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 50주년]
“4·19는 한국적 근대민주주의가 제 모습 드러낸 것”
학계 역사적 의미 재조명 활발
4·19혁명 50주년 하루 전날인 18일 열린 ‘4·19기념걷기대회’에 참여한 학생들이
서울 안암동 고려대를 출발해 수유동 국립4·19민주묘지로 걸어가고 있다.
정연호기자 tpgod@seoul.co.kr
서양의 부르주아 계급처럼 근대를 추동할 수 있는 세력이 우리에게도 있었느냐는 점이다.
식민사학 를 내건 국사학계는 조선후기에서 답을 찾으려 들었다.
조선 후기에 이미 상공업과 화폐와 시장이 발달했다는, 자본주의 맹아론이다.
그러나 성리학적 세계관이 지배하던 조선에서 서양식 근대의 뿌리를 찾으려는 시도는
열등감으로 인한 작위적 해석이라는 반론이 쏟아졌다.
최근 국사학계가 한걸음 뒤로 물러나 찾은 인물은 고종이었다.
이 역시 쉽지 않다.
왕실 주도의, 위로부터의 근대화라는 점을 부각하려했지만,
결과적으로 나라를 빼앗겼다는 점 때문에 ‘역사에 가정은 없다.’는
반론에 막혀서다.
최근 몇 년간 논란이 됐던 식민지 근대화론은 일제를 근대세력으로 본다.
아무리 미워도 근대적 제도와 체험은 일제강점기 때부터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역시 일본이 원한 것은 우리의 근대화가 아니라
일본의 팽창이었다는 점에서 많은 반론을 낳았다.
역사를 연속적으로 본다는 대목은 매력적이나
때로는 몰이해 때문에, 때로는 스스로 드러낸 과도한 정치적 편향 때문에
아직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4·19혁명 때 비로소 ‘국민 만들기(Nation-Building)’가 이뤄지면서
근대적 시민으로 세례받았다는 주장은 이런 맥락에서 관심을 끈다.
지난 14일 4·19혁명기념사업회 주최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서
고트프리트 칼 킨더만 독일 뮌헨대 명예교수는 전통적 유교개념을 토대로 한
이승만 체제를 무너뜨리는 혁명을 학생들이 주도한 것에 대해
“미국식 민주주의 원칙과 자유세계의 역사를 배웠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일제와 이승만정권이 형식적으로 근대나 민주주의를 도입했지만,
내용적으로 근대와 민주주의가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은 4·19 아니냐는 얘기다.
지난 15일 한국정치외교사학회 주최로 열린 학술대회에서
김태일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산업화로 인한 인구집중
▲분단·전쟁으로 피난민의 도시유입
▲매스컴과 근대교육의 보급으로 시민의식이 성장한 것 등을
혁명의 뼈대로 지목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는 박정희 정권마저 4·19혁명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지난 16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주최한 학술대회에서
홍성대 고려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수료자는
“4·19기념탑이 박정희에 의해 세워진 것은 쿠데타를 정당화하고
혁명의 열기에 정치적 화상을 입지 않기 위한 포섭의 전략”이라고 규정했다.
민정이양 이후 대통령 취임식에서 “4·19의 혁명이념을 계승한다.”고
연설한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주장들은 근대성의 관점에서 4·19혁명을 재조명한 책
‘4·19와 모더니티’(문학과지성사 펴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소설 ‘광장’의 작가 최인훈은
프랑스혁명 뒤 나폴레옹 황제가 등장했다는 점을 들어
4·19혁명 뒤 5·16쿠데타가 있었다 해도 혁명 정신 자체는
유산으로 남았다는 점을 환기시켰다.
최장집 고려대 정치학 교수 역시
해방 직후에는 민주주의 가치를 잘 몰랐기 때문에 4·19혁명에서
민족자주·인민주권·민족자립경제 등
‘최대정의적(maximalist) 민주주의’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고 평가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4·19혁명 50주년]
“시위때 경찰이 쏜 총 피해 치마 뒤집어쓰고 엎드려…”
당시 중앙대여학생 시위 주도 홍관옥 박사
홍관옥 박사가 부모님의 만류에도 시위대에 합류했던 당시를
상기된 모습으로 설명하고 있다.
정연호기자 tpgod@seoul.co.kr
●플래카드 들고 맨앞줄에 서서 시위
1960년 4월19일 오전 서울 흑석동 중앙대 캠퍼스.
굳게 닫힌 교문이 열리자 스크럼을 짠 학생 수천명이 일제히 거리로 달려 나갔다.
순식간에 흑석동 고개를 넘어 한강대교 저지선을 뚫고,
삼각지와 서울역을 지나 시청 앞으로 진격했다.
그런데 전속력으로 시위대의 뒤를 쫓는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있었다.
강의실에서 학생들의 모습을 지켜보다 급히 뒤따라 나온 문리과대 여학생들이었다.
행렬을 놓치지 않으려 버스까지 갈아타며 걸음을 재촉한 이들은 서울역에 와서야
시위대와 합류해 함께 경무대(현재 청와대)로 향했다.
당시 국어국문학과 2학년으로 여학생들을 이끌고 나왔던
홍관옥(70·여·종교교육학) 박사는 18일
“전날 4·18 고려대생 피습사건을 듣고 굉장히 자극을 받았다.
이런 불의는 피할 수 없는 일, 두려워할 수 없단 생각이 들어
부모님이 말리는 데도 시위대를 따라 나섰다.”고 회고했다.
경무대 앞에서 군의 발포로 부상자가 속출하자 시위대는 내무부 앞에 다시 집결했다.
홍 박사를 비롯, 여나믄명에 불과한 여학생들이 맨 앞줄에 서서 플래카드를 들었다.
평화 연좌시위가 이어지는가 하더니 곧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홍 박사는 치마를 뒤집어 쓰고 납작 엎드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고개를 들고 자리를 피하려는 순간 누군가 머리채를 움켜 쥐고
개머리판으로 온몸을 사정없이 때렸다.
지프차에 실려 중부경찰서 지하실로 끌려가 이틀 동안 취조를 당했다.
경찰은 “잘못했다고 사과하겠느냐, 아니면 이름에 빨간줄이 가겠느냐.”고 윽박질렀다.
“또 맞을까봐 너무 무서웠어요.
하지만 나라와 민족을 위해 그런 건데, 잘못한 게 없는데….
맞더라도 비겁할 순 없잖아요.”
잘못을 빌지 않겠다고 버티던 홍 박사는 때마침 학생들을 구하기 위해 경찰서를 찾은
교수들 덕분에 집에 올 수 있었다.
홍 박사는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포장을 받았지만,
4·19 혁명에 참여한 여성들에 대한 평가는 적극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현재까지 생존해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4·19 혁명 공로자 152명 가운데
여성은 홍 박사를 포함해 5명뿐이다.
곧 5·16 쿠데타가 일어나 4·19 혁명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데다
가부장적인 사회 분위기도 한몫을 했다.
●“맞을까 무서웠지만 끝까지 버텨”
하지만 홍 박사는 ‘서현무’라는 이름 석자를 똑똑히 기억했다.
함께 플래카드를 들었다가 경찰에게 폭행당하고 실신해 사지가 들려 내동댕이쳐졌던
이 법대 여학생은 후유증으로 끝내 숨을 거두고 국립 4·19 민주묘지에서 영면에 들었다.
또 다른 여학생은 머리를 심하게 얻어 맞고 실명 직전까지 돼 1년이 넘도록 햇빛을 보지 못했다.
홍 박사는 4·19혁명을 민족적·총체적 권리의 행사라고 정의했다.
그는 “민주주의를 이루려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자 본능적인 소망”이라면서
“우리는 그저 속에서 터져나오는, 인간 본연의 자세를 찾고 싶은 것이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민주화의 기틀을 마련한 4·19세대로서 지켜보는 현 시국은 아쉬운 점이 많다.
그는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것은 좋았지만, 아직 민주주의 자체를 누리지는 못하는 것 같다.”고
걱정했다.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역사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맑은 물에서 건진 물고기는 가시가 많다 (0) | 2010.04.25 |
---|---|
`굴욕의 삼전도비' 115년 만에 원위치 이전 (0) | 2010.04.22 |
함평에는 독도와 임시정부가 있다 (0) | 2010.04.09 |
박정희 언급, 516 직후 CIA 최초 보고서 원문 [1961년 5월 18일 CIA] (0) | 2010.04.08 |
이병훈표 사극이 한국사회에 던지는 화두 (0) | 2010.04.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