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관

이병훈표 사극이 한국사회에 던지는 화두

기산(箕山) 2010. 4. 8. 01:58
 
                                                          [Post 9, 2010/04/03 10:51, 권경률의 중화탐구/드라마 in 정치]


생활의 역사가 몰려온다. 요즘 사극을 보면 알 수 있다.

길거리 사극을 표방한 “추노”가 그랬고, 이제 막 긴 호흡을 고르고 있는 “동이”가 그렇다.

이병훈 감독이 누군가?

드라마 “허준”에서 조선시대 의원을 역사의 메인스튜디오에 세운 그가

“대장금”의 수라간, “이산”의 도화서를 거쳐 “동이”에선 음악과 무용을 담당한

장악원(掌樂院)을 그릴 모양이다.

검계와 반촌, 조선의 뒷골목 풍경들

누가 조선을 양반들의 나라라고 했나?

‘이병훈표’ 사극의 주인공들을 보자.

길거리 장돌뱅이, 수라간 궁녀, 도화서 화공 등이

온갖 음모와 훼방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믿음을 지켜낸 끝에 마침내 세상에 뜻을 펼친다.

역사책에 등장하지 않는 무명씨들의 생기발랄한 삶의 현장.

그 속에서 우리는 누구든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생활의 역사를 대면하게 된다.

드라마 “동이”의 경우 초반부에 검계(劍契)의 세계를 다뤘다.

동이의 아버지 최효원은 검계의 수장이었으나 정치적 음모에 휘말려 죽음을 당한다.

 

이 드라마에서 검계는 관의 횡포와 부조리에 맞서는 천민들의 비밀결사다.

그렇다면 실제 역사에서는 검계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을까?

“숙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좌의정 민정중이 검계를 성토하는 대목이 나온다.


“도하(都河)의 무뢰배가 검계를 만들어 사사로이 습진(習陣)합니다.

시정이 이 때문에 더욱 소요하여 장래 대처하기 어려운 걱정이 외구(外寇)보다 심할 듯하니,

포도청으로 하여금 잡아서 원배(遠配)하거나 효시(梟示)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이에 숙종은 포도대장 신여철에게 검계를 소탕하라는 명을 내린다.

“숙종실록”에 따르면 체포된 검계 도당 10여 명 가운데 일부는 칼로 제 살을 깎고 가슴을 베는

자해소동을 벌였다고 한다.

오늘날 조폭문화를 연상케 하는 패악한 행위다.

실록이 이러한 악행을 부각시킨 건 아마도 검계를 무뢰배들의 야합으로 폄하하고 싶은

정치적 의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기사를 유심히 살펴보면 무심코 넘어갈 수 없는 단어가 눈에 띈다.

‘습진(習陣)’, 즉 진법을 훈련했다는 부분 말이다.

만약 검계가 단순한 무뢰배들이었다면 진법 따위를 익힐 리가 없었을 것이다.

사실상의 군사훈련을 했다는 자체가 정치적 목적을 띄고 있었음을 반증한다.

드라마에서처럼 양반체제를 위협할 만한 무언가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동이가 살던 동네가 반촌(泮村)이었다는 점도 흥미롭다.

반촌은 한양 땅에 있으면서도 치외법권이 적용되던 독립적인 구역이었다.

반촌의 주민들은 고려 때 안향이 성균관에 기증한 노비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들은 성균관 건물을 관리하는가 하면 유생들을 위해 갖가지 노동을 제공했다.

반촌이 성균관 주위에 형성된 이유도 이러한 생업과 관련을 맺고 있다.

유생들의 식사를 준비하는 일도 반촌 주민들의 몫이었다.

당시엔 쇠고기가 무척 귀했다.

농업이 국가경제의 근간이었기에 논밭을 일구는 소를 함부로 도살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하지만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 유생들에겐 식사 때마다 쇠고기를 밥상에 올리도록 했다.

이 때문에 반촌 주민들은 소를 잡아서 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독점적으로 누렸다.

드라마에서 동이 아버지 최효원은 시체를 검시하는 일에 종사했는데

이는 실제 역사상의 반촌 주민들이 소의 도살에 능숙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럴 듯한 설정이다.

또한 그들에게 협객 기질이 농후했으며 유생들과 어울려 혁신적인 사상을 탐구했다는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아 검계와 연관 짓는 대목도 꽤 설득력 있어 보인다.

잘 알려지지 않은 무명씨들의 생활사를 끄집어내며 자연스럽게 이야기 얼개를 짜들어간 것.

생활의 공간에서 권력을 탐하는 세태 질타

자, 이제 드라마는 성인배우들의 등장과 함께 무대를 궁궐로 옮긴다.

주인공 동이가 몸담게 될 장악원은 조선시대 궁중에서 음악과 무용에 관한 일을 담당한 관청이다.

음식을 차리는 수라간, 그림을 그리는 도화서에 이어 이병훈 감독다운 공간 설정이 아닐 수 없다.

이곳에서 동이는 장금이와 송연이가 그랬던 것처럼 고난을 헤치며 운명과 맞서 싸울 것이다.


수라간이든, 도화서든, 장악원이든 역사의 무대에선 철저히 비주류 공간이었다.

양반사대부들이 권력을 탐하는 곳이 아니라 이름 없는 무명씨들이 그저 자신이 원하는 것,

잘 하는 것을 추구하던 곳이다.

 

이병훈표 사극의 주인공들은 바로 그런 곳에서 자신의 재능을 꽃피우고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고관대작들보다 더 큰 사랑과 존경을 받는 대상으로 성장한다.

장금이와 송연이, 그리고 동이의 이야기는 돈과 사회적 지위를 미끼로 젊은이들을 줄 세우는

오늘날의 세태를 질타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 사회가 선망하는 대기업, 검찰청, 관공서, 언론사는 조선시대의 권력기관들을

연상케 하는 구석이 있다.

이런 곳에 들어가기 위해 스펙을 쌓고 스스로를 짜 맞추는 젊은이들은 과거시험을 보려는

선비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권력의 구미에 맞는 ‘빛나는 G세대’는 언제나 극소수이다.

돈과 사회적 지위를 향해 질주하는 대다수의 젊음은 오히려 ‘빚내는 88만원 세대’에 가깝다.

이것은 20대도, 기성세대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알면서도 딴청 부리며 모른 체 할 뿐이다.

현실은 못마땅하지만 이미 못된 경쟁에 길들여진 탓,

일상적으로 불안을 강요받고 산 결과가 아닐까?

장래 희망이 화가이던 꼬마가 고시원에 들어앉아 사법시험을 준비하고,

절대 음감을 타고난 음악천재가 입시학원 강사를 전전하는 동안,

먹고 살기 바쁜 시민들은 미술관이나 음악회 한 번 찾지 못한 채 한 해를 다 보내기 일쑤다.

꿈이 거세되고 성공만 바라보는 사회는 삶에 대한 목마름과 허기짐으로 가득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병훈표 사극은 한국사회를 향해 반전의 메시지를 던진다.

장금이, 송연이, 동이처럼 어긋난 운명과 맞서며 자신의 꿈을 펼쳐나가는

젊음이 많아야 건강한 세상이다.

 

정부나 지자체의 일자리 창출 정책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공공기관 행정인턴 같은 제도는 사탕발림 전시행정일 뿐이다.

현대판 도화서나 장악원, 수라간을 세우는 정도쯤은 돼야 한다.

 

통 크고 멋있게 해보잔 말이다,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