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아쇠 당겼던 그 순간 평생 잊지 못해"
노컷뉴스 | 기사입력 2008.07.07 06:03
[대전CBS 신석우/정세영 기자]
"자기한테 총 좀 쏴달라고 하는데, 방아쇠를 당겨야 했던 그 순간
그 사람의 눈빛을 난 평생 잊을 수 없어."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대전 형무소 특수경호 부대장이었던 이준영(사진.85)씨는
그 해 7월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대한민국 군인과 경찰에 의해 자행된
학살의 순간을 5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지 못한다.
"경찰관들이 쏜 총을 잘못 맞아 목숨이 붙어있었던 거지.
그런데 교도소 특경 부대장이었던 날 보더니 그 사람이
'부장님, 부장님, 나 좀 한 방 쏴주세요'라고 하더라구"라며
"그 사람의 고통을 끊어주기 위해 방아쇠를 당기기는 했지만
내가 사람 하나를 죽였구나 하는 죄책감은 아직도 남아 있어"라며
이 씨는 당시의 심정을 회고한다.
당시 27살이었던 이 씨는 형무소 특경 부대장으로 헌병대의 지시에 따라
이 씨는 "사상범들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보도연맹이나 10년 이상 기결수들이
이 씨는 재소자 이송 트럭을 타고 산내 골령골도 찾았다.
아무렇게나 던져 넣으면 보다 많은 시체를 파묻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게 이 씨의 설명.
"사격을 하고 자기 자리에 앉아 담뱃불을 붙이는데 성냥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리더라구"라며
재소자들에 대한 '처형'은 그 해 7월의 몇 날 동안 대전 산내 골령골 골짜기를 빨갛게 물들였다.
이 씨는
그는 또 "학살당한 백성은 물론이고 당시 총을 쏜 경찰관이나 이를 감독한 군인,
"총성은 있었지만 책임자는 없었다" |
한국전쟁 당시 최고 수 천명에 이르는 양민을 '총살'시키라는 상부의 지시가 있었지만 학살과정에서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 특히 일부 정부 관료들의 무책임한 지시가 죄 없는 양민들의 학살로까지 이어졌다는 증언도 나왔다. "재소자 가운데 인민군들의 우두머리를 처형하라"는 한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날이 밝는대로 인민군의 공습이 시작된다는 첩보가 입수됐다는 것. 처형키로 하고 사상범과 보도연맹원, 10년 이상 장기수 등에 대한 총살 명령을 내렸다. 이 같은 명령을 내린 뒤 곧바로 후방으로 피난길을 떠난다. 당시 내무부 교정국장은 피난길에 오른 장관을 만난다는 이유로 대전역을 찾았다가 "모든 권한을 소장에게 맡긴다"는 말만 남긴 채 인파 속에 묻혀 돌아오지 않았다. 논산 방면으로 줄행랑을 쳤으며 나머지 간부들도 가족들을 데리고 피난에 나섰다. 한 장관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서도 "나중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나를 만났다는 말은 하지 말아달라"는 부탁까지 한 것으로 전해진다. "자기만 생각하는 정부 관료들 때문에 나라가 이 지경이 됐구나하는 생각에 총으로 쏘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고 말했다. 도망친 형무소 간부들은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아 계엄군에 붙잡혀 와 한 경찰서 안에서 총살을 당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하급 관리들에게만 죄를 물을 수는 없다"며 "이들에게 죄를 묻는다면 앞서 도망간 대통령과 정부 고위 관료들에게도 똑같은 처벌을 내려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준영 부대장의 이의 제기로 이들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혼자만 살기 위해' 도망치기에 급급했던 당시 정부 고위 관료들의 처형 명령 하나가 수 천명에 이르는 무고한 양민들을 죽음으로 내몬 사건. "지금 생각해도 당시 그와 같은 관료들이 있어 나라가 그런 혼란을 겪었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며 "어느 나라고 어느 시대이고 지도자를 잘 만나야 나라가 평화롭고 번창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선 안된다"고 충고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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