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 | 신동립 | 입력 2011.02.26 08:52
양태자의 유럽야화 < 36 >
지금부터 400~500년 전 당시 유럽의 남성들과 어깨를 겨뤘던 여류 화가들이 있었다.
소포니스바(1535~1625)와 아르테미시아(1593~1652)다.
먼저 소포니스바를 살펴 보자.
그녀와 다른 5자매들은 딸들을 어릴 때부터 아주 교양 있는 여인들로 키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화가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소포니스바가 그림에 재능이 있다는 걸 발견했던 아버지는
딸을 그 당시 명망 있던 화가 베르나르디니노 캄피(1522~1592)의 문하생으로 넣어
3년간 미술 수업을 철저히 받게 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당시의 대가인 미켈란젤로(1475~1564) 밑에서 그림을 배우는 것을 청하기도 했다.
누구보다도 라파엘로에 큰 영향을 받은 소포니스바는 많은 초상화를 그렸다.
심지어 화가 루벤스 조차 그녀의 초상화를 복사했을 정도였다니 재능이 가히 짐작된다.
소포니스바는 그림 재능은 물론 아버지의 덕도 컸기에 살아 생전에 이미 화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아버지와 여러 지방으로 함께 여행을 다니면서도 많은 그림들을 그렸다.
그녀가 점점 더 유명해지자 1559년에는 스페인 궁정의 부름까지 받았다.
그 당시 재능 있는 화가들은 왕족이나 귀족들의 전속 미술가로 일하던 시대였다.
그녀는 24살이던 스페인 왕이 청탁한 14살 신부 이사벨라의 초상화를 완벽히 그려내면서
왕족과 깊은 친분을 쌓기 시작했다.
이사벨라가 3번째 임신 때 갑자기 죽게 되자 소포니스바는 친구를 잃은 것처럼 슬퍼했다.
스페인 궁중에서 외국 여성으로서 혼자 살아가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왕은 그녀를 배려해 작은 집과 선물을 줬을 뿐만 아니라, 45살이나 된 이 여류화가에게
짝을 찾아주는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이탈리아 시칠리아 출신의 돈 많은 귀족을 점지해 결혼까지 시켜줬다.
5년간의 결혼 생활 뒤 남편이 살해를 당하자 그녀는 선장과 두 번째 결혼을 했다.
이때부터 그녀의 아트리에는 문화적인 사교장이 됐고 루벤스(1577~1640)도 참여했다,
1624년에는 17세기의 대가인 안토니 반 다이크(1599~1641)까지 방문했을 정도였다.
그녀는 작품 50점을 남겼고, 1625년에 죽었다.
이번에는 아르테미시아(1593~1652)를 한번 보자.
그녀는 당시의 대가들인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와 경쟁하던 여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잊혀진 화가에 속했다.
그녀를 다시 발굴한 것은 최근의 한 미술사학자였다.
소포니스바처럼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그림 영향을 많이 받았던 그녀도
15살 때 아버지의 권유로 당시 유명 화가인 아고스티노 타씨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어느 날 그녀는 스승으로부터 강간을 당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그를 고소했고, 재판 끝에 이 스승 화가는 감옥행을 하게 됐다.
세월이 흘러 그녀는 피에트로 안토니오과 결혼한 뒤
당시 문화적으로 번성했던 이탈리아 플로렌즈로 갔다.
1612~1623년에는 목 베는 모습을 아주 사실적으로 그렸다.
어째서 '여성의 머리와 손 끝에서 저런 잔인한 작품이 나올 수 있는지…',
'그녀 안에 든 광기의 폭발인지, 아니면 남성 혐오증인지…'하고 한마디씩 말할 정도였다.
그러면서 그녀의 이런 사실적인 표현에는 다들 놀라움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에 대한 전문적 평가는 미술사 전공자들에게 남겨 두고,
여기선 여성화가로 살아갔던 그녀의 당찬 인생만을 엿보기로 하자.
소포니스바처럼 그녀도 당시 플로렌즈에서 떵떵거리며 유명했던
메디치 가문의 전속 미술가로 들어 갔다.
교황을 많이 배출한 메디치가가
어느 정도 유명한지는 마리아 메티치와 카타리나 메디치를 통해 많이 언급했다.
1616년부터 그녀는 남편과 함께 미술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17세기 이후로는 다른 여성 화가들도 서서히 회원이 될 수 있었지만,
당시 그녀가 첫 여성 회원이었다는 것을 보면 그녀의 대단함이 엿보인다.
뿐만 아니라 당시 유명 학자였던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와 친분을 가질 정도로
미술계와 사교계에서 뛰어난 여성으로 존재했다.
이탈리아 로마로 되돌아간 그녀는
두 딸과 함께 아트리에를 열고, 추기경의 초상화, 교황의 조카 등을 그렸다.
그녀는 다시 1630년 그 당시 로마보다 3배나 큰 문화 중심지였던 나폴리로 이동했다.
그녀는 나폴리에서는 명성이 그리 높지 않았지만
어느 날 유명한 귀족으로부터 주문 받은 초상화를 완벽하게 그려내면서 세상에 명성을 다시 알렸다.
1652년 생을 마감했다.
1535~1652년 사이에 살았던 두 여류 화가들은 비교적 '행운녀'들로 여겨진다.
그래도 생전에 여인 화가로서 세상에 이름을 알리고 떠났기에 말이다.
이들과 달리 당시 남자 화가들에 가려 빛을 못 보다가 사후에 알려진 여성 화가들도 있다.
이들을 모아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쉬른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연 적도 있었다.
생전 유명인이었던, 사후에 유명인이 됐던 여성이 남성 영역에 도전하면서 살았던
이런 여류 화가들은 참으로 고마운 존재임은 분명하다.
사진기가 없던 그 시대에 이런 화가들 덕택에
몇 백전에 사라져간 그 시대상을 잘 들여다 보고 있지 않는가?
어찌 시대상 하나만 국한시키겠는가?
한국 신문에 난 아주 인상적인 기사를 여기 한번 옮겨 본다.
이 분이 평소에 인상주의 화가인 조르류 쇠라(1859~1891)의 '그랑자트 섬의 오후'를 무지 좋아했단다.
그러던 어느 날 실제 그림을 미국이던가? 어느 박물관에서 볼 기회가 주어졌는데,
그림을 보자 마자 이 분은 그만 울어 버렸단다.
마치 꿈에도 그리던 옛 벗을 만났던 기분이었을까?
어차피 이 그림 원본은 거부가 아닌 다음에야 소유할 수 없지 않은가?
이 그림 엽서 하나를 구입한 그녀는 아주 고급 액자에 이 그림을 끼워서 벽에 걸어 놓고선,
지금도 집에서 감상을 잘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보고 싶은 그림을 그리워하다가 보고서는 눈물을 흘렸다는 것에 참 많이 공감했다.
그런 유사한 경험인데 필자는 그때 반대로 침묵의 경지였다고나 할까?
평소 낭만주의 화가인 카스퍼 다비드 프리드리히(1774~1840)의 그림을 참 좋아했다.
그 중 '바닷가의 한 수도자'라는 그림을 무척 사랑한다.
어느 날 드디어 독일 베를린의 그림 전시관에서 그토록 그리던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바닷가의 한 수도자'의 실제 그림을 보게 됐다.
그 그림에 도취돼 보고 또 봤다. 보고 또 보고 있으니 그림도 필자에게 자꾸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나중에서야 30분이라는 시간이 흘러버렸다는 것,
박물관 지킴이가 내 뒤에 서서 줄 곧 나를 감시(?)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필자야 그림에 도취돼 보고 있었지만 지키는 입장인 그녀로서는 웬 동양 여자가
한 그림 앞에 너무 오래 서 있으니 좀 수상했었나 보다.
어쩌면 저 동양 여자가 정신이 살짝 가서는(?) 프리드리히 그림을 해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명화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맛에 대해선 말로 다 표현할 길이 없다.
소포니스바와 아르테미시아는 당시 그림이라는 전문 영역을 갖고
남성들과 늠름하게 대결하면서 자기 세계를 표출한, 참 당차고 당당한 여인들이라고 여겨진다.
이들이 소질과 능력을 쏟아낸 덕에도 우리는 당시 시대상이나 풍물을
고스란히 실제처럼 볼 수 있지 않은가?
이런 아름다운 그림들을 우리에게 남겨주고 간 여류화가 소포니스바와 아르테미시아에게
같은 여성으로서도 머리 숙여 감사하고픈 마음이다.
비교종교학 박사 ytzm@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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