸 언론인이자

1차 세계대전 당시 육군 장관으로 프랑스를 승리로 이끈 인물.

 

클레망소 광장은 2차대전 당시 독일에 점령당했던 파리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준다.

전시장 '그랑 팔레'를 둘러싼 길에는 연합국이었던 영국과 미국에 대한 감사를 드러낸다.

당시 미국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이름을 딴 지하철 역사와 거리가 있다.

미국의 전쟁 영웅인 아이젠하워가도 보인다.

영국을 구한 영웅 윈스턴 처칠 거리도 있다.

우방국 지도자에 대한 경의를 프랑스는 이런 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콩코르드 광장은 파리에서 가장 큰 광장.

프랑스대혁명 이후 기요틴(단두대)이 설치되었던 곳으로 혁명광장으로도 불렸다.

이후 화합이라는 뜻의 콩코르드 광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샹젤리제 거리는

프랑스대혁명(1789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20세기까지의 프랑스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프랑스대혁명, 나폴레옹 시절,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파리 해방이 동상, 거리 이름,

지하철 역사 이름 등으로 남아 끊임없이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다.

캐나다, 국회의사당 앞의 웰링턴가

캐나다의 수도는 오타와.

미국과 전쟁을 벌이기 전 캐나다의 수도는 킹스턴이었지만

수도가 미국 국경 코앞에 있어 방어에 취약점을 드러냈다.

그래서 내륙 쪽으로 수도를 옮긴 게 지금의 오타와이다. 즉 오타와는 행정수도이다.

오타와의 상징거리는 국회의사당이 있는 팔리아멘트 힐(의회 언덕)의 앞길인 웰링턴가(街).

 

캐나다는 의원내각제 국가이므로 총리 집무실이 국회의사당 내에도 있다.

총리가 국회의사당 내 집무실에서 정면으로 걸어나오면 웰링턴가와 만난다.

총리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대법원이 보인다. 대법원 바로 옆에 법무부가 자리잡고 있다.


다시 시선을 왼쪽으로 돌리면 전쟁기념탑(Memorial War Tower)이 보인다.

이 탑 주변에는 365일 붉은 양귀비꽃 화환이 서너 개쯤 놓여있다.

기념탑의 3면에는

1차대전, 2차대전, 한국전쟁에서 자유를 위해 희생한 이들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 기록돼 있다.

2차대전 전승기념일(5월 7일), 6·25전쟁기념일 등에 탑 앞에서 기념행사가 벌어진다.

또한 매년 6월 25일 국회의사당 앞 잔디광장에서는 캐나다연방 국방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6·25전쟁기념행사가 성대하게 치러진다.

캐나다는 외침을 받아본 일이 없는 평화로운 나라다.

캐나다가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일원으로 국제 사회에서 역할을 한 것은 1차대전부터다.

이후 캐나다는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도 참전해 자유를 지키기 위해 피를 흘렸다.

캐나다는 공산 침략을 받아 공산화 직전에 놓인 한국을 지키기 위해 516명이 목숨을 바쳤다.

그런 대한민국이 전후 세계사에 빛나는 성공을 이룬 것에 대해 자랑스럽게 여긴다.

캐나다 총리 관저는 서섹스로(路) 24번지에 있다.

서섹스로는 오타와강을 따라 사행(蛇行)하듯 굽어져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한다.

총리 관저로 가려면 전쟁기념탑을 오른편에 두고 좌회전해야 한다.

 

리도운하 옆에는 고딕식 고색창연한 호텔이 있다. 오타와에서 가장 고급인 샤토 로리에 호텔이다.

로리에는 캐나다의 총리를 지낸 인물.

 

총리관저로 가는 길목에 정부 부처 건물인 코넛빌딩이 보인다.

이 빌딩을 조금 지나면 미대사관 건물이 있다.

미대사관 건물에는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전쟁박물관이 있었다.

전쟁박물관은 공간이 협소해 신축건물을 지어 이전했다.

전쟁박물관 뒤쪽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이 자리잡고 있다.


중국, 장안대가의 톈안먼 광장엔…

21세기 패권국가로 급부상 중인 중국 베이징으로 장소를 옮겨본다.

베이징의 국가상징거리는 장안대가(長安大街).

 

그 핵심 구간은 동단(東單)과 서단(西單) 사이다.

이 거리에 인민대회당, 톈안먼, 자금성, 마오쩌둥기념당, 국가박물관, 공안국,

국가대극원(오페라하우스), 왕푸징 거리가 있다.

베이징에 반나절만 머무는 관광객이라도 반드시 안내되는 곳이 톈안먼 광장이다.

마오쩌둥 초상화가 걸려있는 곳이 톈안먼. 그 앞쪽이 톈안먼 광장이다.

 

베이징의 국가상징거리에서 중국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은 역시 톈안먼 광장이다.

톈안먼 광장 한복판에는 인민영웅기념비가 있다.

톈안먼 입구와 인민영웅기념비 사이의 일직선상에 국기게양대가 있다.

10월 1일은 국경절.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 날이다. 중국인들은 이날을 전후해 일주일가량을 쉰다.

 

국경절 행사의 꽃은 톈안먼 광장 국기게양식과 3군 퍼레이드이다.

국기게양식은 오전 10시에 시작한다.

5분 전쯤 국기보위대 20여명이 입장하고 맨앞에 선 군인이 국기를 쫙 펴는 세러머니를 연출한다.

오성홍기가 천천히 게양대에 올라가는 광경을 후진타오, 원자바오 등 국가최고지도부가 지켜본다.

게양대에 나부끼는 오성홍기(五星紅旗).

이것을 시작으로 국경절 행사가 개막된다. 퍼레이드를 위해 장안대가 전 구간의 교통이 차단된다.

 

육·해·공군 병기 퍼레이드는 장안대가 동쪽 끝에 있는 국제무역센터 앞길에서 출발해

장안대가를 행진해 톈안먼 광장에 와서 집결한다.

10월 1일 국경절 행사의 총감독은 중국이 낳은 세계적 영화감독 장이머우.

중국 정부가 이 행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5년째 베이징에 거주하고 있는 직장인 유서영씨는

국경절 오성홍기가 게양되는 장면을 여러 번 보았다.

유서영씨는 그때의 느낌을 이렇게 전했다.

"국기게양식을 보기 위해 매년 10만명의 인파가 톈안먼 광장을 찾을 정도다.

기수가 게양대 아랫부분에 묶여있는 오성홍기를 푸른 창공 속에 던지면

붉은 깃발이 한 치의 구김 없이 창공에 나부낀다.

이때 비장한 표정의 후진타오 국가주석, 원자바오 국무총리를 비롯한 국가 수뇌부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을 기린다.

이 장면에 현장에 있는 10만명의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국기게양식은 텔레비전으로 중계된다.

톈안먼 광장에 배치되어 있는 공공건물인 인민대회당, 마오쩌둥기념당,

국가박물관(혁명박물관)은 국기게양식의 배경화면이 된다.

아주 자연스럽게 이런 공공건물이 카메라 앵글에 들어와 시청자들의 의식에 박힌다.

마치 컴퓨터 게임의 PPL 광고처럼 말이다.

톈안먼 광장 주변의 공공건물 중 가장 최근에 생긴 게 2007년 말에 준공한

국가대극원(國家大劇院)이다.

우리말로 하면 오페라하우스다. 국가대극원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개관했다.

오페라는 음악, 연극, 미술 등이 결합된 대표적인 종합예술.

중국 정부가 장안대가에 오페라하우스를 지은 것은

문화·예술 또한 발전시키겠다는 선언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톈안먼 광장에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있다.

톈안먼 입구에 걸려 있는 마오쩌둥 초상화.

톈안먼 광장에 들른 관광객들이 반드시 둘러보는 곳이 자금성.

 

중국 황실의 옛 궁전을 보려면 마오 초상화 밑으로 난 문을 통과해야 한다.

이것은 서울의 광화문광장에서 경복궁을 보려면 광화문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과 같은 구조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지도자로 평가받는 사람이 청나라 황제 강희제.

중국 정부는 강희제 동상을 톈안먼 광장에 세우지 않았다.

강희제는 중화인민공화국과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자금성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마오의 거대한 초상화를 배치해

청조시대와 분명한 구분을 짓고 있다.

마오는 중국의 조지 워싱턴이다.

영국, 미국, 프랑스, 캐나다, 중국의 국가상징거리를 살펴보면 한 가지 결론이 도출된다.

 

국가상징거리는 그 국가의 탄생 역사, 전몰·희생자에 대한 감사, 국가의 이념과 가치,

그리고 미래비전을 보여주는 공간이라는 사실이다.


한국, 국가상징거리로 육조거리 복원?

이런 관점에서 광화문광장을 보면 어떤가.

이순신 동상 뒤에 세종대왕 동상이 들어서면서 국가상징거리가 조선왕조시대로 회귀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가 없게 됐다.

육조거리 복원은 대한민국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광화문광장에는 대한민국 60년의 빛나는 역사가 없다.

공산세력의 침략에 맞서 자유 대한을 지키기 위해 피흘린 이들에 대한 감사도,

전쟁의 폐허 위에서 대한민국을 건설한 위대한 지도자에 대한 경의도 찾아볼 수가 없다.

김문수 경기지사는 지난해 여러 차례 광화문광장의 정체성 상실을 비판한 바 있다.

김문수 지사는

"2차대전 후 전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므로

광화문광장에 이승만·박정희 대통령 동상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로 언론인 손세일씨는 전화통화에서

"광화문광장은 대한민국의 심장이기 때문에 동상은 현대 한국의 상징물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들기로 하고

현재 문화관광부 자리에 박물관 공사를 진행 중이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국가상징거리가 시작하는 지점에 어울리는 공공건물이다.

하지만 국가관 부재가 빚어낸 광화문광장은 어찌할 것인가.


기자는 광화문광장을 볼 때마다 존 F 케네디의 말을 떠올린다.

케네디는 1963년 10월 27일 애머스트칼리지를 찾아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를 추모하는 추도사를 낭독했다.

 

"어떤 나라는 그 사회가 기념하고 기억하는 인물로 자신을 드러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