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한여름 밤의 사랑, '티타니아와 보톰'

기산(箕山) 2009. 6. 24. 05:50

한여름 밤의 사랑, '티타니아와 보톰'




Henry Fuseli,
The Nightmare ,
1781, Oil on canvas, 127 x 102 cm,
Detroit Institute of the Arts



여인의 몽환적 상상의 세계를 그린 요한 하인리히 푸즐리의 작품 중 신비로운 사랑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는 그림이 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소재로 한 '당나귀 머리의 보톰을 애무하는 티타니아', '잠에서 깬 티타니아' 같은

그림들이 그러하다.

기괴하고 음산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는 푸즐리의 그림 전반에 흐르는 특징이지만,

이 그림들 속 몽상은 어둠 속에 잠겨 있으면서도 즐겁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


괴상한 형체의 요정과 끔찍한 괴물에서 느껴지는 극적이고 잔인한 표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그림 속 형상들은

아름다운 꿈처럼 보인다.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선 자유분방한 푸즐리의 그림은 동시대의 다른 화가들의 상상력과 비교해 볼 때

단연 천재적이고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다.


푸즐리의 작품 중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자 가장 흔히 인용되는 1782년작 '악몽'은 이런 천재성의 대표적인 경우이다.

몽환적인 분위기와 상상 속 괴물들의 실감 나는 묘사로 인해 차가운 소름이 돋을 정도이다.

그림을 보고 있는 사람들을 어둠 속으로 금방이라도 빨아들일 것 같은 무서운 마력을 느낄 수 있다.

마치 타인의 악몽을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악몽을 꾸고 있는 듯하다.


 

 

Henry Fuseli,
Titania and Oberon,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티타니아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아테네의 공작 테제와 아마존 여왕 이폴리타는 결혼 축하연을 위해 천을 짜는 직공인 보톰에게 연극을 의뢰한다.

궁전 근처의 숲에서 연극을 공연하기로 하고 보톰은 장인들과 함께 무대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는 작업을 하고 있던 숲이 요정들이 살고 있는 마법의 숲이란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마법의 숲에서는 한창 요정들이 사랑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리장드르, 에메리아, 데메트리우스, 엘레나와 같은 요정들이 서로를 쫓아다닌다.

에메리아는 리장드르를 사랑하고, 데메트리우스는 에메리아를 사랑하고, 엘레나는 데메트리우스를 사랑한 나머지

계속 그 뒤를 쫓고 있었다.

한편 숲의 왕인 오베론과 여왕 티타니아는 한창 다투고 있던 중이었다.


오베론은 엘프의 제왕이고 티타니아는 요정 나라의 여왕이다.

영국과 독일의 중세 설화에서 마법의 제왕으로 등장하는 오베론은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마법사이고

티타니아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마녀로 묘사된다.


셰익스피어는 이런 중세 시대의 설화를 배경으로 '한여름 밤의 꿈'을 만들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오베론은 티타니아에게 복수하기 위해 부하인 퍼크를 시켜 잠든 티타니아의 두 눈 위에

마법의 물약을 뿌리도록 했다.

티타니아는 이제 눈을 뜨기만 하면 누구든지 처음 눈에 보이는 상대와 사랑에 빠지는 마법에 걸려들 운명이었다.

마침 퍼크는 연극을 준비하기 위해 숲을 어슬렁거리던 보톰을 발견하고 그의 머리를 당나귀로 변하게 만든다.

그리고 티타니아에게 데려간다.


잠에서 깬 티타니아는 눈을 뜨자마자 당나귀 머리를 한 보톰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놀라운 마법의 효과를 본 오베론은 숲을 시끄럽게 하는 요정들의 사랑 다툼을 해결하기 위해

이번에는 데메트리우스의 눈에 마법의 물약을 뿌려 그가 엘레나를 사랑하도록 만들라고 퍼크에게 지시한다.

그런데 문제는 리장드르, 에메리아, 데메트리우스, 엘레나가 모두 한꺼번에 뒤섞여 서로 쫓아다니며 구애하는 바람에

퍼크는 누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그만 실수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그의 실수로 데메트리우스와 리장드르 모두 엘레나를 따라다니며 구애하고, 에메리아는 홀로 남겨지게 된다.

이를 지켜본 오베론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도록 그들에게 걸린 마법을 풀어주었다.


아테네 왕인 테제가 연극을 보기 위해 숲에 나타나고 그들의 화려한 결혼 축하연과 함께

다시 리장드르와 에메리아, 데메트리우스와 엘레나의 결혼식이 거행된다.

보톰과 티타니아 역시 마법에서 깨어나고 보톰은 테제를 위해 준비한 연극의 막을 올린다.

피라메와 티스베의 사랑 이야기가 무대 위에 올려지고 이렇게 한여름 밤의 꿈같은 사랑은 계속된다.



Henry Fuseli,
Titania and Bottom,
circa 1790, Oil on canvas, support: 2172 x 2756 mm


푸즐리가 셰익스피어의 희극 '한여름 밤의 꿈'에서 관심을 보이고 있는 부분은

보톰에 대한 티타니아의 사랑이 아니라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마법의 힘이다.

 

따라서 티타니아와 보톰은 특별히 부각되지 않고 요정들 사이에 묻혀 그들의 일부로 묘사된다.

이 두 요정은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금방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많은 요정들에 둘러싸여 있으며,

각각의 요정들은 너무 개성이 강해 보는 이의 눈을 어지럽힌다.

 

어디부터 보아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그림의 구성은 복잡하고 중첩되어 있으며 산만하기까지 하다.

하나의 통일된 주제 없이 부분 부분이 모두 다른 주제를 표현하며 섞여 있다.


사랑의 주제는 그만큼 혼란스럽고 정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마법에 걸린 두 연인의 모습을 보면서 어딘지 모르게 이런 어지러움이 사랑이 가져오는

달콤한 혼란과 다르지 않을 것 같은 감상에 빠지게 된다.


사랑이 가져오는 비정상적인 상상과 괴상한 만남, 변태적인 성욕, 마음속 어둠에 감춰진 비밀스러운

생각들을 끄집어내어 폭로하는 이상한 경험, 몽환적 분위기, 더구나 순식간에 악몽으로 변하는 사랑의 기괴함 등

사랑과 관련된 모든 기이한 현상이 푸즐리의 그림 속에 빠짐없이 묘사되어 있다.


셰익스피어가 글을 통해 상상의 여지를 남겼다면

푸즐리는 화가의 붓으로 그 상상의 여지를 조금도 남김없이 그려내고 잇는 셈이다.

 

때로는 화가의 재능이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푸즐리의 그림을 보면서 깨닫게 된다.

사랑이 상상의 안개 속에 어렴풋이 가려져 있지 않고 그 모습을 모두 드러낸다면

아마 푸즐리의 그림처럼 일종의 기괴한 요정들의 서커스처럼 보이지 않을까.

그러나 한편으로 푸즐리의 몽환적 세계는 지나치게 왜곡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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